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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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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그들에게 애도가 허락될까

영웅들을 애도하고 기념할 수 있는 허락된 장소 인민영웅기념비 앞에서
등록 2021-08-18 07:36 수정 2021-08-20 01:09
중국 역사에서 ‘애도의 권리’는 여러 번 반혁명 시위로 나아갔다, 중국에서 애도가 허락된 장소인 베이징의 인민영웅기념비.

중국 역사에서 ‘애도의 권리’는 여러 번 반혁명 시위로 나아갔다, 중국에서 애도가 허락된 장소인 베이징의 인민영웅기념비.

2021년 7월20일 오후. 쓰촨성 청두 시내의 한 서점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한가하게 책을 구경하고 있었다. 전세계는 아직도 코로나19로 고통받고 유럽과 미국 등에서는 기후변화 영향으로 곳곳에서 홍수와 화재가 이어지지만 중국은 평온하고 평화로웠다. 베이징에서 8시간여 기차를 타고 청두까지 오는 동안 나는 속으로 은밀하게 ‘중국 만세’를 외쳤다. ‘이 시국에’ 이렇게 자유롭고 편안하게 기차 여행을 하게 해준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의 뛰어난 방역과 재난 대처 능력에 감탄하며 감사하는 마음도 가졌다. 청두에 도착한 뒤 간간이 들여다본 중국 뉴스에서는 허난성 정저우 일대에 연일 큰 비가 내린다고 보도했다. 매년 여름 반복되는 일이라 ‘그러려니’ 했다. 감염병 바이러스도 세계 최강으로 잘 막아내는 나라에서 그깟 홍수 정도가 뭐 대수일까 싶은.

홍수에도 지하철 운행을 계속한 당국

7월21일. 새벽 5시 무렵, 일찍 잠을 깼다. 전날 저녁, 정저우에서 발생한 홍수 관련 뉴스 특보를 보다가 잠이 들어서인지, 눈을 뜨자마자 관련 뉴스부터 확인했다. 비는 여전히 어마어마하게 퍼붓고 있었고, 전날 밤 정저우 지하철 5호선이 침수돼 수많은 사상 피해가 났다는 속보가 올라와 있었다. 언론은 이구동성으로 이번에 허난성에 쏟아진 폭우는 ‘천년일우’(千年一遇·천년에 한 번 일어나는 재해) 같은 재해라고 했다.

홍수 사태는 1억 명 넘는 인구를 가진 허난성의 성도를 순식간에 ‘아작’내버렸다. 그 전날, 내가 청두 시내의 시원한 서점에서 한가하게 책을 뒤적이는 동안, 정저우의 지하철 5호선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물이 차오르는 객차 안에 갇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결국 12명은 끝내 물속에 잠겨 나오지 못했다. 폭우가 그친 뒤에도 정저우와 허난성 일대에는 빗소리 대신 곡소리가 쏟아지며 눈물이 또 다른 홍수를 이뤘다고 한다.

7월26일. 상하이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한 중국 친구가 위챗 모멘트(타임라인)에 분노가 들끓는 ‘글 폭탄’을 올렸다. 요지인즉, 정저우시 당국이 지하철 홍수 참사로 죽어간 망자들에 대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추모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폭우가 그치고 물에 잠긴 객차가 수습되자, 사고가 난 지하철역 앞에는 수많은 시민의 애도 헌화가 쌓였다. 정저우 지하철역 침수 사고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에 가까운 참사였다. 홍수가 나고 지하철이 침수되는데도 지하철 운행을 중지하지 않은 당국의 잘못된 대응으로 수많은 사람이 물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죽어갔다.

정저우 시민들은 억울하게 죽은 망자를 추모하고 싶은 마음에 사고가 난 지하철역 앞에 국화꽃과 애도문을 적은 쪽지와 편지를 걸어놨다. 하루 동안 엄청난 애도 헌화와 추모 인파가 몰려들자 당국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시민들의 자발적인 애도 공간에 접근을 어렵게 하는 가림막을 설치했다. 상하이 친구는 피가 뚝뚝 떨어질 듯한 날 선 문장을 폭탄처럼 날렸다. “우리에게는 애도할 권리와 자유도 없단 말인가!”

1976년 4월4일. 이날은 전통적으로 망자를 애도하는 청명절이다. 그해 청명절을 전후해 천안문(톈안먼) 광장 중앙에 있는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매일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해 1월8일, 7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저우언라이 총리를 애도하기 위해 추모객 수십만 명이 꽃과 추모문을 들고 천안문 광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죽음은 지난 10년간 중국을 만신창이로 만든 문화혁명 시대의 종말을 예고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문화혁명의 상흔 속에 숨죽여온 중국인들의 슬픔과 분노가 폭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애도할 자유’ 시위는 반혁명 사건으로

그해 1월11일, 저우언라이 총리의 주검이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열사 묘에 안치된 뒤 4월4일 청명절 전까지 중국 전역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를 애도하는 크고 작은 집회와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중국인들의 애도가 슬픔에서 분노로, 그리고 천안문 광장의 대규모 항의 시위로까지 발전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애도할 자유와 권리마저’ 허락하지 않은 당국의 ‘애도 행위 금지령’이었다.

전국에 번지는 추모 분위기와 애도 인파에 놀란 정부 당국은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놓인 화환과 추모시 등을 강제 철거하며 모든 애도 행위를 금지했다. 청명절 당일에도 수십만 명이 화환을 들고 인민영웅기념비 앞으로 쏟아져 나왔지만, 당국은 그날 밤 모든 화환과 추모문 등을 철거했다. 그러자 다음날인 4월5일, 격분한 시민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애도 행위 금지령’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결국 시위는 공권력에 의해 강제 해산됐지만, 이 사건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수백 명이 체포됐다. 이틀 뒤인 4월7일 긴급 소집된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4·5 천안문 사건’은 국가체제를 전복하려 한, 불순세력이 자행한 ‘반혁명 사건’으로 선언됐다. 덩샤오핑은 그날 사태의 모든 ‘정치적 책임’을 뒤집어쓰고 실각됐다.

1989년 4월15일 후야오방 전 총서기가 갑작스럽게 죽었다. 문화혁명 종식 뒤 정치의 중심 무대로 복귀한 덩샤오핑이 임명한 총서기였다.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에 의해) 총리로 발탁된 자오쯔양과 함께 중국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더 민주적이고 자유로우며 개방적으로 이끌려 했다. 후야오방은 새 시대를 갈망하는 대다수 중국 지식인과 개혁가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1986년 말 안후이성 허페이 중국과학기술대학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정치개혁과 민주화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점차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자, 위기감을 느낀 덩샤오핑은 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물어 후야오방을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1976년 자신이 밟았던 전철을 후야오방에게도 고스란히 적용한 셈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피해자 한 번은 가해자

그 뒤 후야오방이 중앙정치국 회의에 참석하던 중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자 그를 지지하고 존경하던 지식인과 학생은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 그들은 천안문 광장 내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가서 그를 추모하는 화환과 애도문을 올렸다. 애도 인파는 갈수록 늘어났고, 인민영웅기념비 앞에는 화환을 바치려는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애도는 어느새 정치개혁과 언론 자유 보장, 부패 관료 처벌 등을 요구하는 ‘민주화’ 시위로 발전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정부는 4월22일 후야오방 장례식 당일, 일반 시민들의 천안문 광장 접근을 차단하고 애도 인파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봇물 터진 애도 물결은 덩샤오핑이 가장 우려했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후야오방 장례식 이후 학생들은 동맹휴업을 선언하며 본격적인 민주화 시위를 이어갔다. ‘6·4 천안문 사건’의 시작이었다.

6·4 천안문 사건은 중국의 1980년대를 절망과 비통함으로 끝맺었다. 후야오방의 뒤를 이어 총서기직을 맡은 자오쯔양 역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실각돼 죽을 때까지 가택연금됐다. 그해 6월4일 천안문 광장 학살 작전을 성공리에 마친 덩샤오핑은 며칠 뒤 방송에 나와 시위대를 ‘반혁명 폭도들’이라고 했다. 1980년 광주 학살 작전을 수행했던 당시 신군부 최고 권력자 전두환 역시 그와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들 역시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애도가 허락되지 않던 ‘폭도들의 죽음’일 뿐이었다.

2021년 8월8일. 자전거를 타고 천안문 광장 앞까지 갔다. 허난성 홍수 사태 이후, 중국의 주요 도시에서는 거의 사라진 듯했던 코로나바이러스가 다시 유행하고 있다. 베이징은 다시 빗장을 걸고 주요 감염 도시로 통하는 기차와 비행기 등 모든 교통수단을 막았다. 평온하던 세계는 기적 소리처럼 멀리 사라졌다. 한동안 타 지역 관광객으로로 북적이던 천안문 광장도 삼엄한 경계와 함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자전거를 세우고 잠시 천안문 광장 근처에 머물렀다. 무장경찰과 경찰차가 빼곡하게 들어선 광장 중앙에는 사람은 없고 인민영웅기념비만 혼자 우뚝하니 서 있다.

1952년 착공돼 1958년 4월22일 완공된 인민영웅기념비는 사회주의 신중국 건국 뒤 첫 번째로 지정된 국가급 중요문화보호물이다. 중국 근현대사의 혁명열사와 애국지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다. 인민영웅기념비는 중국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정치적 애도’ 장소다. 결혼과 출산, 이혼 등 사적인 인생 문제도 먼저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금기의 시대’를 살아온 중국인에게 애도 역시 허락받아야만 할 수 있는 행위였다. 인민영웅기념비는 누구나 마음대로, 자유롭게 ‘나라를 위해 희생된’ 영웅들을 애도하고 기념할 수 있는 허락된 장소였다. 저우언라이 총리와 후야오방 총서기가 사망했을 때 수많은 중국인이 이곳에 와서 화환을 바치고 애도한 이유도 바로 인민영웅기념비만이 유일하게 허용된 공적인 애도 장소였기 때문이다.

마음껏 애도하고 슬퍼할 자유를

1989년 6·4 천안문 사건으로 희생당한 수많은 학생과 시민은 아직도 ‘폭도 세력’으로 남아 있다. 애도가 허락되지 않은 ‘반역’ 망자들의 영혼도 여전히 인민영웅기념비 주변을 맴돌고 있다. 언제 그들에게 애도의 꽃다발과 추모시가 허락될 수 있을까.

나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첸먼 거리로 내달렸다. 통행이 금지된 천안문 광장과 그 안에 고독하게 서 있는 인민영웅기념비가 등 뒤로 아스라이 멀어졌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생각했다. 오늘은 ‘혼자 남은’ 인민영웅기념비를 애도해야겠다고. 그리고 마음껏 애도하고 슬퍼할 자유를 달라고. ‘그날이 오면’ 나는 다시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와서 ‘중국 만세’를 당당하게 외치겠노라고.

베이징(중국)=글·사진 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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