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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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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버려! 스쿠터를 타보자

등록 2006-09-15 15:00 수정 2020-05-02 19:24

누구나 쉽게 몰면서 스타일 뽐내기 좋은 경제적이고 민첩한 이동수단… 최악의 도심 인구밀도, 굴곡 많은 이 땅에서 바이크는 당연한 선택

▣ 유동훈 월간 기자

요즘 들어 스쿠터가 눈에 띄게 늘었다. 과거에 지나가는 바이크가 대부분 세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칙칙한 컬러의 배달용이었다면 지금은 확실히 발랄하고 깜찍한 컬러에 헬멧으로 코디한 스쿠터가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패션의 거리 압구정이나 신촌, 홍익대 앞을 가보면 확실히 그 밀집도는 더하다.

불과 몇 년 만의 변화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괴물이 휩쓸고 간 그때, 30만 대를 정점으로 상용 수요를 바탕에 두고 꾸준히 성장했던 바이크 시장은 3분의 1 수준으로 폭락한 뒤 힘겨운 발걸음을 하고 있었다. 백지에 가까운 이륜차 관련법과 제도, 고속도로 통행금지, 부실한 면허체계와 사후관리, 폭주족과 청소년 문제, 그리고 일반 운전자들의 따가운 눈초리. 어느 하나 업계에 호의적인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불과 2~3년 전부터 무지개색 그것들이 조금씩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초기 주인공은 패션 관련업 종사자들

스쿠터(scooter)는 ‘재빠르게 이동하다’ ‘민첩하게 움직이다’라는 뜻의 명사 스쿠트(scoot)에서 파생된 말이다. 즉, 재빠르게 이동하는 수단쯤으로 인식하면 마음 편하겠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스쿠터 하면 그저 뒤에 박스를 달고 있는 피자나 치킨 배달 오토바이, 혹은 다방 아가씨들이 ‘오봉’을 다리 밑에 놓고 타는 작은 탈것으로만 인식하지만 사실 스쿠터의 개념은 폭넓은 편이다.

보통 스쿠터라 하면 기어가 없어 쉽게 운전 가능하고, 바닥이 평평하고 가운데로 지나가는 프레임이 없어 쉽게 오르고 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치마 입은 여성도 탈 수 있고, 트렁크가 마련돼 있어 짐을 실을 수 있는 간편한 이동수단을 총칭한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스쿠터 ‘베스파’를 시작으로 단거리 이동수단으로 사랑받아온 스쿠터는 그 편리성과 경제성을 인정받아 꾸준히 발전·개량됐고 현재는 배기량도 50cc에서 650cc까지 이른다.

그래서 어떤 스쿠터는 시속 200km로 아우토반을 달릴 수도 있다. 예컨대 시티 커뮤터로서 좀더 편하고 빠르게 이동하기 위한 모터사이클의 폭넓은 하위 개념이 스쿠터라 할 수 있겠다.

스쿠터는 크기와 종류도 다양하고, 활용에 따라 성격도 다르다. 바이크(bike, 오토바이는 ‘오토+바이크’의 합성어로 일본에서 들어온 잘못된 말이다. 보통 모터사이클이나 바이크라고 한다)를 잘 못 다루는 여성들을 위해 바퀴가 세 개인 스쿠터가 있는 반면 기상에 관계없이 배달에 쓰일 수 있도록 지붕이 달린 모델, 헬멧을 쓰지 않도록 안전벨트가 마련된 모델, 장거리 여행에 적합하도록 넉넉한 트렁크와 편안한 시트가 장점인 모델, 그리고 스포츠성이 가미돼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 데 5초도 안 걸리는 모델 등 그 목적에 따라 배기량도 천차만별이다. 크기도 1m가 조금 넘는 것에서부터 거의 3m인 것이 있을 만큼 여러 가지다.

‘스쿠터 붐’ 초기의 주인공은 서울 동대문과 신촌을 중심으로 패션 관련업에 종사하는 친구들이었다. 인터넷 쇼핑몰이 저렴한 창업 아이템으로 부상하면서 끼 있는 젊은 친구들이 스쿠터를 이용해 동대문 골목을 돌아다니고, 스쿠터에 앉아 화보 아이템 촬영을 소화하며, 삼삼오오 모여 여행을 다니면서 그 수는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패션 스쿠터가 200만~300만원을 호가하는 수입품이었지만, 워낙 놀이도구와 개성의 표현에 목말라하던 이들이었다. 수백만원을 들여 자기만의 스쿠터로 꾸미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5천원이면 하루 종일 타도 충분할 경제성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갔다.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모르던 환경에서 친구 한 명, 두 명이 스쿠터를 타게 되면서 관심도도 계속 커져갔다. 게다가 값비싼 일본제 클래식 모델을 카피한 100만원 중반대의 값싼 중국제 스쿠터가 빠르게 공급되면서 스쿠터는 지금 ‘대학생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아이템’으로 올라섰다.

그 비싼 기름값이 아깝지 않은가

외국에서 보면 이것은 어쩌면 문화현상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당연한 일이다. 모터사이클이 이미 자동차와 함께 일상적인 교통수단으로 자리잡아 폭넓은 자동차 문화를 자랑하는 유럽에 이어 혼다, 가와사키, 야마하 등 전세계를 주름잡는 바이크 제조업체가 포진한 일본은 세계 2위의 단일 바이크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주차장이 있어야만 자동차를 살 수 있고, 엄청난 보험료와 주차비 등 높은 차량 유지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집에 차를 두고 일상적인 출퇴근에 스쿠터를 사용한다.

따라서 자동차는 주말에 여행을 떠나거나 장거리 이동에 쓰는 등 1년 내 주행거리가 굉장히 짧은 편이다. 이것은 비단 바이크 선진국이라 일컫는 일본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등 넓지 않은 국토를 가진 대부분의 국가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1년 평균 2만km를 주행하는 우리나라 자동차의 현실은 드넓은 땅덩어리를 자랑하는 미국과 캐나다도 넘어서는 수치다.

자전거를 타라고 하면서도 실제 자전거를 탈 수 없는 나라, 바이크는 배달이 아니면 돈 없거나 철없는 젊은이들의 장난감으로 치부하는 나라, 전세계에서 바이크 고속도로 통행이 불가능한 유일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10대 교통 후진국이다. 전세계 통틀어 최고의 유가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는 1ℓ 페트병 기름으로 고작 10km도 못 가는 현대 쏘나타가 베스트셀러다. 남한의 4배 크기인 일본은 베스트셀러 다섯 모델에 중형차는 한 대도 들기 힘들다. 유럽 역시 폴크스바겐 골프를 비롯해 소형차들이 주름잡는다. 완전 자유경쟁 체제의 전세계 최고 단일 시장 미국과 캐나다는 도요타 캠리, 혼다 어코드 등 우리나라랑 비슷하다. 근데 다들 알다시피 캐나다만 해도 남한 영토의 약 100배, 한반도의 45배 크기다. 옆집도 차 타고 가야 하는 곳이다.

가까운 아시아 국가를 봐도 우리나라 시장 형태는 기형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제조업, 반도체 및 전자 부품을 팔아 먹고사는, 우리나라와 거의 흡사한 경제구조를 가진 대만에는 2300만의 인구에 스쿠터가 무려 1천만 대다. 4인 가족 한 가구에 약 두 대의 스쿠터를 가진 셈이다. 인도와 중국에서 만든 스쿠터는 무섭게 국내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경제 사정이 넉넉지 않은 학생에게 자가용이 가진 이동의 자유로움과 대중교통의 경제성, 자신의 스타일에 맞춰 꾸밀 수 있는 패션성, 오픈카의 개방감을 넘어서는 스피드감과 해방감, 기계를 조작하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조종의 즐거움, 이 모든 것을 만족시켜주는 것은 역시나 바이크밖에 없다. 게다가 스쿠터는 바이크의 이 모든 장점에 넉넉한 트렁크 공간까지 갖추었으니 애인과 함께 여행이라도 떠날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스쿠터는 당연한 선택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비로소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에 산다면 스쿠터를 타지 않겠다

참, 마지막으로 스쿠터를 타지 않는 우리의 국민들에게 한마디. 내가 미국에 산다면 난 스쿠터를 타지 않겠다. 돌바닥 가득한 유럽에서도, 무질서한 중국에서도 난 스쿠터를 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단, 삼면이 바다로, 국토의 70%가 산으로 둘러싸인 나라, 사계절이 뚜렷하고 축복받은 자연이 있는 곳 대한민국에서 난 스쿠터를 탄다. 석유가 나지 않고, 최악의 도심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난 스쿠터를 탄다. 그것은 나의 적극적인 인생의 선택이자 논리적이고 당연한 계산의 결과다. ‘우리나라’는 스쿠터를 타라고 신이 만들어준 천국이다. 스쿠터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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