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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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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도안의 경제 실정도 덮어버린 정체성 정치 성공하나

튀르키예 대선에서 에르도안 대통령 예상 밖 선전
반서방 정서 활용하며 강조한 ‘보수 민족주의’ 먹혀
등록 2023-05-20 06:51 수정 2023-05-23 04:51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2023년 5월14일 이스탄불의 자택 앞에서 국기를 흔드는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2023년 5월14일 이스탄불의 자택 앞에서 국기를 흔드는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모두의 노력과 희생에 감사한다. 5월14일 이룬 성과를 더 큰 승리로 만들어내야 할 때다. 튀르키예는 우리의 복무를 필요로 한다. 행동에 나서야 한다. 5월28일 신께서 우리에게 ‘튀르키예의 세기’를 불러올 수 있도록 허락하시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2023년 5월16일 소셜미디어 ‘트위터’에 올린 글에선 한껏 여유가 묻어났다. 선거운동 막판까지 각종 여론조사에서 야권 연대체인 국민연합의 대선 후보로 나선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CHP) 대표에게 뒤지며 조바심을 냈던 그다. 하지만 5월14일 실시된 대선·총선 동시 선거의 투표함을 열어보니, 결과는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대선 1차 투표에서 49.52%의 득표율을 얻으며, 클르츠다로을루 후보(44.98%)를 약 250만 표 차이로 여유 있게 앞섰다. 집권 정의개발당(AKP)이 주도한 여권 연대체 인민연합도 의회 전체 600석 가운데 321석을 차지하며 국민연합(213석)을 압도했다. 5월28일 대선 결선 투표를 앞두고 있음에도 에르도안 대통령이 결과를 낙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야권 승리할 것” 판세 헛짚은 서구 주류 매체

“이번 선거는 압제와 민주주의 간의 충돌, 야만과 도덕 간의 정면 대결이다. 6개 야권 정당이 한데 뭉치면서, 에르도안 정권이 패배할 가능성이 커졌다. (…) 에르도안의 잔혹한 통치를 연장할지, 정의와 희망으로 복귀할지를 결정하는 중차대한 선거다. 긴 세월 감내해온 족쇄를 끊어낼 시점이 됐다.”

튀르키예 출신 칼럼니스트 에체 테멜쿠란가 영국 일간 <가디언> 5월11일치에 쓴 글은 이번 선거를 앞둔 서구 주류 매체의 시각을 대변한다. 구도는 ’민주 대 반민주’, 희망을 잔뜩 섞은 판세는 ‘야권 우세’다.

“에르도안 대통령 지지층이 각성하고 있다. 집권 정의개발당 지지자들은 에르도안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와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에 갈수록 염증을 느끼고 있다.”(프랑스 일간 <르몽드>, 2022년 12월1일)

“클르츠다로을루 후보가 에르도안 대통령을 10%포인트 이상 크게 앞섰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악소이’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지율은 44.4%로, 클르츠다로을루 후보(55.5%)에 11.1%포인트 뒤진다고 밝혔다.”(영국 <로이터> 통신, 2023년 3월13일)

튀르키예 여론조사 전문기관의 절대다수도 선거 직전까지 야권의 낙승을 예고했다. 심지어 클르츠다로을루 후보(55.5%)와 에르도안 대통령(35.3%)의 득표율 격차가 20%포인트를 넘어설 것이란 전망(‘폴리메트레’, 5월2일)까지 나왔다. 이슬람권 전문매체 <알모니터>는 5월15일 “선거에 앞서 승리를 낙관한 야권에선 에르도안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저지르거나,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을 우려했다”며 “투표 다음날 야권 지지자들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선거에서 실제로 승리했다는 점일 것”이라고 짚었다.

‘공정한 경쟁은 아니었다’는 주장도 나올 법하다. 2016년 7월 에르도안 대통령을 노린 군사쿠데타가 실패한 뒤, 야권 지지 성향의 군인과 공무원 수만 명이 쫓겨났다. 시민사회 활동가와 비판적 언론인, 야권 유력 정치인들은 활동이 금지되거나 투옥되기도 했다. 주요 국가기관은 ‘충성파’가 장악했고, 언론과 사법부마저 길들여졌다. 2018년 선거에서 재집권에 성공한 이후 에르도안 대통령은 1인 체제를 더욱 고착화했다. 그럼에도 <알모니터>는 “이런 현실이 야권 패배의 결정적 이유라고 하기엔, 투표율(88.9%)이 지나치게 높았다”고 전했다.

물가 85% 치솟아도 저금리 유지한 신묘한 정책

선거 막판에 이뤄진 에르도안 대통령의 ‘선물 공세’도 야권 패배의 결정타는 아니었다. 대학생 대출금 탕감, 최저임금 두 배 인상, 에너지 보조금과 은퇴자 연금 인상 등이 줄줄이 발표됐지만 판세를 뒤집는 수준의 변화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보단 여론조사에서 드러나지 않은 ‘숨은 보수’ ‘샤이 보수’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헬린 사린 에르템 이스탄불 메데니예트대학 교수는 5월16일 <알자지라> 방송에 출연해 “에르도안 대통령 집권기 동안 여론의 민족주의 성향이 강력해졌다. ‘위대한 튀르키예’를 내세운 에르도안 대통령은 ‘반서방’ 정서를 효과적으로 활용했고, 튀르키예가 겪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유발한 건 미국과 유럽연합(EU)이란 비난이 먹혀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터키 공화인민당 대표(앞줄 가운데) 겸 야권의 선거연대체인 국민연합 대선 후보가 2023년 5월13일 헌화할 꽃을 손에 쥔 채 참배를 위해 수도 앙카라에 자리한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묘소로 들어서고 있다. EPA 연합뉴스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터키 공화인민당 대표(앞줄 가운데) 겸 야권의 선거연대체인 국민연합 대선 후보가 2023년 5월13일 헌화할 꽃을 손에 쥔 채 참배를 위해 수도 앙카라에 자리한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묘소로 들어서고 있다. EPA 연합뉴스

이번 선거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경제였다. 애초 경제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집권 전반기 10년의 최대 치적이었다. 그의 집권 직전인 2002년 2402억달러에 그쳤던 튀르키예의 국내총생산(GDP)은 집권 10년 만인 2013년 네 배 늘어난 9578억달러로 정점을 찍었다. 같은 기간 1인당 GDP도 4704달러에서 1만2507달러까지 늘었다. 하지만 후반기 10년은 줄곧 내리막길을 치달았다. 2022년 튀르키예의 GDP는 9060억달러, 1인당 GDP는 1만661달러로 줄었다. 전형적인 ‘중진국 함정’에 빠진 모양샌데, 그 바탕엔 이슬람의 신념과 버무려진 에르도안 대통령의 ‘신묘한’ 경제정책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시장에 돈이 많이 풀리면, 화폐가치가 떨어지면서 물가가 오른다. 따라서 올라간 물가를 낮추려면 시장에 풀린 돈을 거둬들여야 한다. 이럴 때 세계 각국의 금융당국이 통상 쓰는 정책이 이자율 인상이다. 그런데 에르도안 대통령은 역으로 높은 물가상승률의 원인으로 높은 이자율을 지목한다. 그는 2022년 10월 물가상승률이 85%까지 치솟았을 때도 이자율 인하를 결정해, 환율시장에서 튀르키예 화폐(리라) 가치가 곤두박질치게 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자율을 낮추면 국내 투자가 늘면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성장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또 리라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엔 도움이 되지만 수입은 줄어, 경상수지 균형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물가도 낮출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이자율 인상은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키고, 높아진 이자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면서 물가 인상을 유발한다고 강조한다.

기득권, 복지수급자, 정치 무관심층이 지지세력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이자율 인하로 리라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물가 인상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에너지와 원부자재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수출기업도 리라화 약세로 생산·투자가 크게 위축되면서 타격이 커졌다. 그럼에도 2018년 재집권 직후부터 이자를 ‘착취의 도구’이자 ‘만악의 근원’으로 규정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낮은 이자율=선, 높은 이자율=악’이란 이분법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슬람 율법에서 이자 받는 것을 금기시하지만, 낮은 이자율은 부동산 거품이 터지는 것도 막아준다. 돈과 권력을 독점한 소수 특권층에겐 절실한 문제일 터다. 미국 카네기중동센터가 5월15일 주최한 온라인 토론회에서 셀린 나시 앙카라정책센터 런던사무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지 기반은 크게 세 부류다. 첫째, 지난 20여 년 그의 집권 기간에 돈과 권력을 쌓은 기득권층이다. 이들은 당연히 정권교체에 반대한다. 둘째, 튀르키예 국민 3명 중 1명꼴인 약 3천만 명은 이러저러한 국가의 지원을 받아 생활한다. 이들은 강고한 정의개발당 지지세력이다. 셋째, 정치 무관심층도 에르도안 대통령을 지지한다. ‘우리 중 하나’란 인식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 야권은 대통령중심제를 의원내각제로 되돌리는 정치개혁을 으뜸 구호로 내세웠지만, ‘현상 지속’을 약속한 에르도안 대통령의 벽은 결국 넘지 못했다.”

대지진 대응 미숙도 집권당 지지층에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전통적인 정의개발당 텃밭이던 지진 피해 지역의 여론이 선거 막판 에르도안 대통령 지지세로 돌아서면서 야권 지지자들의 분노에 찬 글이 소셜미디어를 달구기도 했다. 30여 년 경력의 튀르키예 언론인 바르친 이난치는 ‘카네기중동센터’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제 문제는, 지진 피해는 왜 선거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에르도안 대통령이 튀르키예 사회의 분열과 분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선거에 앞서 튀르키예의 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여성과 청년층이 판세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보수적 여성 가운데 정의개발당 지지층은 대단히 두껍다. 튀르키예 여성의 30% 정도만 사회에 진출해 일하고 나머지는 가정에 머문다. 이들은 가정에서 충분히 존중받지 못한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여성·어머니·부인’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강조하면서 이들의 마음을 얻었다.”

이를 두고 <알모니터>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지난 20년여 집권기 동안 공들인 ‘정체성 정치’의 결과”라며 “결국 ‘정체성 정치’가 모든 것을 덮었다”고 평했다. ‘수니파 이슬람, 가부장제에 바탕한 보수적 민족주의’란 에르도안 대통령이 제시한 정체성이, 민주화와 정치개혁을 앞세운 클르츠다로을루 후보와 야권의 비전보다 튀르키예 유권자에게 울림이 컸다는 얘기다.

결선투표에서 에도르안 압승 가능성 커

결선투표(5월28일) 전망은 ‘에르도안 대통령 압승’으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야권 당선을 예고했던 서구 매체도 마찬가지다. 실망한 야권 지지층의 이탈과 투표 불참 가능성이 커지지만, 의회선거에서 승리한 집권세력은 벌써부터 ‘안정과 조화’를 외치고 있다. 변화를 열망하던 45% 남짓한 튀르키예 유권자가 비탄에 잠긴 새, 에르도안 대통령과 앙숙인 유럽연합(EU) 쪽도 ‘표정 관리’를 하는 모습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무슬림의 나라’인 튀르키예의 유럽연합 가입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튀르키예의 다음 선거는 2024년 3월에 치러지는 지방선거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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