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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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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라, 도둑님의 조력자들이여

전두환의 집권과 초기 체제 구축에 직간접적으로 도운 조력자들은 이제라도 증언·고백·반성해야
등록 2021-11-27 02:46 수정 2021-11-27 04:09

전두환 일가의 재산 의혹을 다시 조사한 <한겨레21> 제934호 표지이야기 ‘도둑님들’(2012년 11월)을 썼던 고나무 전 <한겨레> 기자는 이후 <한겨레>에서 시민들의 제보와 의견을 받는 크라우드소싱 저널리즘 방식으로 ‘전두환 재산 찾기 프로젝트’를 벌였다. 전두환의 모든 것을 집대성해 2013년 책 <아직 살아 있는 자, 전두환>(북콤마)도 펴냈다. 그에게 ‘사망했지만, 아직 살아 있는 자’ 전두환에 대한 글을 부탁해 싣는다. _편집자

“미국인에게 그림자에 가려진 인물.”(Shadowy Figure to Americans)

존 위컴 한미연합사령관(1979년 당시)은 회고록 <12·12와 미국의 딜레마>에서 1979~1980년 시점의 전두환을 이렇게 묘사했다. 존재감이 없었다는 말이다. 1980년 전두환의 공식 직책은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였다. 지금으로 치면 안보지원사령관(옛 기무사령관)이자 국가정보원장 겸직이다. 대통령은 엄연히 최규하였다. 대중적 인지도는 낮았으나, 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군내 최고 실력자가 됐다. 그리고 군은, 당시 한국 사회 최강 집단이었다.

DJ와 YS는 왜 ‘그림자에 가려진 인물’에게 패했는가

당시 주한 미국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의 회고록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보면, 그는 전두환과 1980년 5월9일 비공개로 만났다. 전두환이 이날 만남 장소로 글라이스틴에게 제안한 곳은 다름 아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술 마시다 살해당한 바로 그 안가(정보부 비밀가택)였다. 글라이스틴은 훗날 그 장소의 정체를 파악하고 경악했다. 전두환은 공포심을 유발하려 연출한 걸까?

전두환이 2021년 11월23일 사망했으나, 아직 질문이 남아 있다. 왜 1979년 말 디제이(DJ·김대중)와 와이에스(YS·김영삼)는 무명의 정치군인, 미국인이 ‘그림자에 가려진 인물’이라 묘사한 사람에게 패배했는가. 2013년 책을 쓰며 이 질문을 자문했고, 실화 스토리 기획사를 운영하는 지금도 나는 ‘인간 전두환의 실체’를 묻고 있다.

이 질문은 ‘조폭형 리더십’과 관련 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 당시 국민 다수는 민주주의의 회복을 기대했다. 신민당이 유력한 집권당으로 여겨졌다. 1979년 한국 사회 정·재·관계 상층부의 정보를 가장 넓고 깊게 장악했던 주한 미대사, 한미연합사령관,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장 등의 당시 상황 판단이다.

글라이스틴은 1979년 11월8일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우리는 한국의 국가시스템이 자유화돼야 함을 알고 있다. 단 하나의 질문은 속도다. 우리는 한국민의 바람을 수용할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민의 바람’은 민주화였다. 유신 독재자가 사라졌고, 권력의 공백이 왔다. “신민당의 김영삼, 김대중: 지금 조건에서 인기투표를 한다면 질문의 여지 없이 신민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분석한 1979년 11월 미 국무부 보고서도 있다. 1978년 12월 총선에서 신민당은 극악한 부정선거에도 32.8%를 득표해 공화당(31.7%)을 앞질렀다. 민심은 유신독재에 반대하고 있었다.

전두환은 ‘정보정치’와 ‘조폭형 리더십’으로 이 권력의 대세, 역사의 대세를 멈춰 세워버렸다. ‘리더 전두환’은 철저히 유신독재 정보정치 시스템의 학습자이자 수혜자였다. 글라이스틴은 회고록에서 “전두환은 유신의 아들”(Chun DooHwan was a Son of Yushin)이라 표현했다. 위컴은 회고록에서 전두환을 “박정희의 프로테제”라고 묘사했다. 멘토의 반대말, 즉 ‘제자’라는 의미다. 전두환은 탱크로 집권한 게 아니라 정보를 장악함으로써 12·12 쿠데타에 성공했다.

12·12 쿠데타의 희생자 아니라 조력자였던 노재현

리더 전두환은 ‘지지자를 보상하라’는 원칙에 충실했다. “능력보다 인정과 의리, 즉 일차적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가치관.” 전두환 ‘조폭 리더십’의 실체다. 5공화국 당시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대통령의 자격: 스테이트크래프트>에서 한 묘사다. 전두환은 재벌 2세에게 돈을 받아 육군사관학교 축구부 후배들에게 졸업 이후에도 줄곧 불고기를 사주었다. 베트남전 말미에 파병됐을 때는 군 비상식량인 ‘시레이션’ 일부를 역시 육사 축구부 후배들에게 보냈다. 간첩을 놓친 하나회 소속 후배 군인이, 간첩을 잡은 비하나회 장교보다 먼저 승진했다. 하나회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조직한 군내 사조직이었다. 전두환·노태우 12·12 쿠데타와 이후 집권의 핵심세력이다. 언론은 하나회 규모를 대략 ‘85명’으로 추산했다. 조직된 85명이 1979~1980년 대한민국을 접수해버린 것이다.

정치군인 전두환은 사악한 정치기술자였다. ‘머리가 나쁘다’는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전두환은 공부 성적은 꼴찌였으나 정치동물처럼 행동하고 움직였다. 사악했고 집요했고 전략적이었다. 12·12 쿠데타는 작전권을 가진 한미연합사령관을 무시한 조약 위반 행위였다. 집권하려면 미국의 승인이 필요했다. 전두환은 퇴역한 미군 장성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 지지를 호소했다. 리처드 스틸웰이 대표적이다. 스틸웰은 전두환의 뜻대로 1980년 5월 방한해 ‘미국이 전두환을 승인했다’는 이미지를 심어줬다.

갑자기 열린 민주주의 공간에서 정치군인의 부상을 막아야 했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상황의 엄중함을 파악하지 못했다. 전적으로 그들 잘못은 아니다. 두 민간 정치인은 군 내부 정보로부터 철저히 소외됐다. 그럼에도 강준만 교수는 <한국 현대사 산책>에서 손잡고 전두환과 맞서야 했을 두 정치인이 신민당 내 주도권 경쟁을 하느라 군부 동향 파악에 게을렀다고 비판했다.

2021년 11월25일 전두환씨 빈소에서 육사 총동창회 회원들이 거수경례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2021년 11월25일 전두환씨 빈소에서 육사 총동창회 회원들이 거수경례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김대중에게 사형선고 내린 판사들을 기억하는가

이제 남은 정치적 숙제가 무엇인지 물을 차례다. 전두환의 집권과 초기 체제 구축에 직간접적으로 도운 조력자들은 이제라도 증언, 고백, 반성해야 한다. 이걸 하지 않은 대표적인 사람이 2019년 사망한 노재현 전 국방부 장관이다. 노 전 장관은 12·12 쿠데타의 희생자로 이미지화됐으나 그렇지 않다. 그는 조력자였다. 위컴은 1979년 12월4일 노재현 당시 장관에게 육사 11기의 위험성을 언급한 어느 한국군 장성의 말을 전했다. 노 전 장관은 이를 무시했다. “훗날 노재현 장관과 최규하 대통령은 그 운명적 아침에(1979년 12월13일) 왜 전두환에게 항복했는지 명확히 밝힐 것이다”라고 글라이스틴은 회고록에 썼다. 최규하, 노재현 둘 다 글라이스틴의 기대와 달리 증언도 고백도 반성도 없이 조용히 죽었다.

장태완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의 정당한 쿠데타 진압 명령에 결국 불복한 ‘소심자’ 손길남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의 고백을 나는 아직 들어본 바 없다. 본인은 하나회도 아니었으면서 장태완과 통화한 직후 쿠데타군과 다시 통화하기를 반복하며 결국 조용히 부대 출동을 거부했다. 조용히 소장 예편했다. 지금 전두환에게 침 뱉는 사람 중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서 김대중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군사법원 판사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가. 심판관 소장 문응식, 준장 박명철, 준장 이재홍, 준장 여운건, 중령 양신기. 이들의 고백은 어디에서도 검색되지 않는다.

‘비자금을 숨겨준 광범위한 조력자들’의 실체를 여전히 우리는 모른다. 세 번에 걸친 검찰의 비자금 수사에도 이들 ‘명의수탁자’의 실체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조력자들은 처벌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전 금융실명제법에서는 금융기관 차명계좌를 만들어준 사람과 만들도록 부탁한 개인은 처벌받지 않았고, 오로지 차명계좌를 개설해준 기관만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친인척과 하나회 관련자들의 친인척과 지인 정도로 알려진 이들 조력자의 실체를 밝히고 역사적 책임을 묻는 작업은 여전히 언론이 해야 할 과제로 보인다.

기억해야 할 이름이 또 있다. 최규하와 노재현이 쿠데타군에 항복할 때 한 병사는 그저 원칙에 따라 야간 경계근무를 서다 총 맞고 죽었다. 병장 정선엽은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연결하는 지하벙커 야간근무자였다. 쿠데타군을 마주치자 암구어(피아 식별을 위해 정해놓은 말)를 했다. 암구어에 응하지 않자 사격했다. 쿠데타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2021년 5월 “병장 정선엽”이라는 이름을 한 번이라도 말한 집권당 국회의원을 본 기억이 없다.

우연히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람

그러므로 나는 다음 두 개의 문장보다 이 글의 더 나은 결론 문장을 창작할 능력이 없다.

“우리 미국은-특히 나는- 전두환을 모든 악의 사악한 근원으로 여김으로써 한국 정치를 지나치게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전두환은 우연히, 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여러 사람 중에 한 명이 된 것이다.”(1980년 3월12일 주한 미국대사관 국무부 전문 3쪽)

“신민당은 그들이 단지 시끄러운 반대 운동만 할 줄 아는 게 아니라 현명한 정책을 입안하고 유능한 정부를 운영할 능력이 있음을 과거보다 지금 더 보여줘야 할 것이다.”(1980년 3월12일 주한 미국대사관 국무부 전문 4쪽)

고나무 팩트스토리 대표·<아직 살아 있는 자, 전두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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