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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법부는 ‘방탄 판사단’

원천봉쇄, 자기모순, 자가발전으로 이어진 사법 농단 영장 무더기 기각…

예견된 무죄?
등록 2018-10-20 08:14 수정 2020-05-02 19:29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10월15일 검찰청 포토라인에서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받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10월15일 검찰청 포토라인에서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받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진실과 거리가 먼 명백한 허위 보도로 30년 법관 생활을 불명예스럽게 마감했습니다. 이번 진상 조사를 통해 사실관계가 명백하게 규명돼 명예회복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법원이 자초한 사법 농단

‘대법관 0순위’로 꼽히다 끝내 대법원 입성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제는 여느 대법관보다 유명해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해 3월 대법원 진상조사위원회에 써낸 경위서다. 이탄희 판사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독선적 사법행정을 비판해온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대한 부당한 탄압을 확인한 뒤 행정처 근무를 거부한 사실이 알려져, 법원 내부 조사가 시작된 참이었다.

임 전 차장은 언론과 젊은 판사들이 제기한 의혹을 ‘허위’라고 단정했다. 세 차례의 법원 자체 조사와 검찰 수사가 없었다면, 그의 주장은 법원행정처 컴퓨터에 보존돼 두고두고 전수됐을 가능성이 크다. 임 전 차장의 말은 진실로, ‘사법 농단’은 ‘뜬소문’으로 정리됐을 것이다.

임 전 차장은 법원을 떠났지만, 그와 같은 주장은 오랜 기간 법원행정처와 고위 법관들 사이에서 지배적 정서로 자리했다. “섣부른 보도로 임 차장이 억울하게 됐다”는 ‘동정론’부터 “우리 법원이 그럴 리 없다”는 ‘자기부정’까지, 방식도 다양했다.

이때만 해도 물밑에 머물던 반발은 법원 자체 조사가 세 차례 진행되는 동안 끝내 수면으로 떠올랐다. 지난 1월 추가조사위원회(2차) 조사로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에서 재판 거래가 있었다는 실마리가 드러나자, 대법관들은 “청와대와 거래하지 않았다”는 집단성명을 냈다. 5월 특별조사단(3차)의 조사 결과 전방위적 재판 개입과 거래가 드러났는데도 “수사 촉구를 우려한다”(서울고법 부장판사), “합리적 근거 없는 재판 거래 의혹 제기를 깊이 우려한다”(전국 법원장), “재판 거래 의혹은 근거 없다”(대법관)고 천명했다.

세 차례 이뤄진 법원 자체 조사도 실망스러웠다는 게 법원 안팎의 공통된 평가다.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게 책임 전가(1차), 재판 거래 단서 제시(2차), 사법 농단을 임 전 차장 단독 행위로 정리(3차). 특히 3차 조사단은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조사는 시도하지도 않았고, 핵심적인 ‘재판 거래’ 사안은 면밀한 조사 없이 ‘죄가 안 된다’고 결론 내렸다. 조사 국면마다 ‘책임자’는 들쭉날쭉 바뀌었고, 의혹은 말끔히 해소되기는커녕 더 짙어졌다.

“사법 농단은 외압 때문에 생긴 게 아닙니다. 법원 내부의 독선과 아집에서 시작된 겁니다.”(한 법원의 단독판사)

영장 판사들의 ‘제집 지키기’

수사는 필연적으로, 또 불가역적으로 시작됐다.

지난 6월18일 검찰은 사법 농단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에 배당하며 수사의 닻을 올렸다. 이미 10건 넘는 고발장이 접수된 상태였고, 일선 판사들이 수십 차례 판사회의를 통해 “법원에 자정 능력이 없다”고 인정한 뒤였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수사 적극 협조’ 약속(6월15일)은 예정된 수사의 신호탄을 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수사 단초는 특별조사단 보고서에 일부 담겼고, 행정처의 임의제출도 조금씩 이뤄졌다. 통상의 수사라면 일사천리로 진행됐겠지만, 사법 농단 수사는 첫 구속영장 청구에만 100일 넘게 걸렸다. 최정예로 꼽히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를 총투입하고도 수사가 ‘만만디’(일의 진척이 느림)로 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 ‘일등공신’으로 꼽히는 것은 서울중앙지법의 깐깐한 영장 심사다. 영장판사들은 ‘재판 거래는 근거 없다’는 고위 법관들의 주문을 흡수했고, 강제 수사 초기인 압수수색 영장 심사 때부터 예단을 가감 없이 표출했다.

처음에는 ‘수사 원천봉쇄’에 가까웠다. 처음부터 전·현직 판사 30여 명의 압수수색 영장이 무더기로 기각됐다. 임종헌 전 차장 영장만 나왔다. 이미 3차 조사에서 사법 농단 ‘발원지’이자 ‘종착점’으로 정리된 터라, 법원 처지에서 영장을 내주기 덜 부담스러웠던 인물이다.

‘봉쇄’ 뒤에는 ‘자기모순’이 문제 됐다. 강제징용 재판 거래 카운터파트(다른 쪽 당사자)인 외교부 영장은 내주면서도 행정처 영장은 “일개 심의관 작성 문건에 따라 대법관이 재판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기각했다. 행정처 압수수색은 “임의제출 먼저 받으라”며 가로막더니 이후에는 “자료가 충분히 제출됐다”는 이유로 불허했다. 특히 ‘재판 거래’ 관련 법원행정처나 대법원 재판연구관실 영장은 단 한 차례도 내주지 않았다.

“검찰이 ‘안방’(행정처·재판연구관실)에 메스를 들이대는 일은 끝까지 막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 겁니다. 행정처나 재판연구관실 문이 열리고 그간 재판을 두고 주고받은 수많은 문건이 공개되는 순간, 방어막이 무너진다는 걸 잘 아는 거죠.”(서울 지역 한 판사)

수사가 진행될수록 법원의 논리는 ‘자가발전’했다. 사법 농단 영장 기각 사유를 보면, “임의수사·임의제출을 진행하지 않았다”(10차례), “주거 평온을 해칠 수 있다”(6차례), “행정처 문건이 재판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어렵다” “판사실 등 압수수색은 재판 본질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4차례) 등이 ‘단골’로 나왔다. 형사소송법의 압수수색 요건(‘필요한 때’ ‘사건과 관계 있는 것’)에 등장도 안 하는 내용이다. “이메일을 이용했을 테니 장소 압수수색은 필요 없다”며 범행 방식에 근거 없는 예단을 드러내거나 “판사실 압수수색은 신중해야 한다”며 수사 의미 자체를 부정하기도 했다.

“어느 시점부터는 영장 기각은 디폴트값(주어진 값)이고, 어떤 ‘창의적인’ 이유를 동원하는지가 관심사가 됐어요.”(한 판사 출신 변호사)

영장판사들의 ‘제 식구 감싸기’가 정점을 찍은 것은 지난 9월20일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선임재판연구관(재판연구관 보고서 유출 등 혐의)의 구속영장 기각이다. 허경호 영장판사는 3600여 자 기각문에서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수만 건으로 추정되는 증거물을 파기한 게 드러났는데도,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고도 했다. 또 ‘오해 방지용’이라며 기각문 전문을 법원 내부전산망에도 올렸다.

“영장심사는 유무죄를 가리는 본안 재판이 아닙니다. 판결문 수준의 영장기각문을 쓴 것 자체가, 이미 유무죄 판단을 드러낸 거죠. 다시 사법 농단 영장 청구도, 수사도 하지 말라는 시그널(신호)에 가깝습니다.”(영장 업무 경험이 있는 한 판사)

수사 개시 104일 만인 9월30일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첫 압수수색이 있었지만, 실속은 적었다. 자택은 ‘주거 평온을 침해할 가능성’을 이유로 제외됐고, 퇴임 뒤 사용한 차량만 허용됐다. 차한성·박병대 전 대법관 사무실도 열어줬지만, 이미 시기를 놓친 영장이었다. 신속성과 밀행성이 중요한 압수수색에서, 100여 일은 증거를 인멸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물밑 공유되는 ‘방어 논리’

“법원을 흔들지 마라.”

영장판사들이 성실히 영장을 기각하는 동안, 고위 법관을 중심으로 물밑에서는 방어 논리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표면적으로는 검찰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한 모양새였다. “검찰이 전방위적 수사로 법원을 흔들고 있다”거나 “검찰이 ‘꽃놀이패’를 쥐고 앞으로도 법원을 통제하려 한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영장판사들이 수사 초입부터 ‘별건 수사’를 영장 기각 사유로 내세운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이어 ‘무슨 죄가 되느냐’는 물음표가 뒤따랐다. ‘재판 개입’이 아니라 ‘정당한 재판 지휘’ ‘선배로서 조언’한 것에 불과하고, 재판 거래는 ‘우연히’ 동시에 일어난 일들을 짜깁기한 결과라는 것이다. 지난 10월12일 견책 징계를 받은 임성근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단적인 예다. 그는 2015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 시절 야구선수 오승환씨의 약식재판을 정식재판에 회부하지 못하도록 사법행정권을 휘두른 것으로 드러났다. 임 부장판사는 “어차피 벌금형밖에 선고될 수 없는 사안이었다”며 “유명 야구선수의 미국 진출을 막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후배 판사에게 ‘조언’했다며 대법원에 공개 항명했다.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방어 논리에 불과해요. 양 전 대법원장 시절 승진한 고위 법관들이 사법 농단 피의자들에게 ‘빙의’한 거죠. 비슷한 사법행정권 남용 행위도 했을 가능성이 크고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법원이 무너진다’는 조직 논리를 동원하고, 자기 행동은 ‘통상 업무’였다고 합리화하는 식이죠. 가장 손쉬운 방법은 검찰이라는 ‘외부의 적’에 대한 위기의식을 부추기는 겁니다. 이런 선동은, 생각보다 힘이 셉니다.”(지법의 한 부장판사)

‘손쉬운 방법’은 ‘인권 보호’라는 외피를 입었다. 김태규 울산지법 부장판사는 10월8일 법원 내부전산망에 글을 올려, 검찰에 ‘절제된 수사’를 주문했다.

“이번 수사가 검찰 조직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법원에 대한 우위를 점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잘못된 목적의식이나, 진실을 보기보다는 언론이나 여론에 휩싸인다거나, 또 아니면 보이지 않는 그 무슨 압력 같은 데 휘둘려 이뤄지는 수사는 결코 아니길 바란다.”

이어 10월16일에는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난데없이 “밤샘수사는 고문”이라며 밤샘수사 관행을 뜯어고치자고 제안했다. 자신의 고교·대학 동문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전날 검찰에 소환됐다가 새벽에 귀가한 직후 내놓은 주장이었다. ‘내로남불’이라는 따가운 반응이 나왔다. 이 글에는 “판사들에게 특정 재판에 대한 수사 통제를 엄격히 하라는 뜻으로 오해할까봐 우려된다”는 젊은 판사의 댓글이 달렸다.

“사법 농단 무죄판결이 나오면, 이들은 똘똘 뭉쳐 곧장 되치기에 나설 겁니다. 검찰은 물론, 수사 포문을 연 김명수 대법원장 책임론도 거세지겠죠. 법원이 정말 뒤흔들리는 건, 그때가 될 겁니다.”(한 부장판사)

“헌재 유권해석 필요하다” 탄핵론 솔솔
김명수 대법원장이 10월10일 대법원 국정감사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김명수 대법원장이 10월10일 대법원 국정감사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되치기’의 포석은 이미 쌓이고 있다.

10월5일 1심 법원에서는 중요한 무죄판결 세 건이 동시에 나왔다.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에서 ‘직권’의 범위를 엄격하게 해석한 판결들이다.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이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에게 다스의 미국 소송 검토를 지시한 것은 ‘직권’에 해당하지 않아 직권남용도 아니라는 서울중앙지법 판결을 두고 뒷말이 많다. 제왕적인 대통령 권한을 경직되게 해석했다는 것이다. 직권남용죄는 사법 농단의 주요 피의자들에게 적용될 것으로 예상되는 죄명이다. 법원이 ‘사법 농단’ 재판에 앞서 무죄 포석을 쌓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설사 1심에서 유의미한 판결이 나오더라도, ‘수사 촉구를 우려한다’는 집단성명을 내며 사법 농단을 부정한 고위 법관들이 포진한 서울고법에서 뒤집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공석과 사석에서 수사 자체가 잘못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법 농단’ 핵심 피의자에 대한 탄핵 논의가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법 처리는 불투명해지고, 징계는 ‘하세월’이다. 법관징계법은 최대 1년 정직을 규정하지만, 대법원은 수사 뒤로 징계 절차를 미루고 있다. 2011년 뇌물 혐의로 기소돼 정직 5개월 처분을 받은 뒤에도 7년간 법복을 입은 선재성 전 고법부장(현 변호사)의 사례도 ‘물징계’ 우려가 나오는 대목이다.

헌법은 국회의원 3분의 1 이상이 발의하고 과반이 찬성하면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법관을 탄핵 소추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법관 사찰, 재판 개입과 거래 등은 법관 독립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침해한 위헌 행위라는 게 대다수 판사와 법학자들이 입을 모으는 지점이다.

“지금은 책임을 물을 방법이 난망합니다. 헌법재판소에서 ‘사법 농단’이 위헌·위법이었다고 확인해주면 법원도 무죄 예단을 고수하진 못할 겁니다. 오히려 수사가 탄력 받는 측면도 있을 거고요. 법관이 스스로 법과 양심을 내팽개쳤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할 수도 있을 겁니다. 국민이 사법 농단 책임자에게 재판받는 ‘비극’도 막을 수 있겠죠.”(한 판사)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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