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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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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누르고 장거리달리기하는 정치

강대국 사이에서 굴욕 견디면서 평화, 자유, 민주주의 지켜온 핀란드
등록 2024-04-20 04:06 수정 2024-04-24 05:01
2019년 6월 핀란드 헬싱키 국립묘지. 신동호 제공

2019년 6월 핀란드 헬싱키 국립묘지. 신동호 제공


숲을 달린다. 나뭇잎 사이로 해가 순간 커진다. 떡갈나무가 이제 막 고사리손 같은 잎을 피웠다. 그 잎이 힘겹게 해를 가려주어 생긴 그늘을 지난다. 해가 번쩍 점멸, 멋진 아침 조명이다. 흙길에는 솔잎이 가득하다. 손바닥만 한 떡갈나무 잎이 묵은 잎 위로 쌓여 비탈은 따뜻하다. 바삭바삭, 발을 디딜 때마다 숲이 응답해준다.

생각의 공백 사이로 바람이 분다

숲 안의 생명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바람과 비, 뿌리가 쉼 없이 봄을 향해 달렸다. 경치를 보기 위해서는 멈춰서야 한다. 경치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달려야 한다. 꽃에 취하기 위해서는 걸어야 한다. 꽃이 되기 위해서는 달려야 한다. 문득 나타났다가 돌연 사라지는 햇빛처럼, 숲의 동물들처럼, 숲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숲을 달려야 한다. 나무뿌리, 돌부리에 집중하며 숲을 달린다. 숨이 가빠질수록 생각에 공백이 생기고, 그 틈에 휭 바람이 지나간다. 인간이 짊어진, 관찰자로서의 무게를 덜어낸 기분이다.

2024년 4월7일, 망우산 트레일러닝 대회에 다녀왔다. 서울 사가정공원에서 망우산에 올라 임도 두 바퀴를 돌고 내려오는 14㎞ 거리의 대회다. 공원 입구에는 30여 명의 아저씨가 옹기종기 모였다. 대회 실무는 어르신 두 분이 대충 하는데, 달리는 게 중요하지 뭐, 하는 표정이다. 새벽 댓바람부터 다졌던 결연한 마음이 평평해진다. 배번호를 받아 제대로 달기도 전에 출발하라고 다그친다. 일상의 연장인 듯, 두세 시간에 일정을 마치는 작은 대회였다.

몰랐다. 망우산은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통해 명징해지는 산이다. 살아 있는 동안 명예를 누리지 못한 자들이 죽어 누리는 산이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동행하는 산이다. 방정환과 한용운 선생이 여기 계신다. 지석영 선생의 무덤은 동쪽 기슭에 있다. 이중섭, 계용묵, 차중락의 이름이 새겨진 표지판이 서쪽 기슭을 가리킨다. 휙휙, 임도를 달리는데 잊힌 이름들이 가슴에 꽂힌다. 북쪽 끝에 박인환 시인의 표지석이 있다. 주춤한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시인은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명예란 살아 누려야 마땅한 게 아닐까. 죄 없는 봄을 미워할 수도 있겠다, 싶다.

2024년 4월 서울 중랑구 망우산 트레일러닝 참가 뒤. 신동호 제공

2024년 4월 서울 중랑구 망우산 트레일러닝 참가 뒤. 신동호 제공


2024년 4월 서울 중랑구 망우산 묘지 표지판. 사진 신동호

2024년 4월 서울 중랑구 망우산 묘지 표지판. 사진 신동호


2019년 6월10일, 문재인 전 대통령의 핀란드 국빈방문이 있었다. 나는 새벽의 헬싱키를 달렸다. 목적지는 히에타니에미 묘지다. <대변동: 위기, 선택, 변화>(김영사)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이렇게 말한다. “핀란드를 처음 방문한 사람이 그 국민과 역사를 알고 싶다면 가장 먼저 가봐야 할 곳은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가장 큰 묘지, 히에타니에미 묘지다.” 이 묘지의 터줏대감은 헬싱키 출신 전몰장병들이다. 시신이 수습된 3천 구 이상의 무덤, 행방불명된 장병의 이름은 더 많이 적혀 있다. 여기에서는 ‘무민’을 탄생시킨 작가 토베 얀손, 북유럽 디자인의 거장 알바르 알토, 영양물 보전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은 아르투리 비르타넨의 묘비명도 읽을 수 있다.

핀란드는 600여 년간 스웨덴의 식민지였다. 19세기 초에는 러시아 제국의 자치령이었다. 핀란드 독립은 러시아혁명으로 제국이 무너진 기회를 틈탔다. 이념으로 인한 내전을 겪었지만 볼셰비키혁명을 거부했다. 1919년 헌법을 도입해 민주공화국이 됐다. 독립정신은 간단치가 않다. 핀란드의 역사를 교향시로 담은 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가 핀란드의 국가 정체성에 불씨를 지핀다. 콜레마이넨 삼 형제는 숲을 달렸다. 그중 요하네스는 1912년 스웨덴 올림픽 5천m와 1만m, 크로스컨트리에서 금메달을 땄다. 세계 신기록이다. 시상대에는 러시아 국기가 게양된다. 핀란드는 분노했다. 독립 열망이 거세게 불타올랐다.

두 강대국 사이에서 이 악물고 견딘다

핀란드는 구소련과 두 번 싸운다. 1939년 ‘겨울전쟁’은 무모했다. 소련군 50만 명, 핀란드군은 군복도 지급 못한 예비군까지 탈탈 모아 12만 명이다. 소련은 핀란드를 경유한 독일의 침략이 두렵다. 레닌그라드에서 더 멀리 국경선을 물리라 통첩한다. 핀란드는 격렬히 저항한다. 포성이 시작된다. 체급이 맞지 않는 전쟁이었지만 핀란드는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길마다 가득 쌓인 눈이 겨울 요정처럼 핀란드를 돕는다. 방어에 성공한다. 소련은 히틀러도,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도 걱정된다. 1940년 2월, 소련은 핀란드를 점령하겠다는 욕심을 포기한다.

두 번째 전쟁은 ‘계속전쟁’이다. 빼앗겼던 핀란드령 카렐리야를 되찾았다. 눈치껏 소련령 카렐리야까지 진격한다. 그 와중에 독일이 핀란드계 유대인 체포와 레닌그라드 공격을 요구한다. 핀란드는 거부한다. 두 강대국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견딘다. 강대강으로 맞붙은 거대전쟁 사이에서 기어이 국경을 지켜낸다. 이로써 작은 나라의 생존전략을 확고하게 세우게 된다.

히에타니에미 묘지로 가는 길은 소나무와 가문비나무로 가득하다. 키가 크다. 가는 길 중간에 시벨리우스공원이 있다. 행운이라 여긴다. 파이프오르간이 연상되는 조형물과 시벨리우스의 두상 조각이 아침 햇살에 반짝인다.

2019년 6월 핀란드 헬싱키 시벨리우스공원. 신동호 제공

2019년 6월 핀란드 헬싱키 시벨리우스공원. 신동호 제공


2019년 6월 핀란드 헬싱키 시벨리우스공원. 신동호 제공

2019년 6월 핀란드 헬싱키 시벨리우스공원. 신동호 제공


달리는 헬싱키 시민과 자주 마주친다. 묵묵하다. 지금은 아프리카 나라들이 장거리달리기 강국이다. 그 전에 장거리달리기 강국은 핀란드였다. 크로스컨트리 스키로 심장이 튼튼해졌다. 1912년 여름, 수천 명의 소년이 한네스 콜레마이넨을 영웅 삼아 숲을 달렸다. 그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이는 파보 누르미다. 누르미는 군 복무 중에도 완전군장으로 장거리를 달린다. 왼손으로 기차의 마지막 칸을 잡고 달리며 더 큰 보폭을 익힌다.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에서 누르미는 1만m에서 시상대에 섰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핀란드 국가를 들었다. 1924년 올림픽에서 딴 금메달 다섯 개의 전주곡이었다.

‘장거리달리기 강국’의 비결

시수(Sisu)라는 단어는 독립과 함께 신생 핀란드의 상징이 된다. 시수는 의지력, 묵묵히 참으면서 때를 기다린다는 의미다. 시수가 장거리달리기에서 정신력으로 작용했는지, 장거리달리기가 시수의 정신을 낳았는지 따질 필요는 없다. 달리기는 핀란드 사람들의 운명이다. 자연은 심연 같은 숲과 투명한 얼굴의 호수로 어우러져 있다.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날아갈 수 없으니 달려야 한다. 핀란드의 장거리달리기는 경이적인 기록을 수없이 만들었다. 핀란드의 대지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토르 고타스의 책 <러닝>(책세상 펴냄)에서 ‘누르미와 그를 닮은 사람들은 숲속의 동물들과 같다’고 쓴 문장을 발견한다.

핀란드는 두 전쟁으로 10만 명의 국민을 잃었다. 평화조약의 조건으로 소련에 3억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한다. 핀란드는 굴욕을 견뎌낼 자신이 있다. 소련에 허리를 굽힌다. 핀란드는 용감하다. 중립을 지향한다.

유호 파시키비 대통령은 1946년부터 1956년까지 10년 임기 동안 소련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다. 미국의 마셜플랜을 조심스럽게 거부한다. “작은 나라가 이웃 강대국의 합리적인 이익을 배려하는 것은 굴종이라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1973년 핀란드는 유럽경제공동체와 협상 중이었다.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를 찾아가 안심시킨다. 소련과의 관계는 변함없을 것이라 확약한다. “핀란드가 소련으로부터 더 강한 신뢰를 얻을수록 핀란드와 서방세계와의 관계도 더욱 강해질 수 있다”고 연설한다. 두 대통령으로 이어진 외교 정책을 ‘파시키비-케코넨 원칙’이라 부른다. 궁금하다. 국민은 어떻게 지지할 수 있었을까. 하얀 죽음의 신, 겨울전쟁의 스나이퍼 시모 헤위헤가 사살한 소련군 장교의 숫자 때문이었을까. 자존심을 누를 수 있는 근거는 시수였을까.

2019년 6월 핀란드 헬싱키 국립묘지. 신동호 제공

2019년 6월 핀란드 헬싱키 국립묘지. 신동호 제공


2019년 6월 핀란드 헬싱키 국립묘지. 신동호 제공

2019년 6월 핀란드 헬싱키 국립묘지. 신동호 제공


굴욕과 바꾼 것은 평화와 자유, 민주주의다. 전쟁 배상금도 줄였다. 소련과의 신뢰로 헬싱키에서 16㎞ 거리에 있던 포르칼라 해군기지의 철수를 이뤘다. 소련은 유럽자유무역연합 가입도 묵인한다. 핀란드는 가공할 지구력으로 오래오래 달렸다. 지금 핀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다. 스타트업, 신재생에너지, 성평등 분야의 선진국이다. 사울리 니니스퇴 대통령과 문 대통령도 이 분야의 협력을 약속했다. 무엇보다 핀란드는 인내심으로 라플란드의 오로라를 지켰다. 밤이 길다는데, 지치지 않아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행복이 저 끝에 있다는 걸 확인해줘서 고맙다.

망우산에서 내려온다. 어르신 한 분이 공원에 설치된 시계를 올려다보신다. “한 시간 삼십삼 분, 7등” 하신다. 근사한 계측기다. 마주 보고 웃는다. 완주 메달과 빵을 주신다. 1200원짜리 빵임을 강조하신다. 벚꽃이 저리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뭐, 나도 망우산 떡갈나무처럼 새잎 하나를 피웠는데 뭐, 어르신 두 분 모두 좋은 표정을 가지셨는데 뭐. 공원이 사람을 가득 모아서 숲 쪽으로 하나둘 안내하고 있다. 마음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구름이 되는 경험을 한다.

숲을 관찰하지 않고, 숲이 되어보는 일

끈기라면 우리도 핀란드 못지않다. 국민과 정부 사이의 신뢰가 좀 부족하지 싶다. 정치가 장거리달리기를 좀 두려워하지 싶다. 숲을 관찰하지 말고, 숲이 되어보는 거다. 달리기에 대해 말하지 말고 달려보는 거다. 한번쯤 단단히 박힌 고정관념의 나사를 반대로 돌려 빼보는 거다. 일찍 마친 달리기가 아쉬워 잠시 서성여본다. 근데, 빵이 맛있다.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연재 소개: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58번의 순방으로 40개 나라를 방문했다. 신동호 시인은 연설비서관으로 참모 가운데 유일하게 모든 순방 일정을 보좌했고, 새벽 시간을 활용해 낯선 나라를 달렸다. 그때 보고 느낀 감정은 문 전 대통령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떠나며’ 시리즈에 고스란히 담기기도 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시인의 달리기에 대한 생각과 함께 묵혀놓았던 순방지의 새벽 이야기들을 4주마다 연재한다.

2019년 6월 핀란드 헬싱키 국립묘지. 신동호 제공

2019년 6월 핀란드 헬싱키 국립묘지. 신동호 제공


2019년 6월 핀란드 헬싱키 국립묘지. 신동호 제공

2019년 6월 핀란드 헬싱키 국립묘지. 신동호 제공


숙박 호텔에서 국립묘지까지 달린 경로. 신동호 제공

숙박 호텔에서 국립묘지까지 달린 경로. 신동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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