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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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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여, ‘사회주의 밝은 결말’은 무엇이오

베이징 서민들의 유머와 해학의 추억이 깃든 톈차오
등록 2021-10-06 11:18 수정 2021-10-07 00:22
다큐멘터리영화 <먼바다까지 헤엄쳐 가기> 속 위화. 부산영화제 제공

다큐멘터리영화 <먼바다까지 헤엄쳐 가기> 속 위화. 부산영화제 제공

연일 비도 오고 사는 게 별로 즐겁지 않아서 영화를 보러 갔다. ‘코시국’에 사는 게 즐거운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래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즐거운 척’ 살기 위해 장대 같은 빗속을 뚫고 영화를 보러 갔다. 극장에 걸린 영화도 딱히 재미있는 게 없어서 ‘답정너’처럼 볼 수밖에 없었던 영화가 뜻밖에도 횡재였다. 중국 6세대 감독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유명 영화감독 자장커가 만든 다큐멘터리영화 <먼바다까지 헤엄쳐 가기>(一直游到海水变蓝). 영화는 위화, 량훙, 자핑아오 등 당대 중국의 최고 작가들이 자신의 고향과 가족, 문학 등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중국의 한 시대를 회고하는 내용이다. 제목과 대충의 영화 소개를 보고는 ‘잠만 자다’ 나오겠거니 했는데, 웬걸. 웃다가 울다가, 또 눈물 나도록 웃다가 마지막에는 묘한 위안을 느끼며 극장을 나왔다.

즐겁게 살 수만 있다면 소설 결론 따윈

스크린 속 위화는 시종일관 개구진 눈매를 하고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 <인생>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는 “이 소설에서 나는 사람이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과 세상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에 대해 썼다”고 밝혔는데, 영화 속에서 들려준 그의 ‘인생’ 역시 그러했다. 대학 입시에 두 번 낙방하고, 의사인 부모의 권유에 따라 작은 시골 마을 보건소 치과 보조 의사가 된 그는 ‘세상에서 가장 볼만한 풍경이 없는’ 사람 입속을 매일 들여다보는 일이 너무 싫고 짜증나던 차에, 어느 날 우연히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고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게 주요한 일인 직장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현 정부 산하 ‘문화관’이라는 직장이었다. 그곳에 취직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소설가로 등단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곧바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크고 작은 모든 잡지사에 ‘투고질’을 했다. 몇 년간의 ‘낙방’ 끝에 드디어 잡지사 <베이징문학>에서 결말 부분 수정을 전제로 등단 확정 연락을 받았다. 담당 편집자는 그에게 “사회주의는 원래 밝은 법인데 당신 소설은 자본주의처럼 결론이 어둡다”며 ‘밝게’ 고치라고 주문했다. 위화는 두말 않고 하루 만에 소설의 결론을 ‘사회주의처럼 밝게’ 고쳤다. 다른 작가들은 보통 한두 달 걸리는 수정 작업을 단 하루 만에 끝내는 걸 보고 편집자가 아주 놀라더라는 것. 스크린 속 위화는 이 대목에서 개구지고 능청맞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사회주의처럼 밝게 고치라며? 그게 뭐 힘든 일이라고.”

위화의 소설 <인생>에서 주인공 푸구이의 아버지가 망나니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은 즐겁게 살 수만 있으면 가난 따위는 두렵지 않은 법이란다.” 위화는 문화관에서 일하며, 매일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즐겁게 살 수만 있다면’ 소설의 결말을 ‘사회주의처럼 밝게’ 고치는 것 따윈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왜 어둡고, 사회주의는 왜 반드시 밝아야 하는지는 몰라도, 결론은 ‘즐겁게 살 수만 있다면’. 이것은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이 아닌 ‘위화 특색’의 블랙 유머라고 느꼈다. 위화는 그 후 마침내, 매일 남의 이를 뽑던 ‘아주 힘든 가난뱅이 치과의사’에서 매일 거리를 돌아다니며 놀 수 있는 ‘행복하고 자유로운 가난뱅이’가 되었다.

1949년 신중국 건국 전까지, 위화보다 더 ‘힘든 가난뱅이’ 인력거꾼이었던 샹즈 같은 하층 서민들이 즐겁게 어슬렁거리며 놀 수 있었던 베이징의 ‘문화관’은 톈차오(天桥)였다. 라오서가 쓴, 1920년대 말 베이징(당시는 베이핑)의 가난한 밑바닥 계급의 대명사인 인력거꾼의 이야기 <낙타상자>에는 톈차오가 많이 등장한다. 톈차오는 가난뱅이 인력거꾼 샹즈에게 ‘세상에서 가장 볼만한 풍경이 있는’ 재미있는 곳이었다.

토박이 베이징인의 추억이 어린 곳

“각양각색의 노점과 기예를 파는 이들이 모두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다. (…) 그는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웃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 평소 이곳은 만담가, 동물을 이용해 잡기를 하는 사람, 타령하는 사람, 무술하는 사람 등등이 모여 그에게 호탕한 웃음을 선사했었다. 그가 베이핑을 사랑하는 이유 중 절반은 톈차오 때문이었다. 매번 톈차오의 차양막, 겹겹이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는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일들이 생각났다. (…) 아니, 이처럼 요란하고 재미난 곳을 어떻게 떠난단 말인가!”

톈차오는 1957년 전까지 토박이 베이징인들에게 가장 추억이 많은 장소다. 베이징 천안문 광장과 자금성에서 멀지 않은 융딩먼과 정양먼 사이에 있는 톈차오는 원래 ‘천자(황제)가 지나가는 다리’였다. 명나라 영락제 재위기간(1420년)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인 톈탄(천단)과 첸먼(전문) 사이에 다리를 만든 후 유래한 이름이다. 그 다리는 황제만이 드나들 수 있었고, 평상시 일반인의 접근은 금지됐다. 하지만 청조 시대 이후 내성에 살던 한족들이 첸먼 밖 외성으로 쫓겨났고 그들이 주로 톈차오 부근에 둥지를 틀고 살면서 자연스럽게 그 일대에 온갖 시장이 들어섰다. 또 지리적 위치상 톈차오는 남쪽 사람들이 황제를 알현하러 가거나 첸먼이나 자금성으로 들어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숙박업과 찻집 등이 들어서며 이 일대는 베이징에서 가장 번화한 장소가 됐고 유동인구가 많아지자 각종 잡기와 기예, 무술 공연 등을 하며 먹고사는 온갖 기인과 유랑극단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치 옛날 우리나라에도 크고 작은 시골 장터마다 온갖 신기한 공연을 하는 ‘약장수’들과 서커스단이 몰려들었던 것처럼, 톈차오 일대는 상설 노천극장이 됐다.

청나라 이후 서민들의 종합 놀이터 문화관 구실을 했던 톈차오의 황금시대는 라오서의 소설 <낙타상자> 속 주인공 샹즈가 인력거를 몰던 1920년대와 1930년대다. 지금도 중국인들이 즐겨 보는 ‘춘제 완후이’(설날 방송하는 텔레비전 특집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너인 ‘샹성’(만담극)이 발전한 것도 당시 톈차오 노천극장과 찻집 등에서 공연하던 샹성 배우들의 인기 덕분이다. 톈차오가 유명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난다 긴다 하는 만담꾼과 서커스·기예 전문가가 몰려들면서 톈차오는 중국의 브로드웨이가 됐다. 원래는 가난한 밑바닥 서민들을 ‘즐겁게 해주며’ 잠깐이나마 ‘가난 따위는 두렵지 않게’ 해주는 장소였던 톈차오의 몰락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민의 행복한 천국을 만들겠다고 공언한 마오쩌둥의 신중국 건설 이후다.

“동지들, 삶은 좋아졌소. 인생은 훨씬 즐거워졌소. 삶이 즐거워질 때, 일은 잘 풀리는 법이오.”(올랜도 파이지스 <혁명의 러시아 1891∼1991> 중) 1934년 자신의 모든 정치적 반대파를 공격하고 제거하기 위한 ‘대숙청’을 준비하고 있을 때, 스탈린이 인민에게 했던 말이다. 하지만 1930년대는 무리한 경제발전 계획과 각종 공포정치로 소련 인민이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인생을 살던’ 시기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정치적 비판이나 항의를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농담과 유머를 통해 우회적으로 스탈린 체제를 비난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유머나 농담마저 ‘반국가적 범죄’로 간주해 굴라크 같은 강제수용소에 인민들을 감금했다.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신중국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중국 서민들의 종합 놀이터 문화관 구실을 했던 톈차오의 샹성(만담)극장 모습. 박현숙 제공

중국 서민들의 종합 놀이터 문화관 구실을 했던 톈차오의 샹성(만담)극장 모습. 박현숙 제공

“삶이 즐거울 때 일이 잘 풀리는 법이오”

옌안 시절(국민당 정부의 토벌을 피해 공산당이 산시성 옌안 지역에 은거하던 시절), 마오쩌둥의 각종 정치적 파벌 숙청 작업과 비민주적 관행을 비판해 마오쩌둥에게 미운털이 박혔던, 작가이자 마르크스·레닌 선집 번역가이기도 한 왕스웨이는 “스탈린의 인성은 귀엽지 않다”는 글을 써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잔인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의 죽음은 신중국 건국 후 마오쩌둥의 전혀 ‘귀엽지 않은 인성’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의 신중국은 인민들에게서 소소한 삶의 즐거움을 몰수해갔고, 그중 대표적인 정책은 중국인들 특유의 유머와 해학이 넘쳤던 톈차오의 오락 활동을 금지한 것이다. 매그넘 소속 프랑스 사진작가 마르크 리부가 1957년 1월, 5개월여 일정으로 중국 여행을 왔을 때 찍은 사진들에는 톈차오에서 여전히 잡기와 기예, 무술 공연을 하는 사람들과 그들 주변에 모여들어 희희낙락하며 구경하는 ‘밝은 사회주의’ 얼굴들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가 프랑스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되어 그해 6월 대대적인 ‘반우파 투쟁’이 시작됐고, 그 후 톈차오에서 매일 들리던 ‘호탕한 웃음들’을 다시는 들을 수 없었다. 사실, 신중국이 건국된 직후부터 톈차오에서는 각종 자유로운 공연들이 ‘자본주의의 해악’이라는 이유로 금지되고 규제돼왔다. 그러다 1957년 반우파 투쟁을 계기로 전면 금지되면서 톈차오의 역사는 ‘사회주의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유머와 농담, 오락이 금지된 사회에서 어떻게 ‘밝은 결론’이 나올 수 있겠는가.

톈차오의 명성은 지금까지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개혁개방이 되고 온갖 자본주의 문물이 물밀듯 들어오면서, 중국에는 새로운 미디어 매체와 인터넷 문화가 생겨났고 톈차오의 기억들은 자연스럽게 잊혀져갔다. 이 화려한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시대에 누가 ‘약장수’들의 약발 안 먹히는 쇼를 보고, 알아듣기 힘든 방언으로 하는 만담극 같은 것을 들으며 박장대소하고 있겠나. 하지만 중국 정부는 최근 들어 다시 한번 ‘귀엽지 않은 스탈린 같은 인성’을 드러내고 있다. 각종 충격적인 규제정책에 이어 방송과 영화, 온라인 미디어 등에 대한 강력한 단속 방침을 발표했다.

지난 9월2일, 중국 방송 규제기구인 광전총국은 ‘문예 프로그램 및 관련 종사자들에 대한 진일보한 관리 강화 통지’를 통해 예인들의 저속한 언행과 ‘기생오라비’ 같은 행색 등을 엄격히 규제하고 팬덤 문화도 배척하며, 지나치게 상업적이고 오락적인 내용의 송출을 금지한다는 등의 ‘규제안’을 발표했다. 이 통지문에서 가장 ‘웃겼던’ 대목은 ‘정치적 입장이 정당하지 않거나, 당과 국가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배우나 스태프로) 기용될 수 없다’는 것과 ‘중화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와 혁명문화, 사회주의 선진문화를 대대적으로 알리고 홍보한다’는 내용, 그리고 ‘팬덤 문화를 엄격히 배격하고 애당 애국의 기치와 덕을 숭상하고…’라는 내용이다. 이것은 정말이지 ‘애국자가 홍콩을 통치해야 한다’고 말한 시진핑 주석의 ‘홍콩 원칙’만큼이나 썰렁한 농담처럼 들린다.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스탈린이 말했듯 ‘삶이 즐거워질 때 일이 잘 풀리는 법’인데, 이제는 더 이상 즐거워할 일도 없고 ‘애당 애국’만 해야 한다니, 위화여. 도대체 당신이 하루 만에 수정했다는 ‘사회주의의 밝은 결말’은 무슨 내용이었는지 말해달라. ‘즐겁게 살 수만 있다면’ 그 수정된 ‘밝은 사회’에서 깔깔 웃으며 살고 싶다.

베이징(중국)=글·사진 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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