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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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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길’을 내는 공공병원

코로나19 유행 속 재발견된 공공병원, 일제강점기 설립 운동 역사를 돌아보다
등록 2022-03-10 15:06 수정 2022-03-11 01:21
한국의 공공병원 상황은 일제강점기와 비교해도 그리 나아진 것이 없다. 2020년 12월 공공병원인 국립중앙의료원의 코로나19 병동 중환자실 모습. 박승화 기자

한국의 공공병원 상황은 일제강점기와 비교해도 그리 나아진 것이 없다. 2020년 12월 공공병원인 국립중앙의료원의 코로나19 병동 중환자실 모습. 박승화 기자

바야흐로 ‘위드 코로나’ 시대가 시작되는 듯하다. 부유한 국가 대다수가 사회를 격리하는 방역정책보다 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 중이다. 하지만 백신 불평등 문제는 그대로이고 전쟁마저 시작됐다. 갓난아기를 안은 여성과 어린아이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밀폐된 지하도에 옹기종기 붙어 앉아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쪽잠을 자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소식은 감염병 속 전쟁이라는 자본주의의 야만적 속성을 그대로 재현 중이다.

아이티에서 전쟁의 야만성과 감염병의 불평등을 고민했던 의사 폴 파머는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다”라고 말했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유행으로 세계가 경험했다는 그 고통이 누구의 고통이었는지, 고통의 원인은 무엇이었으며, 누가 여전히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정의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전쟁도 할 수 있는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외에 얻는 게 없을 수도 있다.

노동자 일당 1원인데, 진료비가 최소 1원75전

코로나19로 한국 사회에서 재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공병원의 역할이다. 우리나라는 전체 병원 가운데 고작 10% 남짓한 공공병원을 가졌다. 그럼에도 그 10%의 공공병원 종사자가 코로나19 환자의 80%를 도맡아 치료했다. 그로 인해 평소 공공병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수많은 사회적 약자가 하루아침에 병원에서 쫓겨났고 ‘의료 공백’을 겪었다. 이제 80% 넘는 국민이 더 많은 공공병원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참고할 만한 역사 속 공공병원 설립 운동 사례를 소개해볼까 한다.

한국 사회 전체 이목이 집중된 공공병원 설립 운동을 찾으려면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사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공공병원은 당시 인구수 대비 지금보다 적지 않았다. 1930년대 공공병원은 30여 곳으로 도마다 3곳가량 존재했다. 문제는 조선인의 의료접근성이 낮다는 것이었다. 공공병원에서 진료하는 대다수가 일본인 의사였던데다 진료비가 비싸 가난한 조선인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민간 병·의원이 몰려 있는 경성이라고 해서 조선인의 의료접근성이 나았던 것은 아니다. 1931년 조선인 노동자 하루 일당이 1원 안팎인데, 개업의를 찾아가 진찰받고 3일치 약을 받으면 최소 1원75전을 내야 했다. 일본에서 1927년 시작된 건강보험도 조선엔 적용되지 않았다.

1920년대 말 불어닥친 경제공황의 여파는 민중의 생존을 위협했다. 1930년부터 자살자가 크게 늘었는데, 그중에서도 ‘생활곤란’과 ‘병고’(病苦)로 인한 자살자가 가장 많았다. 1930년 초 유석창(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 의사) 등 실력양성운동계열 지식인을 중심으로 실비진료운동(實費診療運動)이 일어났다. 가난한 사람도 치료받을 수 있도록 말 그대로 ‘실비’만 받겠다는 것이었다.

이 운동의 결과물로 1931년 ‘사회영(社會營, 사회운영) 중앙실비진료원’이 세워졌다. 담합으로 의료비를 높게 유지하던 경성의 개원가 의사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으로 구성된 경성의사회뿐 아니라 한국인으로 구성된 한성의사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제 관료들도 편치 않았다. 당시 일제경찰은 실비진료운동을 발단으로 사회운동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며 사회영 중앙실비진료원을 지속해서 감시했다.

조선 민중, 의료를 권리로 인식하다

이러한 질시와 우려 때문이었을까? 1932년 7월14일 ‘격증하는 환자’로 시설 확장과 분원 설립을 고민하던 중앙실비진료원에 대규모 화재가 일어났다.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거의 모든 시설이 불타 정상적인 운영을 할 수 없었다. 어렵게 임시진료소를 열어 사업을 이어나갔지만 상승하던 실비진료운동의 기세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즈음 조선인 사회에서는 이미 “민중의료기관의 시설은 민중의 일방적 책무”가 아니므로 “개인의 물자 제공과 기술자의 희생적 봉사로써 성립되는” 실비진료소 같은 형태를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제 당국이 나서서 가난한 조선인도 진료받을 수 있는 공공병원을 설립하라는 주장이었다.

조선 사회의 요구는 1932년 말 경성부립경비진료소 설립 운동으로 구체화된다. 지금의 서울시에 해당하는 경성부(京城府)에서 실비진료소와 유사한 경비진료소를 세우라는 것이었다. 이 운동엔 조선인 사회만 나서지 않았다. 경제불황으로 평범한 일본인도 고통받은 만큼 적잖은 일본인 단체가 가담했다. 이런 요구가 빠르게 구체화될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경성의 전기·전차·가스를 독점 운영하던 (주)경성전기가 거세게 일어난 반독점, 공영화 운동을 무마하기 위해 경성부에 내놓은 기부금 100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32년 말 경성부가 제시한 경비진료소 설치안이 경성부회에 상정됐다. 경비진료소 설치안에 대한 조선 사회의 뜨거운 관심을 반영하듯 회의에는 300명 가까운 방청객이 몰려들었다. 여론은 찬성이 월등히 우세했지만 의사회를 의식해 반대하는 부회 의원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2차 부회의까지 열고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는 의사회에 오히려 악수로 작용했다. 반대파를 향한 비난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의사회는 수가와 약가규정을 폐기해 더 이상 담합하지 않고 앞장서 경비진료를 실시하겠다는 결의사항을 공표해야 했다. 의사회가 백기를 들자 반대 의견을 내던 부회 의원들도 수그러져 11월29일 마침내 경성부립경비진료소 설치안이 통과됐다.

물론 경성부립경비진료소라는 공공병원 설립을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승리한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경성부가 앞장서 경성부립경비진료소 설치안 통과에 힘쓴 것을 보면 일제가 더 큰 사회운동을 막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여긴 듯하다. 하지만 중일전쟁의 서막이라 할 수 있는 만주사변으로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상황인데도 일제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결코 얕잡아볼 운동은 아니다. 특히 조선 민중이 의료를 권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의미가 있다.

역사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

안타깝게도 경성부립경비진료소 설립 운동이 일어난 지 꼭 90년 만인 2022년 현재, 한국의 공공병원 상황은 그때와 그리 다를 것이 없다. 여전히 공공병원 설립을 가로막는 역사적, 경제적, 정치적 장애물이 많다. 하지만 제국주의 탄압에도 공공병원을 설립했던 과거 경험을 돌아보면, 새로운 길 내기의 가능성은 늘 열려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어려울 때 희망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낭만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잔인한 역사 속에도 열정과 희생, 용기와 친절의 역사라는 사실을 믿는 태도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역병과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과 맞서 싸우면서 인간으로 올바른 삶을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 되물어야 하는, 코로나19와 함께하는 전환의 시기를 살고 있다.

최규진 의사학 연구자·‘건강과대안’ 운영위원

*코로나19 알파-오메가: 사회학·인류학·역사학 연구자와 의사 등 보건의료 연구자가 속한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연구위원들이 코로나19와 감염병, 그리고 코로나19 이후의 사회에 대해 매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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