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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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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집값을 빼면 [사는집①]

서울의 자가점유 가구는 42%, 목소리 소외된 세입자들이 다수인 도시
세입자 다섯 가구가 거쳐온 14채의 ‘내 집’과 주거정책 그리고 꿈
등록 2022-01-24 13:58 수정 2022-01-26 01:37
‘집걱정끝장 대선주거권네트워크’가 발족식을 열며 대통령선거 후보들에게 주거권 강화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윤운식 선임기자

‘집걱정끝장 대선주거권네트워크’가 발족식을 열며 대통령선거 후보들에게 주거권 강화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윤운식 선임기자

값이 감춘 슬픔이 있다.
축축한 공기와 곰팡이, 창틈으로 침입하는 낯선 이의 시선, 집에 이르기까지 마주치는 유흥가의 불빛 같은 것들. 왜 이런 집이어야 하는지 세상은 잘 답하지 않았다. 왜 이런 집을 위해 노동하고, 세를 내고, 갱신에 마음 졸이고, 집주인의 지청구를 듣고, 항변하지 못했는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집값의 등락을 말했다. ‘내 집 마련’은 의심할 수 없는 꿈이니까. 그 꿈을 향해 잠시 거기 머무는 것뿐이니까. 이 슬픔이 임시라는 건 위로 같기도 했다. 꿈 혹은 욕망이 한데 모였다고 알려지고, 집값이 오르고, 금리도 오르고, 도저히 소유에 가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듯하여 더는 꿈에서 위로를 구할 수 없는데. 아직 명료한 답은 없다. ‘내 집 마련’에 기운 정책, 선언, 공약은 넘친다. ‘내 집’이 아니어도 잘 사는 삶을 향한 말은 가뭄에 콩 나듯 있다. 그마저 부정당한다. 거의 처음이랄 만한 주거 관련 실질적인 법제도인 ‘임대차 2법’(계약갱신청구권·전월세상한제)은 시행 1년 반 만에 “출구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값 앞에 슬픔은 감춰져 있다.

값을 거두면 보이는 기쁨도 있다.
세입자, 아니 거주자는 7만원짜리 플루어 조명, 2인용 소파, 처음 짜본 책장, 길게 빠진 떡갈나무 테이블을 집에 들여놓는다. 마룻바닥과 창틀을 윤이 나게 닦는다. 원래 내 것은 아니지만 귀하게 여겨주니 내가 주인이라고 말한다. 내가 사는 곳이므로 ‘내 집’이라고 말한다. 집값을 궁리하며 살 곳을 정하는 대신 삶이 공간을 규정하도록 했다. 그렇게 만든 공간이므로 소유자보다 더 이 집을 사랑한다.

집값과 무관한 사람들, 세입자의 슬픔과 기쁨을 들었다. 값을 뺀 진짜 집의 의미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그들을 둘러싼 제도의 역사를 나란히 본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위해 설계된 세상의 규칙은 이내 낯설어진다. ‘임장’(부동산 매매를 위해 현장을 조사하는 것)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실은 살기 좋은 동네를 탐색하고 있을 뿐인 청년 임장꾼들의 사정도 들었다._편집자주

*등장인물은 가명으로 표기했다.

서울과 그 주변 도시, 14채의 집이 있다.

다섯 가구가 과거에 거쳐 왔거나, 지금 살고 있는 셋집이다. 삶을 갉아먹는다 싶게 엉망인 집도 있었고, 그마저 언제 내몰릴지 몰라 불안한 집도 있었다. 물론 행복한 기억도 깃들었다.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시디(CD)를 진열해보고, 어쨌든 잠을 자고, 고양이가 볕을 쬐는 모습을 지켜보고, 마당에서 아이가 뛰고, 쌍둥이 두 아이가 까부는 일상이 모두 그 집 안에서 펼쳐졌다.

세상이 ‘집’에 관해 말하는 동안 그 셋집들이 주인공 자리에 선 적은 별로 없다. ‘내 집’은 아니며, 돈이 되는 집도 아니다. ‘전세 대란’ ‘월세 대란’ 하며 이름 불리는 순간조차 매매시장 불균형의 부수적인 피해자로 불려나온 정도다. 대선 국면에도 비슷하다.

“‘누구나집’으로 내 집 마련 꿈을 현실로 만들겠습니다.”(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첫 주택 장만’이나 ‘청년주택’은 대출 규제를 대폭 풀어서 LTV(주택담보대출비율)를 80%까지 풀어도 문제가 없습니다.”(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집이란 무릇 내 집 마련에 실패했거나 아직은 도전 중인 사람들이 반드시 마련, 장만해야 하는 공간으로 여기는 표현에 의심 한 점 없다.

이제 만날 다섯 세입 가구의 바람은 명백히 행복해지는 것이다. 안정적으로 집에 사는(Living) 것이다. 집을 살(Buying) 수 있는지, 집이 얼마인지, 얼마가 될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푸념 섞인 수다에 가까운 이들의 셋집 얘기를 듣다보면 ‘내 집 마련’이라는 소유권의 꿈으로 짜인 이 세계가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진다.

‘소유권’으로 짜인 세계에서 제외된 사람들

주인공이 아니라는 말은 정정하기로 한다. 어디 살든 안정적이고 행복할 수 있는 ‘주거권’을 꿈으로 정한 세계에서 그들은 늘 주인공이었다. 물론 자주 고난에 처했다.

선혁(25)씨는 5년 전 친구들하고 “언제 취업해서 언제 집 사냐” 같은 대화를 했다. 기숙사를 나와 처음 자취를 시작할 무렵이다. 돌아보니 클리셰다. 취업하면 집을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도, ‘내 집 마련’이라는 세상 사람들이 규정한 꿈을 의심하지 않았다.

선혁씨네: 주거 사다리

경기도 용인 원룸텔 → 고시텔 → 빌라(1.5룸)

*김명수, <내 집에 갇힌 사회-생존과 투기 사이에서>를 참조했다.

주택 문제에서 문재인 정부의 차별점이라면 ‘주거복지’라는 단어를 정책의 지평에 올려둔 것이다. 2017년 11월 문재인 정부는 ‘주거복지 로드맵’을 발표한다. 다만 발표 제목은 ‘사회통합형 주거 사다리 구축을 위한 주거복지 로드맵’이다. 여전히 ‘사다리’다. 월세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자가 소유로, 사다리를 한 칸씩 오른다는 상상 속 그림은 정부가 바뀌어도 그대로다. 사다리의 종착점은 여전히 ‘내 집’이다.

그즈음 선혁씨는 여느 날처럼 새벽 4시30분 술집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고 있다. “돌아갈 집을 생각하니까 문득 슬펐어요. 그 집 같지도 않은 집 월세 벌려고 이러고 산다는 게.” 2017년 선혁씨네 집은 월세 35만원, 보증금 없는 고시텔이다. 직전에는 보증금 60만원에 월세 50만원 하는 원룸텔에 살았다. 보증금이 거의 없다시피 한 대신에, 창문은 없다. 빨래건조대를 세워둘 자리도 없다. 그 시절 하면 빨래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방 안 빨랫줄에 주렁주렁 옷가지를 널어놨는데 습해서 대충 마른다.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나는 게 분명하다. 그 냄새가 온 생활을 쫓아다녔다. 자리가 부족해 방 바깥에 빨래를 널 때는 “내 삶을 만천하에 전시하는 느낌이라 부끄러웠다”.

그 집을 위해 일해야 하고, 일하지 않으면 그 집조차 없다. 서러웠다. 여기는 다만 사다리의 중턱이고 언젠가는 내 집이 생길 거라는 말이 퍽 달콤하게 여겨질 법도 했다. 40년 전 한국 사회도 그랬다.

서울 동대문구 원룸촌 풍경. 한겨레 윤운식 선임기자

서울 동대문구 원룸촌 풍경. 한겨레 윤운식 선임기자

서러움을 덜어낼 두 가지 방법

‘셋집살이의 서러움’을 두고 두 갈래 길이 있었다. ‘서러움’을 주거권 보장과 주거복지로 덜어내는 사회적인 길이 있다. ‘셋집살이’를 내 집 소유로 극복하는 개인적인 길이 있다. 1980년대 서울 땅이 아파트로 덮여가면서 목동, 돈암동, 사당동 등 개발지역에서 펼쳐진 격렬한 철거민 투쟁은 ‘주거 생존권 보장’을 요구했다. 내 집을 소유하게 해달라는 운동은 아니다. 서러움을 덜어내라는 요구다. 정부는 ‘주거 생존권 부정(세입자 추방과 철거)과 재산권 승인(토지주에게 토지보상)이라는 상반된 처리’로 대응했다. 자력 주택 건설이랄지, 사회주택(공공주택) 건설 요구는 자리를 잃는다. 아파트로 변해가는 서울 땅에서 안정적인 주거권을 구할 유일한 통로는 집을 사는 것으로 좁아졌다.

더군다나 집, 특히 아파트에 당첨되는 일은 숱한 시민의 자원을 몰아받아 자산 증식의 길에 들어선다는 의미였다. 정부는 재정투자 대신 가계가 모은 자금(청약저축으로 조성한 주택도시기금, 선분양금 등)을 동원해 아파트를 짓는다. 그 가운데 정부의 간택으로 분양받으면, 드디어 자산 증식의 기회를 얻는다. 더 비싼 값에 뒷사람에게 팔 수 있다. 기회가 내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꿈은 빠르게 전염됐다. 1987년 19만4천여 명이던 청약저축 가입자 수는 1991년 288만6천 명까지 급격하게 불어난다.

1991년 수서·가양·대치·목동 아파트 분양 접수 현장에서 청약 신청자들의 시위는 우발적이었으나 시대의 분위기를 적절히 반영한다. 부족한 공급, 소형 평형 중심의 공공주택 공급, 비합리적인 분양 기준 등 당시 정부 정책 기조에 항의했다. 창구에 난입해 이미 제출된 1700여 개의 청약 서류를 찢었다.(<한겨레> 1991년 12월4일치 ‘주택청약자 항의소동’) 충분하지 않은 내 집 마련의 기회를 두고 분노했다. ‘소유권을 요구하는 목소리 틈에서 몇 해 전 주거권을 요구한 철거민 투쟁을 떠올리며, 순식간에 주거권에서 소유권으로 변해버린 시민의 꿈을 실감했다’는 문장은 물론, 당시 기사에는 없다.

정부는 큰 틀에서 비슷한 개발사업과 청약, 분양을 이어왔다. 자가 소유자는 1990년대 후반 재개발, 2000년대 초반 대출 확대라는 또 한 번 ‘내 집 마련’의 열망을 불태울 계기를 만나, 2000년대 중반 중요한 정치세력이 됐으며, 세제·금리·집값의 움직임, 개발 규제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부동산 불패 신화가 만들어지고… 모두 아는 얘기다. 다만 이상한 일은 그 뜨거운 열망 속에서도 서울의 자가점유율이 별반 높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1995년 39.7%이던 서울의 자가점유율은 여전히 40% 언저리다. 서울은 자가 소유자의 도시가 되지도 못했고, 주택의 탈상품화(임대주택과 주거권 확대)도 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아이돌 CD가 짐이었던 시절

2019년부터 선혁씨네 집은 방 하나와 주방이 있는 1.5룸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전세임대로 전세 9천만원짜리 집을 구했다. LH가 들어가기는 해도 공공임대주택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LH 전세임대는 세입자가 직접 집을 찾아 오면(최대 1억2500만원) LH가 집주인과 대신 계약해주고, 세입자가 LH에 보증금과 이자 수준의 월세를 내는 식이다. 집은 원룸텔에 살던 5년 전처럼 끔찍하기만 한 공간은 아니다. 무엇보다 좋은 건, “책장을 놓을 수 있어요. 책장에 오마이걸 CD라든지 사진을 둘 수도 있고요. 오마이걸을 좋아하거든요. 원룸텔, 고시텔 살 때 그런 건 다 짐이었으니까.”

불안은 여전하다. “이제 일을 시작해서 아직 돈을 모으지 못했는데 소득이 있으니까 LH 임대 자격에서 탈락하지 않을지. LH 임대라고 해도 엄연히 집주인이 있는 거니까, 갑자기 안 하겠다고 내보내지 않을지 생각 많이 합니다.” 그 불안은 2021년 첫 계약 갱신을 앞두고 좀 웃기고도 슬펐다. “LH 직원들 투기 사태가 터졌잖아요. 저도 다른 시민들처럼 LH에 엄청 분노했죠. 그런데 ‘LH 해체하라’ 구호가 나오는데 바로 드는 생각이, ‘그럼 우리 집은?’인 거예요.”

언제 취업해서 언제 집 사냐는 말을 하는 친구는 이제 없다. 선혁씨와 친구들의 꿈은 이제 “어디에, 어떻게 살든 마음 편히”인데, 다소 의심스럽기는 하다. “내 주변이 가난한 편이라 그런 걸까요?” 과연 그런 걸까.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최선의 집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는집②] 기사로 이어집니다.

1398호 표지이야기

집에서 집값을 빼면 [사는집①]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511.html

최선의 집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는집②]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512.html

서울은 세입자의 도시다 [사는집③]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5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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