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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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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 없는 한반도 남북 ‘종전선언’

실천적 성격 강한 ‘평양선언’에 담긴 의미…

영변 핵시설 영구 폐쇄 카드로 미국과 본격 비핵화 협상
등록 2018-09-22 06:52 수정 2020-05-02 19:29
희망이 깊어야 믿음이 생긴다. 보이지 않는 것조차 알아챌 때 신뢰가 싹튼다. 6·15가 그랬고, 10·4가 그랬다. 한겨울 평창에서 봄의 판문점으로, 다시 가을의 평양까지. 극한의 위기를 뚫고 한달음에 내달려왔다.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다’는 구호는 차라리 절규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고 제안한다. 김정은 위원장과 나는 북과 남 8천만 겨레의 손을 굳게 잡고 새로운 조국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9월19일 평양 능라도 5·1 종합경기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15만 명에 가까운 북녘 동포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평화, 그 새로운 미래가 머지않았다.
비무장지대가 평화지대로 바뀐다. 남북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도 비무장화하기로 합의했다.

비무장지대가 평화지대로 바뀐다. 남북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도 비무장화하기로 합의했다.

“전쟁 없는 한반도가 시작됐습니다. 남과 북은 오늘 한반도 전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위험을 없애기로 합의했습니다.”(문재인 대통령)

“수십 년 세월 지속돼온 처절하고 비극적인 대결과 적대의 역사를 끝장내기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를 채택했으며, 조선 반도를 핵무기도 핵 위협도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 노력해나가기로 확약했습니다.”(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6·15는 총론, 10·4는 각론, 9·19는 실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9월19일 오전 합의한 ‘9월 평양공동선언’(평양선언)의 핵심은 두 지도자의 기자회견 발언에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4·27 판문점선언이 밝힌 새로운 남북관계와 ‘핵무기도, 전쟁도 없는 한반도’로 가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계획이 선언문 전체에 촘촘히 박혀 있다. 아울러 평양선언에는 1991년 ‘남북한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 체결 이후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합의한 내용이 발전적으로 녹아 있다. 2000년과 2007년에 이어 세 번째로 평양 정상회담을 수행한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은 9월19일 평양에서 기자들과 만나 “6·15 공동선언은 총론적 성격이 강하고, 10·4 정상선언은 각론적 성격이 강했다”며 “평양선언은 실천적 성격이 강하다는 측면에서, 앞선 2개 선언을 보완하는 느낌”이라고 짚었다.

전문과 6개조 14개항으로 이뤄진 평양선언은 그 구성 자체만으로도 함축하는 의미가 커 보인다. 한반도 냉전체제가 해체기로 접어든 지금, 남과 북의 두 지도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안을 순서대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두 정상이 군사적 적대 관계 종식, 실질적인 전쟁 위험 제거, 근본적 적대 관계 해소를 선언 제1조에 새겨넣은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어 선언 제2조에선 민족경제 균형 발전을, 제3조에선 이산가족 문제 등 인도적 사안을, 제4조에선 문화·예술·스포츠·사회 등 남북 교류·협력 강화 방안을 각각 제시했다. 안팎의 관심이 집중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조치는 제5조에 모았다. 분야별로 남북관계의 새로운 단계로 가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 뒤, 비핵화 관련 사안이 등장한 게다. 비핵화를 위한 북-미 협상의 진전 여부와 남북관계 발전을 연동시키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다짐으로 읽힌다.

남북은 4·27 판문점선언 제3조 3항에서 ‘올해 안 종전선언’을 명시했다. 이어진 북-미 협상에서 북쪽이 종전선언을 신뢰 구축과 본격적인 비핵화 조치의 ‘입구’로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6·12 북-미 정상회담 때까지만 해도 미국 역시 기존 ‘비핵화를 통한 평화’에서 ‘평화를 통한 비핵화’로 입장을 바꾼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후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자 미국 쪽은 종전선언에 앞서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에 들어가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고집했다. 북-미 협상이 난항을 거듭한 이유다.

우발 충돌 막을 완충지대 마련
9월19일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송영무 국방장관(앞줄 왼쪽)과 노광철 인민무력상이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문에 각각 서명한 뒤 교환하자, 뒷줄에서 지켜보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박수를 치고 있다.

9월19일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송영무 국방장관(앞줄 왼쪽)과 노광철 인민무력상이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문에 각각 서명한 뒤 교환하자, 뒷줄에서 지켜보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박수를 치고 있다.

그래서다. 남과 북이 평양선언 제1조에서 “비무장지대를 비롯한 대치지역에서의 군사적 적대 관계 종식을 한반도 전 지역에서의 실질적인 전쟁 위험 제거와 근본적인 적대 관계 해소로 이어나가기로 했다”고 밝혀 적은 것은 의미가 적지 않다. 기본합의서 체결 이후 사실상 사문화했던 불가침 선언을 되살린 것이자, 사실상 남북 차원의 ‘종전선언’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평양선언과 함께 남북이 체결한 ‘판문점선언 군사분야 이행합의서’(이행합의서)를 보면,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남북은 6개조 19개항에 이르는 이행합의서에서 일체의 적대 행위 전면 중지, 비무장지대 평화 지대화, 서해 평화수역화 및 공동 어로, 교류·협력 및 접촉·왕래 활성화를 위한 군사적 보장 대책, 군사공동위원회 구성 등 군사적 신뢰 구축 방안을 수치까지 밝혀 적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남북은 이행합의서 제1조 2항에서 11월1일부터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상대방을 겨냥한 각종 군사연습을 중지하기로 했다. 지상에서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5㎞ 안에서 포병 사격훈련과 연대급 이상 야외 기동훈련이 전면 중지된다. 해상에선 서해 남쪽 덕적도 이북에서 북쪽 초도 이남까지, 동해 남쪽 속초 이북에서 북쪽 통천 이남까지 수역에서 포사격과 해상 기동훈련이 중지된다. 또 공중에선 군사분계선 동·서부지역 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치하고, 이 지역에서는 실탄사격을 동반한 전술훈련을 금지하기로 했다. 지상·해상·육상에서 우발적 충돌을 막을 ‘완충지대’가 마련된 셈이다.

군비통제 넘어 군축까지 아울러

이와 맞물려 이행합의서 제2조에선 ‘지구상에서 가장 중무장된 지역’으로 평가되는 비무장지대를 실질적인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한 방안이 제시됐다. 남북은 비무장지대 안에 감시초소(GP)를 전부 철수하기 위한 시범적 조치로 상호 1km 이내에 근접한 남북 감시초소들을 완전히 철수(1항)하기로 했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도 비무장화(2항)하기로 합의했다. 정전협정 체결 65년 만에야 비무장지대의 실질적 비무장화가 이뤄지는 셈이다. 남북은 비무장지대에서 시범적 남북 공동 유해 발굴과 역사 유적 조사 등도 추진하기로 했다.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기로 한 이행합의서 제3조도 우발적 군사충돌 방지가 핵심이다. 여기에 평화수역에서 시범적 남북 공동어로를 추진함으로써 남과 북의 어민들이 성큼 다가온 ‘평화, 새로운 미래’를 조만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평양선언 제1조 2항과 이행합의서 제1·5조에 언급된 남북군사공동위원회(군사공동위)는 기본합의서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남북 불가침을 규정한 기본합의서 2장 제14조는 “남과 북은 불가침의 이행과 보장을 위해 이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안에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운영한다”고 돼 있다. 군사공동위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선 “대규모 부대 이동과 군사연습의 통보 및 통제 문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문제, 군인사 교류 및 정보교환 문제, 대량살상무기와 공격 능력의 제거를 비롯한 단계적 군축 실현 문제, 검증 문제 등 군사적 신뢰 조성과 군축을 실현하기 위한 문제를 협의·추진”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이른바 운용적 군비통제를 넘어 본격적인 군축까지 아우른다는 뜻이다.

평양선언과 이행합의서에는 군사공동위 구성·운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향후 협의’에 맡겨놨다. 남북이 1992년 5월7일 체결한 ‘남북군사공동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참고할 만하다. 당시 남북은 군사공동위를 위원장 1명(차관급)과 부위원장 1명, 위원 5명으로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또 회의는 분기에 한 차례 여는 것을 원칙으로, 필요한 때 양쪽이 합의해 수시로 열 수 있도록 했다.

남북 경제협력과 관련한 평양선언 제2조는 대북제재란 ‘족쇄’가 걸려 있다. 남북이 제2조 2항에서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 우선 정상화, 서해경제공동특구 및 동해관광공동특구 조성 협의를 전제로 “조건이 마련되는 데 따라”란 단서를 붙인 것도 이 때문이다. 제3조가 규정한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개소와 제4조가 규정한 문화·예술·스포츠 교류와 10·4 선언, 3·1절 100주년 기념행사는 유엔 제재와 관련이 없어 무난히 추진될 전망이다.

전세계의 눈과 귀를 모은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된 제5조를 두고선 평양선언 발표 직후부터 논란이 불을 뿜었다. 보수 야당에선 “비핵화에 실질적 진전이 없는데, 군을 무장해제시킬 거냐”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번 정상회담으로 북이 약속한 비핵화 조치는 크게 두 가지다. 북한은 먼저 평북 철산군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 아래 영구적으로 폐기하고, 미국이 상응 조치를 하면, 평북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 등 추가 조치를 계속해나가겠다고 했다.

북이 동창리 엔진시험장·발사대 폐기에 유관국 전문가를 참관시키겠다고 밝힌 것은, 함북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때 전문가 없이 취재진만 불러서 한 것에 대한 안팎의 의구심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를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62년 원자력연구소 설치 이래 영변 핵시설은 북한 핵개발의 심장부로 통해왔다.

영변 핵시설 영구 폐쇄의 의미

영변 핵시설에서 가동 중인 흑연감속로의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얻는 플루토늄은 북한 핵무기의 원재료다. 북한은 자체 매장량이 많은 천연우라늄을 농축해 무기급 고농축우라늄(HEU)을 만드는 원심분리기도 영변 핵시설에 설치해 가동하고 있다. 북한은 2010년 11월 방북한 세계적인 핵물리학자 시그프리드 헤커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팀에 이 시설을 깜짝 공개했다. 북한이 ‘상응 조치’를 전제로 영변 핵시설 영구 폐쇄 카드를 꺼내든 것은, 미국을 향해 본격적인 비핵화 협상에 나설 준비가 끝났음을 새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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