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미래유산도 철거하는 도시에서 누가 버티겠나

‘백년가게’인 최초 주류 점포 을지OB베어, 건물주에 쫓겨난 지 두 달째
매일 저녁 노가리 골목에선 ‘OB베어 되찾기’ 콘서트, 거리 강연이…
등록 2022-07-02 15:52 수정 2022-07-03 02:39
2022년 6월28일 서울 중구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서 ‘을지OB베어를 되찾기 위한 현장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박승화 기자

2022년 6월28일 서울 중구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서 ‘을지OB베어를 되찾기 위한 현장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박승화 기자

불야성. 2022년 6월28일 찾은 서울 중구 을지로3가 노가리 골목은 한마디로 이렇게 부를 수 있었다. 가게 안과 야외 탁자엔 맥주와 노가리를 먹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저녁 8시가 넘었지만 그곳은 낮처럼 밝았다. ‘힙스터’ 같은 옷차림을 한 젊은이, 연애 중인 커플, 회식하는 직장인 무리 등 손님들의 나이대도 다양했다. 뮌헨호프, 에이스호프, 을지로호프 등 여러 맥줏집이 손님들의 발길을 붙들었다. 가장 눈에 띄는 간판은 10호점까지 낸 ‘만선호프’였다. 어딜 둘러봐도 만선호프 간판밖에 보이지 않았다.

같은 장소, 두 개의 세계

그때 이질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만선호프 바로 옆 한 건물 앞에서 ‘을지오비(OB)베어를 되찾기 위한 현장문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건물주 만선호프는 을지OB베어와 상생하라’는 손팻말도 함께. 모두가 왁자지껄 즐겁게 술을 마시는 골목 한복판에서 누군가는 ‘생존’과 ‘상생’을 이야기했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 아니 ‘만선 골목’이라 불려도 좋을 그곳은 같은 장소였지만 두 개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가게가 철거당한 2022년 4월21일, 그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시민들과 연대했다. 노가리 골목의 분위기와 공존할 수 있는 시위 방식을 고민한 끝에 문화제 형태로 기획했다. 심야 라디오, 거리 강연, 예배, 콘서트 등이 매일 열리고 있다.” 을지OB베어 2대 사장인 최수영씨의 말이다.

이날 저녁엔 활동가 ‘사이’씨가 동물권에 관한 거리 강연을 하고 있었다. 열댓 명의 시민이 자리에 앉아 강의를 들었다. 3m 옆 만선호프 야외 탁자에 앉은 손님의 일부도 을지OB베어 쪽을 쳐다봤다. 골목을 지나가던 사람 중 몇 명은 을지OB베어에 연대한다는 내용에 서명하거나 포스트잇에 각자 응원 메시지를 적어 붙이기도 했다.

을지OB베어는 1980년 대한민국 최초의 프랜차이즈 생맥주 가게로 개업했다. ‘노가리+맥주’(노맥)를 처음 선보인 곳이기도 하다. 생맥주도 다른 가게와 달리 냉각기를 쓰지 않고 냉장고에 넣어 사흘간 숙성시키는 방식을 고수했다. 노가리 가격도 20년 동안 1천원을 유지했을 만큼 ‘고집’ 있는 가게였다. 그 덕분에 많은 손님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이후 을지OB베어 주위로 다른 가게가 하나둘 개업하며 자리를 채웠고, 지금의 노가리 골목이 탄생했다.

인근 철물점, 공장 노동자들만 이용하던 노가리 골목은 몇 년 전부터 ‘레트로’ 열풍을 타고 젊은 세대까지 찾아오는 ‘힙지로’의 주축이 됐다. 2015년 서울시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고, 2018년 중소벤처기업부는 을지OB베어를 주류 점포 최초로 ‘백년가게’로 선정했다. 백년가게는 100년 이상 보존 가치가 있는 가게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건물주와 갈등을 겪은 끝에, 을지OB베어는 개업 42년 만인 2022년 4월 철거되고 말았다. 을지OB베어가 있던 자리는 지금 셔터가 굳게 내려졌다.

42년간 세입자로 버텨왔다

세입자 을지OB베어와 건물주의 갈등은 2018년 시작됐다. 건물주가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싶다”며 을지OB베어에 계약 해지를 통보했고, 명도소송까지 갔지만 을지OB베어 쪽이 결국 패소했다. 이후 2020년 11월부터 2021년 8월까지 5회에 걸친 강제집행 시도가 있었지만, 단골손님과 시민사회단체 등의 저지로 무산됐다.

이후 2022년 1월 노가리 골목의 또 다른 맥줏집 만선호프 사장 방아무개씨가 을지OB베어 건물 지분 62%를 매입해 건물주가 됐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4월21일 을지OB베어는 문을 닫았다. 최수영 사장은 “만선호프가 2014년 이 골목에 들어와서 465m가량 되는 노가리 골목에 점포를 10개까지 확장했다”며 “(건물주인 만선호프 쪽에) 월세를 2배 이상 내겠다고 해도 소용없었고, 기습적으로 강제집행을 통해 우리를 쫓아냈으며 대화에도 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을지OB베어가 노가리 골목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연대의 손길이 찾아왔다. 가게의 단골손님들과 여러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대응 중이다. 음악가들은 무보수 공연으로 힘을 보탰다.

이종건 공대위 집행위원장은 “2년에 한 번씩 이사해야 하는 세입자의 도시에서 악조건을 뚫고 42년간 문화를 일궈낸 가게가 을지OB베어”라며 “이런 가게를 잃는다면 이 도시에서 어떤 집도, 가게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대위는 △건물주 만선호프 쪽과 을지OB베어의 상생 △서울시와 중구청의 사태 해결 △중소벤처기업부의 백년가게 보존 대책 마련 등을 요구했다.

만선호프 손님도 남긴 서명

매일 저녁 시민들도 가게 앞으로 모였다. 김송희(37)씨, 이지현(28)씨도 그중 하나다. “에스엔에스(SNS)에서 우연히 을지OB베어가 철거됐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하트’ ‘좋아요’ 하나 누르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손팻말을 들고 가게 앞에 갔다. 당시 한 디제이(DJ)가 공연 중이었는데 만선호프에 있던 손님들이 그 음악을 듣고 몸을 흔드는 풍경이 참 독특했다.”(김송희씨) “오래된 가게라고 해서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 가게는 서울미래유산, 백년가게로 지정된 만큼 사회·문화적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시와 중구청이 나서줬으면 한다.”(이지현씨)

을지OB베어 앞에서 거리 강연이 계속되던 6월28일 밤, 만선호프에서 술을 마시던 40대 남성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을지OB베어를 지키기 위한 시민 서명운동’의 서명판에 이름과 사인을 남기고 떠났다.

‘가끔은 돈을 앞서는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움직임이 발버둥이 되지 않기를.’ ‘상생 골목의 개인 사유화, 공동체의 자본화, 규탄한다! 을지OB베어와 이 투쟁에 연대하는 많은 이들의 염원을 담아 다시 상생의 골목으로 거듭나길.’ 가게 앞에 손님들이 형형색색 포스트잇으로 붙여둔 연대의 메시지가 빛나고 있었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