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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짓’이었더라도

대입 삼수를 통과해 이른 나의 숲
등록 2018-11-15 17:32 수정 2020-05-02 19:29
한겨레 김성광 기자

한겨레 김성광 기자



2005년 11월21일




30시간 뒤면 아주 재미있는 곳으로 간다. 죽도록 싫다면서 3년이란 시간을 목매달고 있는 곳이다.
이번엔 조금 이상하다. 즐거울 것 같다. 모르는 문제를 만나도 반가울 것 같다. 어려운 문제는 어려운 대로, 쉬운 문제는 쉬운 대로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한 문제, 한 문제 차근차근 읽고 예쁘게 풀어줄 거다.
매일 오전 여섯 시 반. 졸린 눈 비비며 일어나 골방 책상에 앉았다. 가을이 되면서 방바닥은 차가워졌지만, 한낮에 햇살이 들면 또 그런대로 따뜻했다. 종종 점심을 먹은 뒤 책상에 엎드려 낮잠을 잤다. 이따금 공부가 안 되면 제 분을 못 참고 책장에 책을 다 쏟아 던졌다. 어질러진 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집에 아무도 없으면 록음악을 크게 틀고 몸을 흔들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소중한 시간이었다. 내면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던 시간이다. 앞으로 내 삶의 태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자유와 책임을 잘 조절하며 살아가는 어른이. 지금의 나는 이미 어른이 된 친구들 뒷모습을 본다. 길목에 머쓱하게 앉아 있다. 유예다. 이제는 유예를 끝낼 시간. 친구들에게 웃으며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혼란한 표정을 지으며 엉뚱하게 화내지 않을 것 같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보다 더 혼란한 친구를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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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시간이 5분 남았는데 5문제가 남았다. ‘1분에 한 문제를 풀어야지’라며 답안지를 보는데 답안이 한 칸씩 밀렸다. “종료 5분 전. 늦으면 빵점 처리합니다.” 선생님이 말한다. ‘에이, 이거 꿈이죠? 나 수능 치고, 대학 졸업한 지가 언젠데’라며 배짱 한번 튕길 법한데, 한마디도 못하고 잠에서 깨면 식은땀이 흐른다.

수능 시험을 세 번 봤다. 공부를 못하는데 잘하고 싶어 했다. 유독 대학 문턱이 높았다. 그래서인지 아직 수능 시험 치는 악몽을 꾼다.

그때의 불안함은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무얼 공부했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 응원 전화를 해준 친구들, 친척들이 사준 찹쌀떡 정도만 생각이 난다. 그땐 인생의 전부였는데 이제는 기억도 잘 안 난다니. 이렇게 희미한 기억이 될 줄 그때 알았더라면 조금 덜 상처 받고, 주변 사람 덜 괴롭혔을까.

삼수를 했지만 목표로 했던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 실패가 한심한 건 아니었다. 내가 그때 배워야 했던 건 3등급을 받은 영어 과목이 아니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다른 목표를 찾아 다시 집중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뻘짓이 중요하다고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요. 다람쥐가 도토리를 땅에 묻은 걸 기억 못하는데, 다람쥐가 잊어버린 그 도토리가 나중에 참나무 숲이 된다고요.” 한때 자해 청소년이었던 은주(21·가명)가 말했다. “‘사는 게 무의미하고, 뻘짓 같다’고 푸념하니까 상담 선생님이 이렇게 말해줬는데 빵 터졌지 뭐예요.” 은주가 샐쭉 웃었다.

학생들이 11월15일 목요일 수능 시험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무수히 많은 도토리 중 한 알일 뿐. 언제 묻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때, 문득 돌아보면 울창한 참나무 숲이 펼쳐질 테니까.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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