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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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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화된 영웅 맥아더 사각화된 주민 대학살

전쟁 스펙터클에 압도되고 가려진 인천상륙작전의 또 다른 이야기들
등록 2018-09-22 09:17 수정 2020-05-02 19:29
①스트러블 제독의 배를 타고 인천항 상륙지역에 침입 전 조사하는 맥아더 장군 등 군 수뇌부. 1950.9.15. R. L. Porter 촬영.

①스트러블 제독의 배를 타고 인천항 상륙지역에 침입 전 조사하는 맥아더 장군 등 군 수뇌부. 1950.9.15. R. L. Porter 촬영.

9월이다. 4월 제주, 5월 광주처럼 이때만 되면 인천에 한동안 시선이 머무른다. 시작은 인천 자유공원이다. 그곳에는 월미도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인천상륙작전 신화의 시작인 팔미도 등대에 부조로 새겨진 또 다른 맥아더 장군을 마주 보고 있는 걸까? 두 시선이 닿는 인천과 섬, 바다 곳곳에는 상륙작전과 ‘호국 영령’을 기억, 기념하는 전쟁 기념물들이 포진해 있다. 맥아더로 시작해서 맥아더로 끝나는 ‘냉전 경관’이 펼쳐져 있다. 상륙작전 재현 행사도 ‘전쟁 축제’로 매해 반복되고 있다. 전쟁을 재현하는 장소에서 안보를 관광상품으로 진열하고, 지역경제 활성화도 끼워 팔고 있으며, 심지어 평화라는 말도 내걸었다. 이 평화는 어떤 걸까? 반공 만화영화에 나오는 ‘세계 평화’ 같은 걸까?

한쪽선 구국 영웅, 한쪽선 분단 원흉

정전협정 65주년이던 지난 7월27일,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 방화사건이 있었다. ‘평화협정운동본부’ 회원 2명이 “점령군 우상 철거와 미군 추방”이라는 펼침막을 내걸고 저지른 행동이었다. 종전과 평화를 향한 힘든 여정이 남북과 미국 앞에 놓여 있는 이때, 맥아더 동상 방화는 어떤 사명감에서 저지른 행위일까? ‘동상’이니 왼쪽 발이 불에 그을린 정도로 그쳤지만,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불을 지른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란 무엇일까?

이 일이 있자 일각에선 맥아더 장군을 ‘화형’에 처한 ‘반미 종북’들을 증오 선동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걸 보니 2005년 맥아더 동상 철거를 둘러싼 격한 갈등과 충돌이 떠올랐다. 맥아더는 한쪽에선 “대한민국을 구하고 자유 진영을 수호한 영웅”이었지만, 다른 쪽에선 “민족 분단의 원흉이자 민간인 학살의 책임자”였다. 급기야 한 사설은 맥아더의 공과에 대한 사실관계 규명과 학문적 평가에 학계가 나서라는 주문을 하기도 했다. 그 후 맥아더는 신화가 아니라 학술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추가 어느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지지는 않았다. 인천상륙‘작전’에 한정한다면, 여전히 맥아더의 역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룬다.

새삼 지금 맥아더의 과오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글을 보태지는 않겠다. 신화화된 영웅과 성공한 군사작전 이면의 또 다른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차고 넘치는 사실들 가운데 같은 줄기에 있는 사실 조각의 일부를 그럴듯하게 엮어서 부정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상충되는 사실 조각들 속에서 긍정이냐 부정이냐를 떠나 비균질적이고 복잡한 면모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작업이 이 짧은 지면에서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보다 맥아더의 이야기(His-Story)에 압도되고 가려진 인천상륙작전에 얽힌 다른 이야기들(his-stories)이 난 무척 궁금하다. 상륙작전에 참여한 미군 병사나 한국군 해병대 병사의 이야기, 포로가 된 인민군의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무차별 폭격과 포격, 소탕전이 전개되었던 장소에서 살아남은 주민의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들을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라는 냉전적 대결 구도로 각색하지 않은 채 들려줄 수는 없을까?

민간인 피해 외면한 시선
②넉 대의 LST에서 하역된 사람과 장비. 해변에는 세 대의 LST가 있다. 1950.9.15. C. K. Rose 촬영.

②넉 대의 LST에서 하역된 사람과 장비. 해변에는 세 대의 LST가 있다. 1950.9.15. C. K. Rose 촬영.

③국군 병사들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때 포획된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후방의 포로수용소로 이송하기 전에 감시하고 있다. 1950.9.16.

③국군 병사들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때 포획된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후방의 포로수용소로 이송하기 전에 감시하고 있다. 1950.9.16.

이 이야기들을 인천상륙작전 전쟁 사진의 ‘시각과 사각’(카메라렌즈에 담거나 배제)을 통해 길어올리는 것은 어떨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이은 최대 상륙작전이었던 만큼 육군, 해군, 해병대, 공군 사진병들과 함께 민간인 전쟁사진가들이 참여했다. 주로 ‘우리’ 아군의 전쟁 스펙터클의 절정과 승리가 시각화되었지만, ‘그들’ 적군의 죽음과 포로 상태에도 시선이 머물렀다. 작전지역 안에 있었던 주거지역의 민간인, 피란민들은 어떻게 포착되었을까? 미군 사진병은 미군의 인도주의적인 대민구호 활동(치료, 식량 배급 등)을 어김없이 응시했지만, 무차별적인 대민 폭격·포격의 결과, 특히 민간인 인명 피해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비틀린 시선을 보여주었다. 거의 사각화된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포토저널(사진 잡지) 소속 민간인 전쟁사진가의 시각이 매우 흥미롭다. 전쟁 스펙터클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대규모 상륙작전의 대량 폭력이 민간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고 할퀴었는지 보여준다.

사진❶과 ❷는 맥아더 장군과 인천상륙작전을 포착하는 전형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맥아더가 지휘함 매킨리호에서 10군단장 아몬드 소장, 미극동사령부 군정국장 휘트니 준장 등과 인천에 대한 포격·폭격을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은 매우 유명하다. 그 후 그는 사진❶에서 보이듯 미7함대 스트러블 제독의 배를 타고 상륙작전이 전개된 월미도로 향했다. 이런 장면들은 연출된 것이다. 맥아더는 심리전과 선전 감각이 뛰어나 공식 석상뿐 아니라 전장에서도 거의 전속 사진병을 대동해 자신을 중심으로 기록사진을 남기도록 했다. 인천상륙작전은 71통신대 A중대 포터 중위가 중심이 되어 맥아더를 밀착 마크해 이 임무를 수행했다. 맥아더가 그의 사진 속 시각과 연출 장면에 만족해서였을까? 포터는 훈장을 받았고, 대위가 되었다. 사진❷는 인천 내항에 펼쳐진 갯벌을 통해 악명 높은 인천의 조수 간만 차를 극복하고 성공한 상륙작전을, 함정과 LST(상륙함정)에서 쏟아져나왔던 탱크, 야포, 트럭 등 각종 군수 장비와 보급품을 망원경으로 포착해 미군 무기체계의 우월성과 압도적인 보급 상태를 상징적으로 포착한다.

사진❸은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국군 해병대 병사들이 북한군 포로를 감시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북한군 포로를 경계 감시하면서도 해병대 병사들의 시선이 엇갈린 채 포로에게만 머무르고 있지 않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공산주의자 포로 앞의 제주 청년들
④해병대 탱크 승무원이 다음 목표물에 대한 지시를 받고 있다. 사진에는 북한군 부상병이 위생병을 기다리고 있다. 1950.9.15. Frank C. Kerr.

④해병대 탱크 승무원이 다음 목표물에 대한 지시를 받고 있다. 사진에는 북한군 부상병이 위생병을 기다리고 있다. 1950.9.15. Frank C. Kerr.

올해 4월 문재인 대통령이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 추념사’에서 언급한 내용이 떠오른다. 4·3 당시 ‘빨갱이’로 몰려 총상을 입고 가족을 잃었던 제주 청년들이 해병대에 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는 등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을 지켰다”는 문 대통령의 말에 난 울컥하고 말았다. 그랬다. 나이 어린 중학생들을 포함해 제주 청년들이 혈서를 써가며 해병대에 3, 4기로 지원했다. 그 수가 약 3천 명이었다. 언제든 ‘빨갱이’ 낙인이 찍힐까봐 전전긍긍하지 않고 자신도 살고 가족도 살리기 위해서였다. 인천상륙작전에서 서울 수복에 이르는 전투를 거듭하며 귀신 잡는 해병이 되어갔다. 사진❸의 해병대 병사들, 그러니까 제주 청년들은 자신이 포획한 공산주의자 포로를 앞에 두고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자신이 살아 있음에 안도하면서도 ‘빨갱이’를 많이 때려잡는 전과를 세우고 스스로를 국가에 입증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제대 후 몸이 성하든, 상하든 제주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입대 전에 분명 살아 있던 부모와 가족의 죽음을 마주한 경우가 있다 들었다. 제주도에서는 계속 ‘잔비 토벌’이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살해되었던 것이다. “내가 왜 군대 갔는데…”라는 피눈물 나는 울음소리가 터져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제주 청년들의 해병대 입대와 전쟁 기계가 되었던 이야기이자 이념이 만든 비극을 화해와 용서로 이겨낸 사례로만 소환해버렸다.

사진❹는 해병대 사진병 커 병장이 촬영한 것으로, ‘우리’ 작전 성공의 결과 적 인민군이 처하게 된 상황을 포착했다. 고작 1개 대대의 병력으로 월미도를 방어한 북한 인민군은 유엔군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무기력했다. 261척 함정과 수많은 폭격기의 대규모 작전 앞에 고작 4개 포대는 너무 초라했고, 미군과 국군 해병대의 상륙에 저항했던 간헐적인 저격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사진❹를 보면 미 해병대와 탱크는 다음 작전을 준비하고 있지만, 인민군 부상병들은 탱크 앞에 발가벗겨진 채 누워 있다. 이 사진을 보니 댄젤 상병이 촬영한 인민군 포로의 죽음을 포착한 사진이 연상된다. 포터 중위와 마찬가지로 맥아더 장군의 전속 사진병인 그는 한국전쟁에 가장 처음으로 참전한 사진병 가운데 한 명이며, 월미도 상륙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앞에서 병사들과 작전을 함께하며 촬영하기 때문에 아군과 적군의 죽음과 포로로 포획되는 상황을 사실적으로 포착하곤 했다. 그런 그가 벌거벗은 인민군 포로들의 죽음을 포착한 사진에서 다음과 같은 캡션을 달았다. “3명의 북한군 병사가 미군이 월미도에 상륙작전을 하는 동안 쓰러진 채 누워 있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 발가벗겨졌다가 부상이 심해 죽었을 수도 있고, 포로가 된 후 사살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댄젤은 “쓰러진 채 누워 있다”는 캡션 기록을 남겼다. 렌즈로는 포로의 죽음을 응시하면서도 캡션으로 그 죽음을 사각화하는 셈이다.

네이팜탄의 무차별적 민간인 폭격
⑤월미도 원주민이 통역을 통해 미 해병에게 지형을 말하고 있다. 1950.9.15.

⑤월미도 원주민이 통역을 통해 미 해병에게 지형을 말하고 있다. 1950.9.15.

⑥석 달 동안 두 번 해방되었을 때 인간성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 Burt Hardy 촬영.

⑥석 달 동안 두 번 해방되었을 때 인간성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 Burt Hardy 촬영.

사진❺와 ❻은 작전지역에 있던 주민들이 겪은 참상과 공포를 보여준다. 사진❺는 월미도 주민이 미 해병대 병사들에게 월미도의 지형을 설명해주는 것을 시각화하고 있지만, 정작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불타고 있는 민가였다. 월미도 상륙과 소탕전에 대한 사진이 꽤 많지만, 대부분 아군의 작전과 적군 포로만 피사체로 포착할 뿐, 주민과 마을의 피해는 철저히 사각화돼 있다.

월미도에는 9월10일부터 ‘무력화 작전’이 전개되었다. 14기 해병대 폭격기 편대가 북한 포병부대의 나무 엄폐물을 불태우기 위해 네이팜탄 폭격과 기총소사 공격을 가했다. 당시 항공공격 보고서에 따르면, 폭격기 편대의 임무는 120가구 600여 명의 주민이 살던 마을이 있는 월미도 동쪽 지역의 집중 폭격과 마을 전소였다. 30여 가구 중 상당수가 온 가족이 몰살당했고, 100여 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 이 사건은 폭격 작전의 ‘부수적 피해’가 아니라 명백하게 민간인 마을이 군사적 목표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무차별 파괴’였다. 월미도뿐 아니라 인천 시가지도 마찬가지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조사에 따르면,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항공 폭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네이팜탄을 이용한 무차별, 초토화 폭격과 기총소사로 ‘청소’하는 작전을 벌인 이유는 민간인 마을을 적의 보급지로, 민간인을 ‘흰옷으로 변장한 적군’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사진❻은 앞선 사진들과 달리 영국의 유명한 포토저널 의 전쟁사진가 하디가 촬영한 것이다. 네이팜탄의 피해를 받은 한 노인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고, 그 뒤를 한 소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따른다. 뒤의 아이를 안은 여성과 또 다른 여자아이가 두 손을 들고 걸어가고 있다. 그 뒤로 파괴된 채 연기가 올라오는 인천 시가지의 모습이 보인다. 미군 사진병이 촬영한 사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미군은 민간인들을 ‘우리’로 확실히 식별하지 못해 의심하고 무차별적으로 파괴한 ‘압도적 파괴자’지만, 동시에 부상을 치료하고 먹을 것을 주며 주거지를 마련해주는 ‘숭고한 구원자’이기도 했다.” 미군 사진병의 임무는 미군을 숭고한 구원자로 기록, 재현하는 것이지, 무차별 파괴자의 면모를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이에 반해 민간인 전쟁사진가는 마찬가지로 검열이 작동했지만, 사진병보다 자유로웠다. 특히 하디는 포로 상태와 민간인 피해를 휴머니즘의 시각으로 포착해 유엔군은 물론 소유주의 원성을 사곤 했다.

맥아더 주연의 전쟁 스펙터클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사진❶❷와 달리 그 뒤 사진 넉 장은 아군과 적군, 민간인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쟁으로 맞닥뜨리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았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가 많아질 때, 그 귀를 가진 ‘우리’가 많아질 때, 맥아더로 시작해 맥아더로 끝나는 인천과 섬, 바다의 냉전 경관을 평화 경관으로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상륙작전을 재현하는 전쟁 축제가 월미공원과 바다에서 볼거리로 진열되는 모습이 매우 불편하게 느껴지고, 왜 불편한지 이성적으로 스스로 납득하고 남을 설득할 수 있을 때, 자유 진영의 세계 평화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냉전분단 경계에 인접한 지역 주민들의 삶과 생활권에 진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2018년 4·27 남북 정상회담과 6·12 북-미 정상회담으로 정전에서 종전으로 가는 길이 현실화되고 있다. 그 길은 냉전에서 탈냉전 평화로, 분단에서 탈분단 통일로 가는 길로 연결돼 있다. 이 여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인천과 섬, 바다는 갈등과 증오, 적대가 있는 닫힌 냉전 공간에서 벗어나 교류와 협력이 있는 열린 평화 공간으로 전환될 것이다. 그런데 이 여정을 중앙(정부)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것인가? 이 여정은 순조롭지 않다. 갈등과 증오가 단박에 사라지고 해결되는 건 아닐 거다. 지역에서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네이팜탄의 무차별적 민간인 폭격

그 시작을 1957년 9월에 ‘만국공원’에서 ‘자유공원’으로 바뀐 이름을 원래대로 돌리고, 맥아더 장군 동상을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으로 이전하는 건 어떨까? 맥아더의 냉전적 자유와 정의의 가치 대신 조봉암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사상과 실천을 보여주는 장소와 상징을 시민과 함께 공론화해보는 건 어떨까? 인천시가 살던 땅에서 쫓겨난 월미도 원주민의 귀향 문제에 적극 나서 중앙정부와 함께 해결책을 세우는 건 어떨까? 전쟁 축제 대신 미군 폭격으로 인한 지역 피해자 위령제를 함께 하고, 더 나아가 분단 적대의 바다가 평화 교류의 바다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황해 평화축제를 기획하는 건 어떨까?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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