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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기념식장 스크린에는 가사가 떠 있었는데

등록 2022-05-27 18:58 수정 2022-05-28 01:1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스무 살 이후 내 마음속 애국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듣는 사람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가사와 장중한 가락, 이 노래의 유래와 그것이 울려퍼지는 자리의 의미를 생각하면 절로 경건해졌다. 그러나 이는 1980년생으로 2000년대 초반 대학에 다녔고 학내 언론사에서 활동하며 집회나 투쟁 현장에 종종 달려갔던 나의 세대와 환경에 따른, 다소 특수한 기억이다. 그 뒤 2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국민의힘의 전신인 한나라당, 새누리당이 집권할 때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국가 행사에서 배제되거나 금지당했다.

정작 기념식장 스크린에는 가사가

하지만 정작 이 노래와 관련해 가장 뜨거운 비난에 휩싸인 인물은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일 것이다. 2022년 5월18일 진행된 5·18 광주 민주화운동 42주년 기념식 중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순서에서 잠시 가사가 적힌 팸플릿을 봤다는 이유에서다. 그를 향한 조롱과 욕설의 광풍을 보며 몇 년 전의 작은 ‘논란’을 떠올렸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수 아이유가 황영조 선수를 잘 모른다고 말했다가 “무식하다”며 비난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바르셀로나올림픽은 1992년에 열렸고, 아이유는 1993년에 태어났다. 박지현 위원장은 1996년생이다.

5·18 기념식 하루 전날 저녁, 서울 양재동 SPC그룹 본사 앞에서 민주노총 화학섬유노동조합 파리바게뜨지회 임종린 지회장의 단식투쟁을 응원하기 위한 ‘스트릿 슬픔의 케이팝 파티’가 열렸다. 집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후기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2016년 이화여대 본관 점거 농성을 기점으로 젊은 세대의 투쟁가로 자리잡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비롯한 케이팝 노래가 흘러나올 때 어색해하던 중년 남성 노동조합원이 <임을 위한 행진곡> 전주가 울려퍼지자 드디어 아는 노래가 나온다며 기뻐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세대에게는 ‘상식’이 다른 세대에게는 모르는 정보나 낯선 이슈일 수 있다. 다만 한국은 젊은 여성에게 지성을 기대하지 않는 동시에 한 치의 부족함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다. 특히 대중 앞에 나서서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여성을 향한 기준은 매우 빡빡한데다 대단히 자의적이기에 그 촘촘한 그물을 통과하며 살아남아 성장하기란 불가능한 미션에 가깝다. 굳이 덧붙이자면, 5·18 기념식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가 띄워지고 있었다. 가사 암기와 5·18 정신은 무관하다는 얘기다.

새날이 올 때까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유족 쪽 법률대리인 정철승 변호사가 이 일과 관련해 박 위원장을 “지현아!”라고 하대하며 페이스북에 조롱 조의 글을 올린 날, 다큐멘터리 감독 이소현의 인스타그램에서 짤막한 글을 읽었다. 그의 허락을 얻어 이 이야기를 소개한다.

3년 전 5·18에 광주에 갔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보성에서 오셨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부탁하셨다.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아는가? 그 가사 좀 여그 써주게. 내가 오늘 5·18 전야제 행사를 가야 쓴디 이 노래를 못 외워.”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 “5·18 전야제 행사하러 보성에서 여기까지 오셨어요?” 해마다 행사에 오는데도 가사만은 영 외워지지 않는다며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이런 거 멀다고 빠지면 민주주의가 이뤄졌겠는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온갖 반민주주의적이고 폭력적인 말이 한 청년여성 정치인을 향해 화살처럼 쏟아지던 밤, 나는 그 할아버지의 마음과 민주시민의 자세를 생각했다. 우리에겐 진짜 지켜야 할 가치가 있으니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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