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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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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뚤어지도록 열정적인 그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선명한 이슬람’ 경쟁의 산물인 이슬람원리주의,
종교를 정치에 이용하는 위정자로 인해 혼돈과 유혈의 중동·중앙아시아
등록 2021-09-04 12:34 수정 2021-09-07 12:26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시한이 임박한 2021년 8월30일, 카불 국제공항을 겨냥한 여러 발의 로켓 포탄 발사에 쓰인 자동차 주변 현장을 탈레반 전투원들이 통제하고 있다. 이 테러의 배후는 확인되지 않았다. 미군이 드론 공격으로 이 차량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일가족 9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AFP 연합뉴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시한이 임박한 2021년 8월30일, 카불 국제공항을 겨냥한 여러 발의 로켓 포탄 발사에 쓰인 자동차 주변 현장을 탈레반 전투원들이 통제하고 있다. 이 테러의 배후는 확인되지 않았다. 미군이 드론 공격으로 이 차량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일가족 9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AFP 연합뉴스

2001년 9월11일 아침(현지시각), 미국 뉴욕의 하늘은 쾌청했다. 거리는 출근길 시민과 자동차 행렬로 활기찼다. 오전 8시46분 대형 비행기 한 대가 쌍둥이 빌딩인 세계무역센터의 한 빌딩에 충돌하며 폭발했다. 오전 9시3분에는 두 번째 여객기가 다른 빌딩으로 돌진해 거대한 화염을 일으켰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세 번째 비행기가 미 국방부(펜타곤) 앞에 추락해 건물 일부를 파괴했고, 네 번째 비행기는 펜실베이니아주의 벌판에 추락했다.
미국 군사력의 심장부가 공격당하고 미국 자본주의의 힘을 상징하는 거대한 쌍둥이 빌딩이 힘없이 무너져내린 현실 앞에서 미국은 망연자실했다.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 알카에다가 미국 민항기를 납치해 벌인, 야만적인 동시다발 테러였다. 미국 전체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미국은 곧바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알카에다의 은신처이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그로부터 꼭 20년 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프간에서 모든 미군과 미국인의 철수를 완료하고 종전을 선언했다. 미국과 동맹국 군인, 아프간 군경과 민간인 등 최소 23만 명이 숨지고 2680조원이라는 천문학적 비용을 치른 뒤였다. 미군이 떠난 땅은 다시 ‘탈레반 천하’가 됐다.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으로 기록된 아프간 전쟁은 사실상 아무런 성과 없이 ‘교훈’만 남기고 끝났다.
표지이야기에서는 9·11 테러와 미국의 전쟁 20년을 돌아본다. △아프간 전쟁의 배경과 전망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명멸과 중동 지정학의 변화 △아프간 철수 이후 미국이 당면한 딜레마 등을 두루 짚었다. _편집자주

새천년은 2001년 9월11일 ‘악의 제국 아므리카(아메리카의 아랍식 발음)’를 향한 아랍 수니 무자헤딘의 자폭 테러로 시작했다. 이슬람 역사를 돌이켜보면, 9·11 테러처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적에게 조직적인 테러를 가한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를 알카에다와 비견할 만하다.

공중 앞에서 살해하고 자결하다

대마 하시시를 복용하고 환각 상태를 즐겼다고 하여 프랑스어와 영어의 ‘암살자’(Assassin·어새신)라는 단어의 어원으로 잘못 알려진 ‘하시시’는 이란 북서부 알라무트의 난공불락 성채에 공동체를 이루며 당시 최강 셀주크튀르크의 주요 인물을 비롯해 모두 50명 정도를 암살하는 ‘비대칭 전력’ 청년 전사를 양성했다. 이들은 살해 대상을 여러 사람의 눈앞에서 죽이고, 도망가지도 않은 채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다. “반란의 고름을 짜고 나태의 병균을 없애겠다”고 공언한 재상 니잠 알물크(1018~1092)도 가슴에 칼이 찔려 목숨을 잃었고, 암살자도 그 자리에서 죽었다. 암살 성공 소식을 들은 암살단의 지도자 하사네 사바는 “악마를 없애니 축복이 내려오기 시작한다”고 기뻐했다.

1천 년이 지난 오늘날 갑자기 암살자 교단을 끄집어낸 이유는, 9·11 이후 무슬림 세계뿐 아니라 전세계를 경악하게 하는 극단주의적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이 알라무트 요새의 니자리 이스마일리 시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둘 다 자신들이 신봉하는 이슬람 원리를 지키는 데 삐뚤어지도록 열정적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다른 점은, ‘암살자’들이 무슬림 세계 지도자들의 목숨을 주로 노린 반면, 알카에다·이슬람국가(IS)·탈레반 등 현대 극단주의자들은 평범한 무슬림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앞서 중동 전역에서 악명을 떨치던 암살단은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제패한 몽골 제국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괴멸됐다.

1967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에서 좌절한 무슬림들은 1973년 친이스라엘 정책을 펴는 국가를 대상으로 석유 금수를 조처해 전세계 경제에 충격파를 주면서 자존감을 살렸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는 이슬람이 현대적 삶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래된 새로운’ 길 이슬람을 따라 삶을 정비하고 국가 운영을 꿈꾸는 원리주의자들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근대국가 성립과 함께 세속주의에 눌려 있던 이슬람주의가 중동 무슬림 세계에서 똬리를 틀면서, 이른바 이슬람을 총체적 삶의 방식으로 여겨 종교와 정치가 하나가 된 사회를 향한 발걸음의 속도가 빨라졌다.

이란의 지원을 받아 창설된 레바논의 헤즈볼라(이슬람 운동 정당)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유약함에 반발해 나온 하마스(팔레스타인 무장정파) 모두 이슬람에 근간한 정치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이슬람주의의 산물이다. 혹자는 이란의 이슬람혁명을 시아파(이슬람 분파)에 한정된 것으로 보려 하지만, 근대 이슬람주의의 원조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영국 지배하 인도의 마우두디(파키스탄의 이슬람주의 사상가)는 이란혁명이 종파를 초월한 이슬람혁명이라고 극찬했다.

2021년 8월26일, 미군의 대규모 철수 작전이 한창이던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국제공항 인근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집단 이슬람국가(IS)가 민간인 밀집 지역에 폭탄테러를 일으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신화 연합뉴스

2021년 8월26일, 미군의 대규모 철수 작전이 한창이던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국제공항 인근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집단 이슬람국가(IS)가 민간인 밀집 지역에 폭탄테러를 일으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신화 연합뉴스

유약함에 반발해 만들어진 무장단체들

그런데 이란의 정변을 보면서 이웃 아랍 산유 왕정국들은 국가 존립에 위기를 느꼈다. 그동안 애써 무시해온 자국 내 시아 무슬림이 이란혁명에 자극받아 반왕정 시위를 벌일 것을 우려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이 집안 이름 ‘사우드’를 따서 국명을 지었다고 조롱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왕가가 이름만 무슬림일 뿐 제대로 된 이슬람 신앙을 지니지 않았다고 비난하자 격분했다. 이란혁명 뒤 사우디아라비아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란과 누가 더 선명하게 이슬람을 제대로 신앙하는지를 두고 경쟁했고, 그 결과 더 보수적인 종교문화로 회귀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페트로 달러’(석유를 팔아 얻은 부)를 앞세워 무슬림 세계에 ‘와하비 사상’(이슬람원리주의의 일종)을 전파할 선교사를 파견하고, 모스크를 지어주고, 세계 각국으로부터 무슬림을 받아 자국에서 투철한 와하비 사상으로 무장시켰다. 알카에다, IS, 탈레반은 모두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벌인 ‘선명한 이슬람’ 경쟁의 부산물이다.

이란에 자극받아 경쟁에 뛰어든 사우디아라비아를 가리켜, 2017년 사우디의 살만 국왕은 이렇게 말했다.

“호메이니 혁명 이후 현재까지 이란 정권은 전세계 테러를 이끌어왔다. 1979년 (시아파 종교지도자) 호메이니 혁명이 시작되기 전 300년간 우리나라는 테러나 극단주의를 모르고 살아왔다. 이란은 선량한 이웃들을 모두 거부했다.”

그리고 살만 국왕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는 중동을 테러의 산실로 만든 주범으로 이란을 지목했다. “지난 30여 년간 일어난 일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모습이 아니다. 지난 30여 년간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일은 중동의 모습이 아니다. 1979년 이란혁명 이후 여러 나라에서 (이란의) 모델을 베끼려고 했는데, 사우디아라비아도 그중 하나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문제가 전세계로 퍼졌다. 이제 이를 없앨 때다.”

인도와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까지 영향 미쳐

9·11 테러의 주범 19명 중 15명이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이라는 사실은 와하비 사상이 가르치는 보수적 이슬람 사상의 폐해를 그대로 보여준다.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첨단 전투기를 제공하는 것을 이스라엘이 반대한 것도 바로 와하비 사상으로 무장한 조종사가 이스라엘로 기수를 돌려 공격할지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와하비 사상 추종자들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무덤을 방문하는 것도 유일신 신앙에서 벗어난 이단 행위로 보아 아예 묘소를 파괴하려고 했다. 이처럼 엄격한 유일신론을 견지하는 와하비 사상은 발생 당시에는 이슬람의 내부적 개혁 사상이었다. 그러나 서구가 중동 지역을 식민지배하면서는 서구적·현대적 삶의 방식에 저항하는 무슬림에게 원리주의 교과서로 굳건하게 자리잡았다. 그리고 서구적 삶의 방식을 극단적으로 공격한 행위가 바로 알카에다의 9·11이다. 

와하비의 보수주의는 반시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와하비는 사우디아라비아 내 시아파 이맘(지도자)과 가족 묘소를 모두 파괴했고, 1801년 4월 이라크 카르발라를 습격해 3천 명에 이르는 시아파 주민을 학살했다. 탈레반이나 IS가 시아파 주민을 극렬하게 공격하고 박해하는 것도 바로 이런 와하비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관련 기사= 아프간을 정복 못했다.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이란혁명 뒤 사우디아라비아의 반격은 중동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태생 자체부터 와하비의 영향을 받은 인도의 데오반디(이슬람 근본주의의 한 조류)는 파키스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으로 더욱 강력한 극보수주의로 기울었다. 파키스탄의 데오반디는 다시 아프가니스탄 데오반디에 영향을 주며 탈레반의 극단주의 이슬람에 기여했다. 우즈베키스탄 이슬람운동(UIM) 등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이슬람주의운동 역시 와하비 선교사들의 영향권에서 태동했다.

수니파 세계에 널리 퍼진 와하비 이슬람 해석에 맞서기에 시아파라는 이란의 한계는 뚜렷했다. 이란의 혁명 수출은 시아파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9·11 이후 붕괴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는 이란의 종파적 영향력이 가장 크게 자리잡을 수 있는 기회의 땅이 됐다. 특히 이란에서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시아 초승달’ 지역에 아랍의 봄 이후 예멘이 들어오면서 이루어진 ‘시아 보름달’은 여전히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 벨트에 맞서고 있다. 미국의 경제제재를 뚫고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려는 이란의 움직임에 맞서,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이란의 앞길을 막으려 중앙아시아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와하비 이슬람 해석이 퍼질 것을 우려해 중앙아시아 무슬림 문화권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종교적 접근은 거부하고 있다. 중앙아시아뿐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모로코도 와하비 선교사를 모두 출국시키고 모로코식 온건 이슬람 구축을 선언했다. 사우디아라비아뿐 아니라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 역시 종교적 색채 때문에 주변국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이란은 특히 타지키스탄의 반정부 시아파를 지원해, 수니 무슬림이 다수인 국가 가운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타지키스탄과 외교관계가 급속히 냉각됐고, 여전히 그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깨어 있는 무슬림이 몽골군 되길

이처럼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선명 이슬람’ 경쟁은 무슬림 세계뿐 아니라 전세계에 선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소모적인 경쟁에서 발을 빼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보수적인 와하비 색채를 지우고 온건 이슬람국가 사우디아라비아를 표방한 것은, 결국 1979년 이후 이란과 벌여온 이슬람원리주의 경쟁이 궁극적으로 국가 발전에 치명상을 입혔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중동에는 여전히 종교를 정치에 이용하는 위정자가 적지 않다. 이란은 혁명정신 전파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무슬림형제단을 지원하고 지지하는 에르도안의 터키는 지금도 오스만 시대의 향수에 취해 있다. 이슬람주의를 앞세워 이웃국가를 자극하는 터키의 행보는 역내 불안 요소로 남아 있다.

9·11 테러에서 만개한 이슬람원리주의적 사유 방식과 테러에 아직도 무슬림 세계는 고통받고 있다. 혁명은 민생을 돌보는 데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이슬람 해석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정치적 이슬람 해석이 올린 장벽이 너무나 높다. 지금 무슬림 세계에는 1천 년 전 테러를 일삼던 암살자 교단을 완전히 파괴한 몽골군이 필요하다. 그 몽골군은 바로 깨어 있는 무슬림이어야 한다. 미국 9·11 테러 20주년에 그런 무슬림이 나오길 기대한다.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Euro-MENA)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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