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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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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재판정의 치마저고리

재특회와 우익 인터넷 사이트에 손해배상 소송 진행하는 이신혜씨,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한복 입고 재판정에 나와
등록 2014-10-16 07:12 수정 2020-05-02 19:27
기자회견장에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온 이신혜씨. 니시오카 겐스케 제공

기자회견장에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온 이신혜씨. 니시오카 겐스케 제공

지난 8월 재일조선인 여성 작가인 이신혜씨가 인종차별적인 ‘혐한시위’(헤이트스피치)로 악명 높은 일본 우익단체 ‘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의 회장과 우익 인터넷 사이트 ‘보수속보’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최근 일본 사회의 혐한시위 제재 움직임과 관련해 어떤 결론이 나올지 이 재판에 관심이 집중돼 있다.

이씨는 재판이나 기자회견을 할 때 꼭 치마저고리를 입는다. 한복을 북한에서는 ‘조선옷’이라고 하는데, 재일동포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치마저고리’라는 말을 많이 쓴다. 한국에서도 전쟁 이후에나 볼 수 있었던 레이스로 된 한복인데 디자인은 현대적이었다. 그 저고리의 사연이 궁금해 물어보았다.

“원래 어머님이 시집올 때 친언니, 그러니까 큰이모가 만들어주신 것을 다시 만든 거예요.”

그런데 우익과 맞서서 재판을 하는데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오면 우익을 자극하지 않을까.

“이 치마저고리는 저한테 부적 같은 거예요. 재판을 하기에 앞서 엄마한테 상담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치매가 심하셔서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거든요. 이걸 입으니까 엄마랑 아빠가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아요.”

어머님한테서 물려받은 저고리는 몇 벌 있는데 재판을 하자고 마음먹고는 마음이 약해지거나 눈물이 나올 때도 있어 밝은 하늘색 저고리를 입었다. 이씨는 아들의 입학식과 같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치마저고리를 즐겨 입었단다.

“우익들과 싸우는데 남자도 아닌데 주먹으로 싸울 수는 없잖아요. 여자로서 싸우는 방법이 뭘까 하다가, 치마저고리를 갖춰 입는 것은 갑옷을 입는 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했죠. 임팩트도 있고 무엇보다 제 자신이 고무되니까요.”

이번 재판은 후대가 같은 비애를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결심한 것이다. 일본에는 인종차별을 처벌하는 법률이 없다. 한국인들이 실명으로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곧바로 우익들의 공격을 받곤 한다. 최근 수년간은 거리에 나온 우익들이 “나쁜 한국인도 좋은 한국인도 죽어버리라”고 외치는 상황이다.

이씨는 인터넷 등에서 우익들이 올리는 폭언을 여러 번 경찰에 신고했다. 그런데 대부분 불기소 처분으로 끝났다.

“일본인 남편과 아들도 재판을 응원하고 있어요. 아들은 결사반대할 줄 알았는데 재판을 해서 인터넷에서 악담을 퍼붓는 사람들이 없어진다면 좋은 일이 아니냐고 하더군요.”

오랫동안 해온 인터넷 뉴스 사이트의 일에서는 잘렸다. 하지만 이씨는 담담하다.

“어쩔 수 없죠. 회사 쪽에 우익들이 몰려갈 수도 있고….”

이씨는 “재판이 열릴 때마다 다른 치마저고리를 입을 거예요. 응원하려고 방청 오시는 분들도 예쁜 치마저고리를 보면 신나겠죠”라고 말한다.

필자 또한 실명을 등록해놓은 트위터에서 “빨리 나라에 돌아가라”느니 “개고기 먹는 야만인”과 같은 악의에 찬 멘션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이렇게 직접적인 차별적 폭언을 듣게 된 건 처음이다. 지금까지 숨겨온 차별 의식을 인터넷을 통해 드러내는 것인지, 아니면 현재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서 나타난 것인지 모르겠다. 이씨 같은 개인이 나서지 않아도 되게 하루라도 빨리 차별금지법이 제정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도쿄=김향청 재일동포 3세·자유기고가

*‘베이징 여자, 도쿄 여자, 방콕 여자’ 연재를 이번회로 마칩니다. 그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수고해주신 ‘세 여자’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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