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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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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장 하러 갔다 공원에 반했어요

MZ의 새로운 문화 ‘임장’, 인터넷 지도로 볼 수 없는
주거 환경 살피고 오랫동안 여러 번 둘러보며 살 집 결정해
등록 2022-01-25 08:20 수정 2022-01-26 01:35
2022년 1월8일 경기도 평촌 신도시 학의천의 모습.

2022년 1월8일 경기도 평촌 신도시 학의천의 모습.

오리가 떠다니는 하천 너머로 32층 아파트가 보였다. 0도의 날씨에도 사람들은 햇볕이 내려앉은 길을 따라 산책했다. 2022년 1월18일 오후 3시 신도시 경기도 안양시 평촌의 풍경이다. 대형마트가 바로 붙어 있는 지하철역에서 걸어나와 신혼부부들이 자주 찾는다는 구축 아파트를 들러, 공원과 도서관을 지나 2만 보를 걸었다. 집에 관심이 많은 청년이 연인, 친구와 함께 즐긴다는, 이른바 ‘부동산 임장’을 따라 해본 것이다. 평촌의 한 부동산 공인중개사는 “공원, 하천, 도서관, 마트 등이 있고 강남, 판교와도 가까워 손님 10명 중 7명은 신혼부부”라고 말했다.

주말마다 동네 임장

‘임장’은 현장에 임한다는 뜻이다. 집뿐만 아니라 인근 교통, 학군, 상권, 환경 등을 발품 팔며 살피는 임장 관련한 온라인 카페가 요즘 청년들에게 인기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만 100개 넘는 임장 채팅방이 있다. 임장에 몰두한 청년들은 부동산 관련 기사를 오픈채팅방에 올리고, 살펴본 매물에 대해 서로 조언해준다. “기성세대가 이해 못할 정도로 부동산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는 청년들이 있어요. 함께 임장을 다니며 지역을 분석하고 토론해요.” 임장 관련 오픈채팅방 방장을 맡은 문성호 공인중개사의 말이다.

집을 사지 않더라도 좋은 전셋집을 구하려고 주말마다 동네 임장을 하는 청년도 있다. 건축회사 직원인 30대 김아무개씨는 전세계약이 끝나기 6개월 전부터 일요일마다 아내와 함께 동네투어에 나선다. 결혼하기 전에도 20번 넘게 전셋집을 구하러 ‘임장 데이트’를 했다. 그 동네 맛집에 가서 밥을 먹고 인터넷 지도로는 볼 수 없는 동네 분위기를 살핀다. 요즘 그가 염두에 둔 동네는 서울 성동구 송정동, 종로구 신영동 등이다. 부촌 근처 동네에는 개인 건축주들이 마음을 담아 지은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들어서 있다. 김씨는 “동네가 낡아도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건축주가 신경 써서 지은 집이 많은지, 건설업자들이 들어와서 마구 건물을 올린 동네인지를 살핀다”고 말했다.

2018년부터 매주 혼자서 임장을 다니는 취미가 있는 공무원 30대 김아무개씨는 성인이 돼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처음 머물렀던 원룸을 잊지 못한다. 다세대주택에 있던 3평짜리 방은 슬레이트로 쪼개져 방음조차 되지 않았다. 가파른 언덕에 자리한 동네에는 똑같이 생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주변에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도 힘든 곳이었다. 그는 정규직 일자리를 구한 뒤 경기도 남양주 별내·다산, 파주 운정, 광명, 김포, 서울 노원 등 10여 곳을 돌아다녔다. “아토피도 있고 미세먼지가 심해지다보니 집 주변 환경에 대한 민감도가 커졌다. 임장할 때 집의 투자 가치와 아울러 산책로가 잘 마련됐는지를 주로 봤다.” 김씨는 2019년 서울 노원구 초안산 산책로와 가까운 아파트를 매입했다.

“임장 데이트는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서울에 사는 직장인 30대 이아무개씨는 사귀는 애인과 만날 때마다 7개월 동안 카페에서 임장 갈 곳을 인터넷으로 찾곤 했다. ‘집값이 쉽게 내려가지 않고 소음이 없고 채광이 좋은 집.’ 애인이 원한 주거환경이었다. 이씨는 공원과 하천이 가깝고 치안이 좋은 집을 원했다. 여러 차례 ‘임장 데이트’를 하며 서로가 어떤 주거환경을 원하는지 알아갔다. 이씨는 “(임장 데이트는)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선택한 아파트에서 두 사람은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햇볕이 잘 들고 자동차 소음도 적은 아파트였다. 우이천은 집에서 걸어서 3분, 북서울꿈의숲은 걸어서 10분 걸린다. 집 가까운 곳에 지구대가 있어 치안도 안심됐다.

“임장은 삶의 편의성을 보는 거예요. 예를 들어 하천과 공원이 가까운 아파트를 산 신혼부부가 퇴근했다고 해봐요. 집을 나와 마트에 걸어가며 산책하고 장보고 들어오면 운동도 되고 대화도 나누죠. 요즘 세대가 원하는 삶이에요. 이런 상황을 머리에 그리며 임장하게 되죠.”(문성호 공인중개사)

30대 장아무개씨는 걸어서 백화점이나 공연장 등 문화시설에 갈 수 있는 곳을 우선순위로 집을 정했다. 그는 결혼을 앞두고 6개월가량 주말마다 애인과 함께 서울 곳곳을 다니며 임장 데이트를 했다. 그 결과 신혼집을 서울 성북구 길음역으로 정했다. 남들보다 1∼2시간 퇴근이 빨라 백화점에서 세일하는 식재료를 사서 집에 들어온다. 날이 좋으면 걸어서 대학로 마로니에공원까지 남편과 걸어가기도 한다. “임장할 때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2030세대인지도 살폈다. 같은 세대끼리 살면 예쁜 카페가 많아지는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상권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시간 날 때마다 다음에 이사할 집을 구하려 인터넷으로 임장 갈 곳을 살핀다.

도보 10분 이내에 공원, 도서관을

청년들에게 임장은 단순히 부동산으로서 집을 구하는 행위를 넘어, 자신이 살고 싶은 동네를 결정하고 집 주변 환경의 우선순위를 선택하는 과정이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부 교수는 청년들의 달라진 트렌드를 그 이유로 들었다. “(주거공간을 넘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는 인간의 행복지수에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요즘 청년은 아파트 평수만을 가장 큰 기준으로 집을 사지 않는다. 집과 주변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느 장소, 어떤 분위기를 좋아하는지, 각자의 가치관은 무엇인지 서로를 알아간다.”

유 교수는 더 좋은 주거환경을 찾아 헤매는 일은 “욕망이 아니라 기본권”이라고도 했다. “한국의 도시계획이 잘못돼 대도시에는 공원이나 하천이 부족하다. 모두 넓은 집에서 살 수 없다면 도보 10분 이내에 공원, 도서관 등 공공장소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시계획을 짜야 한다. 집 가까이 위치한 공원은 소유하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거실이다.”

글·사진 이정규 기자 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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