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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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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만보] 혁명은 죽고 춤은 살아남았다

춤바람 난 마오쩌둥 이후, 혁명에 참여했으나
집안일·육아·노인부양 해야 했던 슬픈 40대 ‘다마’들은 광장에서 춤을 추네
등록 2020-11-22 12:05 수정 2020-11-24 22:44
중국 베이징 왕징 소호광장에서 ‘광장춤’을 추는 중년 여성 다마들.

중국 베이징 왕징 소호광장에서 ‘광장춤’을 추는 중년 여성 다마들.

중국에 처음 왔을 때 가장 신선했던 충격은 연인들의 대범한 애정 행각이었다. 버스 정류장이나 대학 교정에서 남들이 보건 말건 껴안고 키스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거리와 공원, 광장 등 온갖 장소에서 낯 뜨거운 애정 행각이 벌어졌다. 나는 마치 중화애정공화국에 연애혁명을 견학하러 온 연애 촌뜨기처럼 한동안 두 눈을 똑바로 들지 못하고 힐끔거리며 신세계를 관람했다.

당시 중국인은 한창 뜨거운 연애를 ‘공개적으로’ 즐겼다. 1978년 개혁·개방 직후, 중국에서 가장 유행한 것은 ‘연애’였고, 중국인은 거리에서 그동안 억눌렸던 사랑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했다. 마치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1979년 말, 그 유명한 세기의 명곡 덩리쥔의 <첨밀밀>이 중국인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달콤해요, 당신의 미소는 아주 달콤해요. 마치 봄바람에 피어난 꽃 같아요~.”

개혁·개방 직후 유행한 연애

개혁·개방 전까지만 해도 중국인의 연애는 밀실이나 지하세계에서 은밀히 나누는 밀애에 가까웠다. 물론 1920년대 미국의 금주법 같은 ‘공개연애 금지법’이 중국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혁명 열정과 동지애를 뛰어넘는 남녀 간 공개연애는 공공연한 사회적 금기였다. 하지만 미국에서 금주법이 있을 때도 전설적인 마피아 ‘대부’ 알 카포네가 밀주 공장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술을 공급했듯이, 하물며 알코올보다 더 강한 사랑을 어찌 막겠는가.

공개연애가 금기시된 시대에, 중국인의 합법적인 ‘공개 밀애’ 장소는 무도장이었다. 남녀가 손을 맞잡고 스텝을 밟으며 은밀한 눈길을 교환하기에는 무도장만큼 적합한 장소도 없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또 하나 놀란 것은 ‘한 뼘 공간만 있어도’ 춤을 추는 중국인 모습이다. 공원과 광장, 아파트 단지 공터 곳곳에서 사교춤은 기본이고 플라멩코와 탱고를 추는 이도 많았다. 심지어 “세상에는 절대로 아무런 이유 없는 사랑은 없다. …진정한 인류애는 전세계에서 계급이 소멸한 뒤에라야 있다”(1942년 ‘옌안문예좌담회 강화’ 발언 중)고 했던 마오쩌둥도 춤만큼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했다. 국민당군의 토벌을 피해 ‘숨어 있던’ 옌안의 공산당 근거지 토굴에서도 주말마다 흥겨운 춤판이 벌어졌다. 마오쩌둥과 그의 세 번째 부인 허쯔전은 ‘춤바람 난’ 마오 때문에 약 10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기도 했다.

“마오쩌둥은 처음에는 춤을 배우려 하지 않았고 박자 감각도 떨어졌지만 나중에는 무도회의 단골이 되었다. 매주 토요일 밤, 중앙 지도자들은 거의 다 무도회가 열리는 장소로 모여들었고, 이는 당시 옌안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고위 지도자가 춤을 추기 시작하자 옌안문화구락부는 전문 춤교습반까지 만들었다.”(아그네스 스메들리, <옌안 무도회> 중)

‘박자 감각이 떨어졌지만’ 춤을 사랑하게 된 마오쩌둥은 미국인 기자 스메들리를 ‘춤선생’ 삼아서 밤마다 그가 기거하는 토굴로 찾아갔다. 스메들리는 쑨원의 부인 쑹칭링과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에드거 스노의 추천을 받아서, 1937년 옌안의 공산당혁명 근거지로 취재를 온 미국인 여성 기자다. 당시 그는 마오쩌둥에게 서양의 사교춤뿐만 아니라, 한 번도 외국에 가본 적이 없던 마오에게 서양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사상을 소개했다. 스메들리 옆에는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통역요원 우광웨이라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는데, 그는 마오와 허쯔전의 결별에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우광웨이 사건’이라고 하는 마오와 우광웨이의 ‘스캔들’은 다 춤 때문에 일어났다.

가장 빛나는 춤꾼, 퍼스트레이디 되다

당시 젊고 아름다운 처녀들이 ‘혁명의 꿈’을 품고 옌안으로 몰려들어, 혁명가들과 무도회장에서 만났다. 남편과 함께 대장정에 들어가 온갖 고난을 함께했던, 옌안 공산당 간부들의 아내이기도 했던, 여성 혁명가들 역시 옌안에 부는 춤바람을 곱게 보지 않았다. 허쯔전도 밤마다 스메들리와 우광웨이가 사는 토굴을 찾아가는 남편 마오에게 불만을 품다가, 어느 날 밤 직접 토굴을 급습한다. 우광웨이와 마오가 다정하게 어깨를 맞대고 연인처럼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보자, 허쯔전은 그만 눈에 불을 뿜으며 우광웨이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뒤엉켜 싸웠다. 이 사건 이후 마오와 허쯔전의 부부생활은 사실상 끝이 났다. 그해 말 허쯔전은 옌안을 떠났다. 동시에 스메들리와 우광웨이도 옌안에서 추방됐다.

공교롭게도 허쯔전이 옌안을 떠나고 불과 두세 달 뒤, 상하이에서 이름을 날리던 배우 장칭이 옌안에 도착했다. 그는 옌안 무도회장에서 마오의 시선을 끌었고, 이 둘은 허쯔전이 떠나고 약 1년 뒤인 1938년 11월 정식 결혼을 한다. 장칭은 나중에 중화인민공화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된다. 장칭은 중난하이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무도회에서 가장 ‘존재감이 빛나는’ 춤꾼이었다고 한다. ‘아무 이유 없이’ 결별하는 커플은 없다. 마오와 허쯔전 커플도 춤바람 앞에서 10년 동안 쌓아온 ‘혁명적인 동지애’가 무너져내렸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직후, 중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춤을 장려했다. 1930년대 소련의 관영매체 <프라우다> 등이 중심이 되어 “여성들은 매력적이어야 한다”며 아름답게 치장하라 하고, 스탈린이 자국민에게 적극적으로 ‘재미있게 놀고 춤추는 것’을 장려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잘 치장한 남녀가 거리나 광장에서 자유롭게 춤을 춘다는 건, 곧 사회주의의 개방성과 행복한 인민의 모습을 대내외에 선전하기에 아주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언론도 젊은 여성들을 향해 “아가씨들이여,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자신을 꽃처럼 치장하라”(<상하이 청년보> 1956년 1월10일치)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거리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진, 러시아어로 원피스를 뜻하는 ‘부라지’ 패션이 대유행했다. 거리와 광장에서는 부라지를 입은 남녀가 사교댄스를 추는 장면이 1950년대를 풍미했다. 이런 춤바람은 1960년대 중반 문화대혁명 직전까지 계속됐다.

개혁·개방 직후인 1980년 초, 중국 정부는 한때 공공장소에서 열리는 ‘춤파티’를 금지했다. 당시 중국은 약 10년 동안 문화대혁명으로 닫혀 있던 문을 열고 ‘세계를 향해’ 몸짓했다. 중국에 카세트테이프 녹음기가 막 들어왔는데, 동네방네 이 녹음기를 틀어놓고 춤추는 온갖 무리의 사람들로 넘쳐났다. “광장이 있는 곳에서는, 웅덩이든 구덩이든 간에 항상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었다.”(천리 편역, <중국생활기억> 중) 이들로 인해 여러 사회문제가 일어나자, 1980년 6월14일 중국 공안부와 문화부에서 공동으로 ‘영업성 무도회 및 공공장소에서의 자발적 무도회 금지에 관하여’라는 통지문을 발표했다.

중국 사회 비극이 추는 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던 중국인들은 삼삼오오 집에서 춤파티를 열었고, 이에 못 이기는 척 중국 정부도 얼마 못 가 전문 댄스홀 영업을 허가했다. 하지만 댄스홀 등장은 더 심한 사회문제를 낳았다. “댄스홀에서 춤을 추다가 정이 들어서 부부가 된 사람들도 있지만, 불륜으로 가정이 깨진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댄스홀에선 자주 파트너 문제로 싸우는 사건이 일어났다.”(천리 편역, <중국생활기억> 중)

중국 정부는 끝내 춤바람을 잠재우지 못했다. 1930년대 옌안의 토굴에서도 그리고 1950~60년대 사회주의혁명 건설에 매진하던 때도 인민이 공원이나 광장에서 춤을 멈출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이 유일한 대중오락이자 최소한의 인간적 유대를 경험하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중국 전역에 붐을 일으킨 ‘광장춤’도 비슷한 맥락이다.

프랑스 파리에는 프렌치 캉캉을 추는 극장 물랭루주가 있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탱고를 추는 밀롱가가 있다. 스페인에는 플라멩코를 추는 타블라오가 있고, 브라질 카니발에선 삼바가 펼쳐진다. 우리나라에도 술 한잔 마시고 흥이 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흔들어대는 ‘코리안 막춤’이 있다. 지금 중국을 대표하는 춤은 ‘광장춤’이다. 말 그대로 드넓은 광장에서 춘다. 이 춤을 추는 연령층은 주로 40대 이상 ‘다마’(大媽)다. 그래서 ‘다마춤’이라고도 한다. 다마는 우리말로 하면 ‘아줌마’인데, 중국에선 보통 40대 이상 중년 여성을 일컫는다.

우리나라 ‘아줌마’들이 사납고 이기적인 부류로 낙인찍힌 것처럼, 광장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다마는 어딜 가나 큰 소리로 떠들고 새치기는 기본인데다 전세계로 몰려다니며 중국 망신은 다 시키고 다닌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광장으로 몰려나와 집단춤을 추는 그들은 중국 사회가 낳은 체제의 또 다른 희생양이자, 오직 개인의 성공과 출세를 지향하는 현재 중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집단주의 시대의 서글픈 실패자다.

“다마들은 어릴 적에는 (각종 혁명사업으로) 학업을 소홀히 했고, 젊어서는 농촌으로 하방 당하는 등 무수한 고난을 겪었으며, 중년이 막 지났을 무렵에는 정리해고를 당해 실업자가 되었다. 또한 그들은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고 자식을 기르는 동시에 노인을 부양해야 하는 세대였다. …물욕과 성공학이 주도하고 경쟁이 엄혹한 현재 중국 사회에서 그들은 실패자다.”(장리펀, <옥스퍼드 노트> 중)

다마들에게 광장춤은 집단주의 시대의 익숙한 공간에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일상의 기쁨’을 추구하는 유일한 오락이다. 그들에게 광장은 미국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가 말한 “집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제3의 장소”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노을이 붉게 물들어가는 여름날 저녁, 피렌체의 종탑은 저녁 기도 시간을 알리고 사람들은 하루 일을 마치고 광장으로 모여든다.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최신 소식과 여러 질문과 고민 상담, 갖가지 농담이 활발하게 뒤섞인다. 이것은 피렌체 사람들의 낙이다.”(레이 올든버그 <제3의 장소> 중) 광장춤 역시 중국의 다마들이 하루를 보내는 낙이다.

부끄럼 없는 투명한 마음

“레이디스 앤드 젠틀멘 아싸 또 왔다 나… 기분 좋아서… 터질 것만 같은 행복한 기분으로… 지금 내가 있는 이 땅이 너무 좋아 이민 따위 생각한 적도 없었고요…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어 어떤 게 행복한 삶인가요” 오늘도 광장에는 한국 노래 거북이의 <빙고>가 흘러나오고 중국 다마들은 ‘부끄럼 없는 투명한 마음으로’ 신나게 춤을 추고 있다. 그 옛날의 혁명은 죽었어도 광장의 춤은 살아남았다.

베이징(중국)=글·사진 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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