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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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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자본의 우리 속 ‘단식 광대’

1980년대 후반 세계적 명성을 얻은 왕광이 등이 만든 문화예술거리 ‘798 예술구’
등록 2021-09-04 14:26 수정 2021-09-08 01:49
중국 베이징 798 예술구에는 소셜네트워크용 사진을 찍는 방문객들로 가득하다.

중국 베이징 798 예술구에는 소셜네트워크용 사진을 찍는 방문객들로 가득하다.

앤디 워홀이 베이징에 왔다. 집에서 자전거로 10분 거리에 있는, 베이징의 유명 관광지이자 문화예술거리인 798 예술구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렸다. 예술의 ‘예’자도 모르는 주제에, 모처럼 고급문화를 감상할 기회라고 생각해서 자전거를 타고 득달같이 798 예술구로 달려갔다. 내가 아무리 무식한 예술 까막눈이라 할지라도 앤디 워홀 정도는 안다. 나보다 더 예술을 모르는 사춘기 딸아이도 앤디 워홀은 ‘잘 안다’고 했다. 딸은 앤디 워홀을 ‘깡통 화가’로 알고 있다. ‘팝아트’라고 불리는 대중미술의 선구적인 개척자다.

한 번도 전시되지 못한 마오쩌둥 초상화

내가 앤디 워홀 전시회를 보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1972년에 그린 마오쩌둥 초상화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베이징에서 앤디 워홀 전시회가 열렸을 때도 이 작품은 전시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마오의 초상화는 전시되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중국에서 마오의 초상화는 천안문(톈안먼)을 벗어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듯하다. 만일 앤디 워홀이 살아 있어서, 지금은 예술보다는 맛집과 카페 등으로 더 유명한 거리가 된 798 예술구에서 자본주의 상품과 소비문화를 풍자한 자신의 ‘깡통 그림’ 등이 전시된다는 걸 알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리고 21세기 중국에서 여전히 자기 그림이 검열당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1989년 2월 초, 당시 무명의 화가 왕광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그림을 팔아서 1만위안(지금 한화 가치로 약 1400만~1800만원)이라는 거금을 벌었다. 그는 친구 리셴팅(중국의 유명 화가이자 미술평론가)에게 달려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같이 저녁을 먹자. 식당은 어디든 좋으니 (돈은 신경 쓰지 말고) 네가 고르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는 그의 가난한 동료 화가 친구 10여 명이 모여 만찬을 벌였다. 동료들 역시 처음 큰돈을 봤고, 그림이 거액에 팔릴 수 있다는 사실에도 ‘깜놀’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왕광이를 비롯해 몇몇 ‘벼락출세한’ 중국 화가들의 그림은 전세계 미술 경매시장에서 연일 신기록을 경신하며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팔렸다.

카프카의 단편소설 ‘단식 광대’에 나오는 주인공은 우리 안에 갇혀서 자신을 최고의 단식 기술을 가진 예술가로 생각하며 어떤 잔꾀도 부리지 않고 매일 성실하게 ‘굶어 죽어간’다. 관객은 점점 그의 쇼에 흥미를 잃고 그의 ‘단식 예술’을 외면하며 새로운 신기한 쇼를 선보이는 동물에 환호한다. 아무도 보러 오지 않지만 그는 혼자 열심히 단식쇼를 하다 죽는다. 그는 죽기 직전에 사람들에게 “왜 죽을 때까지 굶고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입맛에 맞는 맛있는 음식을 찾지 못해서”였다고 말했다.

중국 예술가들은 ‘단식 광대’와 달리 스스로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아내, 세계 미술시장의 총아가 되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국가의 검열제도라는 족쇄에 더해 시장의 경쟁 시스템이라는 또 다른 족쇄도 채워졌다. 이중의 ‘우리’에 갇혔지만 그들은 늘 관객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다.

2021년 베이징 789 예술구에서 열린 앤디 워홀 전시회.

2021년 베이징 789 예술구에서 열린 앤디 워홀 전시회.

“예술가들은 인민 영혼의 엔지니어가 돼야 한다”

왕광이는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된 1980년대 이후 중국 현대미술사의 앤디 워홀 같은 상징적 인물이다. 중국 예술가들은 1980~90년대에 상대적으로 느슨해진 이데올로기의 자유화 틈을 노려 사회주의 리얼리즘 전통에 저항했다. 1949년 사회주의 신중국 건국 이후, 중국 예술가들은 옛소련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이 ‘예술은 정치의 하부로서 당과 체제를 위한 선전·선동 도구이며, 예술가들은 인민 영혼의 엔지니어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 사회주의혁명 리얼리즘의 전통을 따라야 했다. 미술전시회도 정부의 검열과 지침 아래 운영·조직되는 ‘중국미술전’만 열렸고, 화가들이 주체가 되어 열리는 ‘검열 없는’ 민간 주도의 전시회는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왕광이 등 젊은 예술가들은 그동안 정부의 검열과 지침에 억압됐던 예술을 해방시키려 ‘85 신사조 미술’ 운동을 일으켰다. 정부의 과도한 간섭과 검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각지의 예술가들이 1985년 황산에 모여 예술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쟁취하는 문제에 대해 열띤 토론회를 벌이며 중국 미술계에 혁명과도 같은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이듬해부터 각지에서 게릴라전처럼 독자적인 전시회를 열며 기존 정부 주도의 ‘검열 예술’에 파열음을 냈고, 1989년 2월에는 드디어 베이징에 있는 (국가 주도 검열 미술 체제를 상징하던) 중국미술관에서 최초로 화가들이 주축이 된 공식 민간 전시회를 열었다. 이것이 중국 현대미술사에서 한 획을 그은 ‘중국 현대미술전’이다.

‘중국 현대미술전’은 전시회 도중 전위예술의 한 형태로 이뤄진 총격 사건 등으로 당국에 의해 도중에 강제 폐관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러나 이후 왕광이와 장샤오강, 웨민쥔, 팡리쥔 등 세계적인 스타 예술가들을 배출하며 중국 정치 팝아트 시대를 여는 도화선이 됐다. 또한 중국 예술가들이 199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는 정부의 검열 체제와 더불어 시장의 자율성이라는 이중 체제의 ‘우리’ 안에서 공존해야 하는 중국 특색의 예술 신시대가 시작됐음을 뜻했다.

왕광이는 앤디 워홀의 영향을 받아 중국에서 ‘정치 팝아트’라는 새로운 미술 영역을 개척했고, 1989년 거금을 받고 팔았던 그림 역시 앤디 워홀이 그린 팝아트 형식의 마오 초상화였다. 그가 그린 마오 초상화는 중국 현대미술전에서도 최대의 화제작이었다. 1만위안에 팔린 것도 이 초상화였다. 이때는 손을 벌벌 떨었지만 불과 2~3년도 안 돼 그는 ‘대비판 시리즈’라는 정치 팝아트 연작으로 세계 미술시장에서 ‘중국의 앤디 워홀’이라고 불리며 천문학적인 경매가를 기록하는 ‘대예술가’로 탄생했다. 그때도 손을 덜덜 떨었다면 그 돈다발을 다 셀 수 없었을 것이다.

학생식당을 이용하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기에

미국의 유명 문학비평가인 조지 스타이너는 그의 비평집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의 포문을 “문학작품은 사랑을 빚진 데서 시작돼야 한다”는 문장으로 열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중국 예술가들에게 진정한 예술은 ‘(정부의 통제와 검열로 인해) 예술정신을 빚진 데서 시작돼야 한다’. 옛소련과 과거의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 그리고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 통치 체제는 언론과 예술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검열제도를 바탕으로 체제를 유지했다.

1980년대 이후 중국의 젊은 예술가들은 통치권력과 협력하고 공모하면서 ‘국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예술정신을 빚지고 살던 기존의 생존법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립적인 울타리를 만들었다. 왕광이 같은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든 곳은 베이징 원명원 구석에 있던 폐촌이었다. 원명원은 베이징대학, 칭화대학과 가까워서 값싼 학생식당 등을 이용하기 편했고 분위기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가난한 예술가가 많이 몰려들면서 자연스럽게 화가촌을 이루게 됐다.

원명원 화가촌은 지금 베이징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예술거리인 798 예술구의 뿌리다. 1990년대 이후 이곳은 중국 전역에서 모여든 화가와 예술가들의 집단 촌락으로 발전하며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나 미국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잠시나마 중국 예술가들의 유토피아가 됐던 원명원 화가촌은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대회를 전후해 ‘도시 미관을 해치고 불량문화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당국이 강제 철거했다.

새로운 중국판 ‘벨벳 감옥’

중국 공산당 통치 체제가 예술가들에게 결코 공짜로 자유를 선물하지 않고 조건 없는 호의를 베풀지 않는 걸 체득한 중국 예술가들은 어디에도 원명원 화가촌 같은 자신들만의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원명원 화가촌 강제 철거 이후 수많은 예술가가 국외로 떠나거나, 일부는 체제 내로 들어갔고 또 일부는 베이징 외곽 쑹좡의 새로운 예술촌으로 들어갔다. 2000년 초반부터 일부 화가가 가동이 중단된 옛 공장터인 798에 터를 잡으며 제2의 원명원 화가촌 같은 예술부락을 만들고자 했다. 옛 공장터가 유명 갤러리로 변신한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처럼 한때는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중국 예술가들의 새 집결지로 탄생하는 듯했지만 얼마 못 가서 시장과 자본 논리에 침식당하며 ‘예술 젠트리피케이션’의 각축장으로 변해갔다.

카프카의 소설에서 ‘단식 광대’가 굶어 죽은 뒤, 그가 살던 우리 안에 관객이 환호하는 표범 한 마리가 들어와 산다. 표범은 매일 음식을 마음껏 먹고 관객의 관심을 독차지하며, 한때 자신이 가졌던 자유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798 예술구에는 지금, 과거에 원명원 화가촌에서 살았던 왕광이나 장샤오강, 팡리쥔, 웨민쥔 등처럼 ‘입맛에 맞는’ 자신만의 예술을 탐구하는 가난한 무명 화가들 대신 자본과 시장경쟁력을 앞세운 새로운 ‘표범’이 들어와 있다. 그리고 매일 곳곳의 맛집과 카페, 분위기 좋은 갤러리 등에서 소셜네트워크 전시용 인증사진을 찍어대는 구경꾼이 득실댄다. 798 예술구 안 포효하는 중국 예술계의 새로운 ‘표범’들도 더 이상 국가의 검열 체제에 저항하지 않고 새로운 협력과 번영의 길을 공모하며 자진해서 우리 안으로 들어가 사는, ‘벨벳 감옥’ 안의 부유한 수형수가 됐다.

헝가리 예술가 미클로시 허러스티는 그의 책 <벨벳 감옥>(The Velvet Prison)에서 과거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던 수많은 예술가를, 검열과 통제에 저항하기보다는 자진해서 국가와 협력하고 공모해서 검열 시스템의 수혜자가 되기를 희망한 ‘어용 예술가’들로 분석했다. 그들은 검열 시스템이 느슨해진 뒤에도 스스로 ‘벨벳 감옥’에 갇히기를 희망했다. 표범이 한때 자신이 누렸던 자유를 망각한 것처럼 그들도 ‘벨벳 감옥’에 들어가 한때 품었던 예술정신을 잊어버린 것이다.

지금 베이징 798 예술구도 새로운 중국판 ‘벨벳 감옥’이 됐다. 앤디 워홀이 다시 살아서 이 거리에 온다면, 그는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새로운 종류의 시스템에 맞춰서 더 위대한 팝아트 시장을 개척할지 모른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중국 정부의 검열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검열 훈련에 단련된 중국 예술가들은 채찍질하지 않아도 알아서 공중제비를 돌겠지만, 훈련이 안 된 앤디 워홀은 ‘단식 광대’처럼 굶어 죽을 수도 있다.

베이징(중국)=글·사진 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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