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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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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이란 분쟁의 한반도 나비효과

북한 문제를 발목 잡기도 하고 부드럽게 하기도 하는 중동 정세,

관리 모드 들어간 미-이란 관계는 북과의 협상 가능성 높일까
등록 2020-01-14 01:54 수정 2020-05-02 19:29
1월8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이란의 보복 미사일 공격과 관련한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1월8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이란의 보복 미사일 공격과 관련한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2020년 새해도 트럼프로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새해 벽두인 지난 1월3일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을 드론 공격으로 공개 암살하는 전례 없는 조처를 단행해 중동에 불을 질렀다. 2020년이 트럼프로 시작해 트럼프로 마감될 것이라는 예측은 있었지만 그가 중동에 전화를 댕기며 한 해를 시작할지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트럼프의 행보와 그에 맞춰 변주되는 미국 안팎의 상황은 한반도 정세에도 최대 변수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클린턴의 안타까운 2000년

애초 올해는 지난해 말 미국 하원에서 가결된 트럼프 탄핵이 상원에서 처리되는 것으로 시작을 예상했다. 상원에서 다수당이 공화당이어서 탄핵은 부결이 확실시된다. 탄핵에서 살아남은 트럼프는 11월 대선으로 질주해, 당선되든 낙선되든 2020년 한 해를 마감하는 최대 이벤트로 기록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트럼프는 솔레이마니 암살 단행으로 탄핵을 여론의 관심사 밖으로 밀어내버렸다. 탄핵 처리와 함께 예고됐던 미-중 무역분쟁 1단계 합의도 관심사 밖으로 밀려나 양국이 언제 합의를 발표할지 불투명해졌다. 미국과 국제 여론은 격화되는 미-이란 분쟁에 쏠려 있고, 미국을 비롯한 각국도 이 위기에 대처하는 데 외교력을 집중하고 있다.

과거 중동 위기의 격화는 한반도에도 부정적 영향을 줬다. 대표적인 것이 2000년 빌 클린턴 미 행정부와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시도 불발이다. 2000년 10월22일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했다. 그해 6·15 남북 정상회담에 이은 이 방문에서 그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방북해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뿐만 아니라 북-미 수교 등을 일괄타결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그러나 클린턴은 북한을 찾지 못했다. 그해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조지 부시 당선자 쪽이 반대한데다, 클린턴 자신도 북한을 방문하기는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다. 격화하는 중동 정세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 역대 정권이 추진해온 중동 평화협상의 결정판으로 1993년 9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체결한 오슬로 평화협정이 당시 휴지 조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협정은 팔레스타인에 독립국가 건설을 허용하는 대신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투쟁을 포기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그러나 2년 뒤인 95년 11월 협정의 주역이던 이츠하크 라빈 당시 이스라엘 총리가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당하며 협정은 파탄 나기 시작했다. 곧이은 96년 총선에서 강경 우파인 리쿠드당이 집권하고, 오슬로 평화협정을 부정하던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취임했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역에서 이스라엘군 철군은 지연되고 오히려 이스라엘 정착촌이 확대되다가,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중동 평화회담은 파국을 맞았다. 그해 9월 팔레스타인 성지인 알아크사 사원에 대한 아리엘 샤론 당시 리쿠드당 당수의 도발적 방문에 반발하며 팔레스타인의 2차 인티파다(인민 봉기)가 발발해 오슬로 평화협정은 사실상 파기되고 팔레스타인 분쟁은 다시 격화했다.

당시 북한을 방문해 무르익던 한반도 평화 구축의 대미를 장식해야 할 클린턴은 중동을 전전하며 임기 막판을 허비했다. 클린턴은 나중에 한국을 방문해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당시 자신이 북한을 방문해 북핵 문제를 풀어야 했으나 중동 정세 때문에 발목이 잡혔다고 후회했다.

솔레이마니의 죽음이 김정은에게 준 교훈

또 다른 사례가 조지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전쟁 감행 전에 있었던 ‘악의 축’ 사건이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의회 새해 국정연설에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정권들이 세계에서 가장 파괴적인 무기를 가지고 우리를 위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이라크, 이란, 북한이 포함된 ‘악의 축’이라는 불량 정권 명단을 제시했다. 이라크의 대량살상 무기 개발을 명분으로 개전하려는 부시 정권은 핵 개발에 관여하던 이란과 북한에 이라크를 병치시킨 것이다. 특히 이라크와 이란, 혹은 시리아를 ‘악의 축’으로 지목할 경우 이슬람권 국가만을 적대시한다는 여론을 의식해 북한을 ‘끼워팔기’로 넣었다.

북한은 미국에 극렬하게 반발하며 핵폭탄 제조를 위한 우라늄 농축 사실을 흘렸다. 이에 미국은 북한 공습을 시사하는 등 한반도 긴장은 극적으로 고조됐다. 북-미 핵 협상은 파탄이 났고 북한은 2006년 드디어 첫 핵실험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중동에서 위기 격화는 분명 미국의 대북 입장도 경화시키는 효과를 보인다. 또 미국이 외교력을 북한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태도 빚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이번 중동 위기는 당장 북-미 협상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까지 대외정책에서 보여준 예측 불가성과 밀리지 않겠다는 특유의 태도는 중동 위기 앞에서 북한에 양보 불가로 더욱 굳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솔레이마니 제거를 본 북한도 체제 보장이 확실하지 않고 양보를 요구하는 핵 협상보다는 핵 개발의 필요성에 더욱 매달릴 가능성이 크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때 국방부 관리였던 밴 잭슨은 (CNN)의 ‘가셈 솔레이마니의 죽음에서 김정은이 얻는 교훈’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 위원장은 언제라도 핵단추를 누를 수 있도록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을 더 크게 느낄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북한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나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의 비참한 최후가 핵 개발을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

북한은 미국에 도달할 수 있는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개발을 유지해야만, 미국이 고위 장성 ‘참수작전’이나 이른바 ‘코피 전략’(제한적 선제타격론) 등 북한에 군사적 옵션(수단)을 쓰기 힘들리라 생각할 것이라고 방송은 분석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북한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이나 핵실험 같은 위협을 억제하는 효과도 자아낼 것이라고 방송은 덧붙였다.

도 1월7일 “트럼프의 솔레이마니 살해 결정은 북한에 핵무기 개발 속도를 더욱 높여야 한다는 확신을 주는 동시에 미국 대통령이 ‘화염과 분노’를 이야기할 때 그것이 단순한 엄포만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줬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트럼프 대통령의 ‘미치광이 전략’이 상대를 압박하기 위한 수사만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남으로써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등을 재고하도록 하는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중동 위기는 북-미 협상에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서로에 대한 위협과 도발을 자제시키는 효과도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또 중동 위기는 장기적으로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서 타협을 강제하는 효과도 있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전쟁 실패로 대외정책이 파탄 나고 2006년 중간선거에서 참패하자 핵실험을 단행한 북한과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중동과 한반도에서 두 개의 위기를 장기적으로 끌고 가는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1월3일(현지시각)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이 타고 있던 차량이 이라크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미군의 드론 공격으로 불타고 있다. AP 연합뉴스

1월3일(현지시각)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이 타고 있던 차량이 이라크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미군의 드론 공격으로 불타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례적 하메네이의 행보 그리고 공개 보복

미-이란 분쟁 격화는 당분간 북-미 협상을 더욱 교착상태로 밀어넣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양쪽이 위기를 전면전이나 제한적 국지전까지 격화하지 않고 관리할 수 있다면,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필요성과 여유를 찾을지도 모른다.

북한과의 대화 재개와 협상 진전은 트럼프의 대선 가도에 필요한 외교적 업적일 뿐만 아니라 이란에도 협상 테이블에 나올 수 있는 신호가 되기 때문이다. 이미 이란은 미국과의 대결에서 수위를 조절하는 신중한 접근을 하고 있다.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1월6일 이례적으로 국가안보회의에 참석해 미국에 대한 보복은 이란군이 공개적으로 직접적이고 비례적으로 수행해야만 한다고 명령했다. 이란이 중동 전역의 친이란 대리세력을 내세워 작전을 벌이던 기존 전술 대신 이란 정규군이 직접 나서겠다는 의지다. 다음날 이란 최정예인 혁명수비대는 이라크 내 미군기지 2곳을 미사일로 공격하는 공개 보복을 선보였다.

그동안 중동 지역에서 친이란 무장세력들의 군사 활동이 자신들과 상관없다고 천명해온 이란으로서는 미국에 대한 보복이 당연히 이란 정규군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혁명수비대에 의한 이라크 내 미군기지 공격은 격상된 대미 보복 조처이기는 하나, 이란이 당연히 취할 수밖에 없는 예정된 과정이다. 더욱이 이란은 이 공격에서 미군이나 다른 다국적군 사망자를 발생시키지 않는 치밀하고 정교한 대응을 행사했다. 트럼프 역시 이란의 공격에 대해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좋다’는 트위터를 올리고, 대국민 성명을 다음날로 미루는 위기 관리를 선보였다. 일단 양쪽이 위기 관리를 하겠다는 신호이다.

미-이란 대결이 관리 모드로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 타결 필요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상원에서 탄핵이 부결돼 종결된다면 트럼프는 자신의 대선 가도에 필요한 소재들을 더욱 발굴하는 길로 나아갈 것이다.

무역분쟁 수습이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진다. 북미자유무역협정(나프타)을 대체하는 미-멕시코-캐나다 무역협정의 최종적인 승인과 최근 ‘가계약’을 맺은 미-중 무역협정의 타결이다. 미-중은 무역 문제를 놓고 앞으로도 계속 공방을 벌이겠으나, 트럼프는 이를 자신의 대선 가도에서 가장 큰 업적으로 내세울 것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무역협정 타결을 계기로 단기간이나마 서로의 위상을 인정하고, 양국의 공통 현안인 북핵과 이란 사태, 홍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손을 맞잡을 수 있을지 지켜보자.

트럼프와 시진핑은 현안 앞에서 손잡을까

트럼프의 남은 1년은 트럼프 지지로 표출된 중하류층의 분노와 트럼프를 저주하는 기성 엘리트의 반격 중 어느 쪽이 득세할지에 달렸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중하류층은 기존 엘리트들과 정치권이 세계화를 추진하며 그들의 이익만을 챙기면서, 이민자 등 소수 집단을 더 배려하는 정치적 위선으로 치장한다고 분노한다. 반면 미국의 기성 엘리트들은 미국의 국익과 패권은 여전히 동맹체제를 강화하고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다고 본다.

미-이란 대결이 관리 모드로 들어선다면, 트럼프가 자신이 내세웠던 중동에서 군사력 개입 축소를 다시 추진할 계기를 찾으려 할 것이다. 트럼프는 새해에도 중하류층의 분노에 정치적 주파수를 맞출 것이다. 그에 기대어 지지율이 오른다면, 국제 현안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거둬들이는 쪽으로 나갈지 지켜봐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미국 대선까지 남은 1년 동안 북핵 협상이 완전히 파탄 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한반도 평화 관리 측면에서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재선하든 낙선하든 그 이후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기 때문에 현재의 불씨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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