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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사라지고 계정이 사라지고 사람이 사라졌다

‘다락방’에서 미쳐가는 여자들이 쓰고 또 써야만 하는 이유
등록 2021-12-29 19:01 수정 2021-12-30 02:17
장가오리 전 중국 국무원 부총리에게 성폭행 피해를 당했다고 폭로한 중국 테니스 스타 펑솨이. 트위터 영상 갈무리

장가오리 전 중국 국무원 부총리에게 성폭행 피해를 당했다고 폭로한 중국 테니스 스타 펑솨이. 트위터 영상 갈무리

“내가 나서기로 결정한 이유는 다시는 나와 같은 여성들이 같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2021년 12월17일, 중국 소셜미디어 웨이보에 ‘핵폭탄급’ 소식이 올라왔다. 대만 출신 가수이자 배우인 왕리훙의 아내 리징레이가 결혼 기간에 남편이 저지른 온갖 불륜과 성매매 등 지저분한 사생활을 폭로하는 긴 글을 올렸다. 이틀 전인 12월15일, 왕리훙은 자신의 웨이보에 그들 부부가 8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각자 다른 미래를 꿈꾸기에 평화롭게 이혼한다고 발표했다.

인설붕탑된 ‘가장 완벽한 남자’

왕리훙은 리안 감독의 영화 <색, 계>에서 극중 탕웨이가 좋아하는 대학교 연극부 리더 광위민 역을 한 배우로, 중화권에서 가수로 더 유명하다. 지금 중국과 홍콩, 대만의 1990년대 이후 세대는 모두 그의 노래를 들으며 성장했다. 중화권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모래 알갱이 한 알’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전설 같은 톱스타다.

빛나는 외모뿐만 아니라 대만 상류층 가정 출신인데다, 미국 명문 사립대학인 윌리엄스칼리지를 졸업하고 버클리음악대학 명예박사 학위가 있는 이른바 ‘뇌섹남’이기도 해서 중화권 연예계에서 ‘가장 완벽한 남자’ 캐릭터로 통했다. 하지만 아내가 소셜미디어에 폭로한 그의 추잡한 사생활로 인해, ‘완벽했던’ 캐릭터는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왕리훙 사건이 터진 뒤 중국 인터넷에서 가장 뜨고 있는 유행어는 ‘인설붕탑’(人設崩塌·미리 설정해놓은 이미지 혹은 캐릭터의 붕괴)이다.

왕리훙 사건은, 12월18일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금지 등 4개 안건에 대한 국민의 동의 여부를 묻는 대만 국민투표 투표율에 영향을 줄 정도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리징레이는 웨이보에서 자신이 결혼생활 중 겪은 온갖 정신적 학대와 남편의 불륜 등을 폭로하며, 자녀와 남편을 위해 자기 일을 포기하고 가정주부로 살아가는 이 시대 여성들이 자신을 거울삼아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남편의 추문을 폭로하는 막장 드라마 같은 내용치고 꽤나 수준 높은 각성을 담은 내용이기도 했다.

‘완벽한 남자’라는 캐릭터에서 한순간에 천하의 ‘찌질한 잡놈’으로 전락한 왕리훙은 미국 명문대 출신답지 않은 ‘비논리적이고 아둔한’ 문장력으로 자신의 전 아내를 ‘정신에 문제가 있는’ 여자로 몰아가려 했다. “대만에 있는 고급 별장을 너에게 줄 테니, 네가 썼던 글은 모두 이혼의 충격으로 우울하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쓴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언론에 발표하라”며 은근한 회유와 협박을 시도했다. 하지만 ‘정신에 문제가 있는’ 리징레이가 그보다 몇 배는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반격을 가하자 그는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 “남자는 당연히 모든 책임을 다 져야 한다”며 웨이보에 공개사과문을 올린 뒤 무대 밖으로 사라졌다. 리징레이는 왕리훙의 회유와 협박을 폭로하며 자신의 웨이보에 이렇게 썼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언론매체를 조종하고, 언론매체는 대중을 조종해 사회가치의 편차를 만들어내고 여론을 통제한다.”

두 번째 충격적인 폭로

리징레이의 웨이보 폭로는 엄청난 흥행과 성공을 거뒀지만 또 다른 ‘핵폭탄급’ 폭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설명하기도 어렵고, 또 말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말하고 싶습니다. (…) 이것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이고, 나방이 불에 뛰어들어 자멸하는 짓일지라도 (…) 저는 당신과의 사실을 밝히려 합니다.”

2021년 11월2일 밤 10시7분, 중국 테니스 스타이자 세계적인 선수였던 펑솨이의 웨이보에 폭로글이 올라왔다. 자신이 제18대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국무원 부총리를 했던 장가오리에게 성폭행당했고, 오랫동안 그의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에 길들여져 그를 ‘사랑한다’고 믿으며 내연녀로 지냈다는 내용이다. 소셜미디어에 최고위급 권력층에 대한 성폭행 폭로가 나온 것은 사회주의 신중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펑솨이의 글은 20여 분 만에 삭제됐고 그의 웨이보 계정도 검색되지 않았다. 그리고 펑솨이도 사라졌다. 하지만 펑솨이가 웨이보에 올린 글은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다음날 전세계 주요 언론에 기사로 등장했다. 중국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언론매체와 소셜미디어를 통제해 이 소식이 더 많은 중국인에게 퍼지지 못하도록 했다. 펑솨이도 그들만이 아는 ‘다락방’ 속에 꽁꽁 감췄다. 샬럿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로체스터가 미쳐버린 자신의 아내를 아무도 모르는 집 안 다락방에 유폐해버리듯이 말이다.

“당신은 나를 갖고 놀다가 필요 없어지면 버리면 그만이었죠.” 이렇게 울부짖듯 분노와 회한에 찬 어투로 장가오리의 성폭행을 폭로했다가 사라졌던 펑솨이가 다시 공식 언론매체에 등장한 것은 12월20일 싱가포르 매체 <연합조보>와의 인터뷰에서다. 인터뷰에서도 펑솨이는 충격적인 폭로를 했다. “누군가가 날 성폭행했다고 말하거나 쓴 적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 기사를 보고 나는 그동안 강제로 ‘다락방’에 갇혀 있던 펑솨이가 진짜 ‘미쳐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우주는 아주 넓어서 지구는 우주의 모래 알갱이 한 알일 뿐이고, 사람들은 모래 알갱이 한 알조차 되지 못한다”며 자신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세뇌했던 장가오리처럼, 중국의 권력자들이 또 다른 정치적 가스라이팅을 가해 펑솨이의 생각을 통제하는지도 모르겠다.

현실과 소설의 교차점

“문학은 가장 헛된 수고예요. 우스꽝스럽죠. 이렇게 많이 썼는데도 난 아무도 구하지 못했어요. 심지어 나 자신도 구하지 못했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이렇게 많이 썼는데 말이에요. 차라리 그를 칼로 찔러 죽이는 게 나았어요. (…) 소녀는 피해를 입었어요. 소녀는 독자들이 이 대화를 읽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상처받아요. 하지만 악인은 고고하게 높은 곳에 있죠. 글밖에 쓸 줄 모르는 나 자신이 증오스러워요.”

2017년, 스물여섯 살이던 대만 작가 린이한은 자전적 소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출간하고 두 달 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소설 속 주인공 팡쓰치는 13살 때 이웃집에 살던 자신보다 37살이나 더 많은 유명 입시학원 강사 리궈화에게 처음 성폭행을 당했다. 그 뒤 18살 때까지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그를 ‘사랑한다’고 믿다가 어느 날 그의 ‘덫’에 걸렸다는 걸 깨닫는 순간 미쳐버린다. 린이한의 분신이기도 한 팡쓰치는 오랫동안 성폭행범인 리궈화가 만들어놓은 ‘다락방’에 갇혀서 부모와 이웃 등 다른 사회적 공범자들의 조력과 방관 속에 서서히 미쳐갔다.

린이한의 실제 경험이기도 한 이 소설에는 또 다른 성폭행 피해 여학생인 궈샤오치의 이야기도 나온다. 팡쓰치와 마찬가지로 궈샤오치도 학원에서 스승인 리궈화에게 성폭행당한 뒤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으로 자신과 선생님은 사랑하는 사이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결국 성매매 여성 취급을 당하며 버림받자, 어느 날 인터넷에 모든 사실을 폭로하는 글을 올린다. 다시는 다른 학생들에게 자신과 같은 일이 생기면 안 된다는,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불륜녀는 뒈져버려” “어차피 같이 즐긴 거잖아?” 등의 댓글은 모두 비수가 되어 궈샤오치에게 날아와 꽂혔다.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일말의 상상력도 없었다. (…) 그들은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끔찍한 고통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궈샤오치가 올린 인터넷 폭로글을 본 학원 원장과 리궈화는 이렇게 말한다. “이 아둔한 여자들, 겁탈당하고도 그 사실을 제 입으로 말하는 천한 여자들 (…) 그 아이 손 좀 봐줘야겠군.”

펑솨이가 웨이보에 쓴 글을 보면, 장가오리는 자신들의 관계를 ‘절대 비밀로 하라’고 당부하면서 ‘그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투로 말한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에서도 리궈화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쉿, 이건 우리 둘의 비밀이야. 이건 선생님이 널 사랑하는 방식이야. 알겠니?” 작가 린이한은 정신적 고통의 다락방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소설 속 팡쓰치는 미쳐서 정신병원에 갇혔다. 리궈화는 “원래 미친 애였어. 날 고발하겠다고? 무슨 근거로?”라며 입술을 가늘게 찢으며 웃는다. 린이한을 실제 성폭행했던 학원 강사 역시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됐다.

위선의 가면을 ‘인설붕탑’시켜라

리징레이와 펑솨이, 그리고 린이한과 그가 쓴 소설 속 인물인 팡쓰치와 궈샤오치의 공통점은 가장 무기력하고 분노스러운 상태에서 오로지 ‘쓸 줄밖에 몰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기 소셜미디어와 일기장, 원고지 등에 분노와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을 향해 쓰고 또 썼다. 그것이 폭로이든 문학작품이든 간에 그들은 다락방에 갇힌 로체스터의 아내처럼 미쳐서 죽어가기 전에 ‘고고하게 높은 곳에 있는 악인들’이 만들어놓은 다락방을 부수고 자신들만의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로체스터의 미친 아내가 그랬듯이 다락방을 부수고 나와서 괴물 같은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펄쩍 뛰어 자신을 폭행하고 미치게 한 각자의 ‘로체스터’를 향해 달려들어 목을 붙잡고 조르며 사납게 울부짖으며 비명을 질렀다. “겉으로는 점잖은 도덕군자인 체하면서…(실제로 속은 시커먼 색마들!)”(펑솨이가 11월2일 웨이보에 올린 글 마지막 문장)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만의 소셜미디어에 ‘글밖에 쓸 수 없고’ 비록 ‘아무도 구하지 못하고 자신마저 구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그들은 그 공간에서 ‘완벽한 체’하고 ‘도덕적인 체하는’ 위선의 가면을 만인 앞에서 ‘인설붕탑’시킬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들이 다락방에서 혼자 미쳐가지 말고 소셜미디어 세상으로 나와 ‘쓰고 또 써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펑솨이여, 부디 미치지 않고 살아남기를 바라며 건투를!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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