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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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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장군이와 나란히 풍경을 보는 것

반려견과 몽블랑 트레킹 다녀온 ‘프로등산러’ 이수경씨
등록 2020-03-07 14:59 수정 2020-05-02 19:29
20㎏ 넘는 배낭을 멘 이수경씨가 배낭을 멘 장군이와 함께 몽블랑을 걷고 있다. 들녘 제공

20㎏ 넘는 배낭을 멘 이수경씨가 배낭을 멘 장군이와 함께 몽블랑을 걷고 있다. 들녘 제공

고3 소녀가 있었다.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밤이 깊어서야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다. 평범한 하루였던 어느 날 밤, 소녀는 어두운 마당에 홀로 서 있는 반려견 장군이를 본 순간, 갑자기 현관에 가방을 내던지고 장군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교복 치마를 입은 채 장군이와 집 앞 골목을 질주하며 뛰어놀았다. 답답한 가슴, 우울한 기분이 사라지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이후 소녀와 장군이는 매일 밤 숨이 찰 때까지 뜀박질하며 서로의 하루를 위로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끝나고 장군이와 본격적인 산책이 시작됐고, 산책은 산행으로, 산행은 여행으로 바뀌었고, 국내여행은 해외여행으로 바뀌었다. 도심을 떠나 자연으로 들어가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고 신나게 뛰어놀 때 보여주는 장군이의 표정은 그를 더 넓고 자유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했다. 장군이와 함께 국내에서만 100회 넘게 백패킹(야영 장비를 등에 지고 떠나는 여행)을 다녔고, 제주도 올레길 200㎞를 완주했다. 언젠가 해외여행을 간다면 장군이와 함께였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이 마침내 실현됐고, 2018년 170㎞에 이르는 ‘투르 드 몽블랑’(몽블랑 둘레길) 트레킹을 다녀왔다. 지난해에는 미국 서부 공원 트레킹도 성공했다. 여행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배낭 메고 등산하는 레트리버’ ‘20㎏에 육박하는 배낭을 메고 30㎏ 넘는 골든레트리버와 백패킹 여행을 다니는 여대생’으로 알려진 이수경(24)씨 이야기다.

서로가 지칠 때 끌어주고 밀어주고, 무서울 때 서로를 지켜주고, 추울 때 서로의 체온이 되어준 이들의 유럽 여행기가 최근 한 권의 책 (들녘 펴냄)로 묶여 나왔다. 책 제목과 관련해 저자 이수경씨는 “장군이와 유럽 여행을 다녀온 나의 순수한 소감 자체를 표현한 것”이라며 “반려견과의 여행 과정은 혼자 갈 때보다 더 힘들고 까다로울 수 있지만 같이 다니면 정말 함께 오길 잘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느낀 반려견 문화

장군이와 함께 여행해서 좋은 점은 무엇인가.
친한 친구나 가족이랑 여행 가서 종일 붙어 있으면 조금씩 싸울 일이 있다. 그런데 반려견과 가면 혼자가 아니고 싸울 일도 없다. 외롭지 않으면서도 혼자 여행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또 장군이와 함께라면 늦은 밤이나 낯선 곳에서도 무섭지 않고 용기가 생긴다.

유럽 여행을 장군이와 해서 특히 좋았던 점이 있을까.
반려견에 대한 인식과 시선이 가장 좋았다. 한국에선 반려견을 싫어하는 분들도 격하게 표현하고 좋아하는 분들도 너무 강하게 표현한다. 나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데 그런 반응을 자주 겪다보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유럽에선 개와 함께 지나가도 아무렇지 않게, 별 반응 없이 자연스럽게 봐준다.

언제부터 장군이랑 여행을 다녔나.
장군이는 내가 고등학생 때 언니가 데려온 강아지였다. 당시 장군이가 항상 마당에 있으니까 외롭고 심심해 보였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늦게 오면 짧게나마 장군이랑 ‘도둑산책’을 했다. 당시 나에겐 햇살 좋은 대낮에 장군이를 산책시켜주는 게 소원이었다. 수능이 끝난 뒤, 나는 오랜 염원이던 장군이와의 산책을 질리도록 했다. 대학 입학식 전까지 장군이랑 종일 걷는 게 하루 일과였다. 산책하다보니 집 근처 산이 보였고, 저기도 한번 가볼까 해서 산에 갔고, 이 산을 가니 저 산도 가면 어떨까 해서 여러 산을 다니게 됐다. 그 뒤 제주도 올레길을 걸었고, 이후 최소한의 캠핑용품을 짊어지고 야영까지 하게 됐다.

유럽 여행 뒤 미국 여행도 다녀왔다고 들었다.
지난해 여름방학 때 두 달간 다녀왔다. 원래는 장군이와 미국 서부 국립공원들을 가려고 했다. 막상 가보니, 미국 국립공원들은 반려견과 함께 입장은 가능한데 트레킹은 금지돼 있었다. 캠핑장에서 캠핑도 할 수 있고 포장도로에선 함께 걸을 수 있는데, 산길은 걸을 수 없었다. 곰 등 야생동물이 나타나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식당 등 공공장소에서도 반려견에 대한 제한이 많았다. 유럽과 많이 달랐다. 그래서 계획을 바꾸었다. 장군이 덕분에 미국 서부 오지 여행을 하고 왔다.

류우종 기자

류우종 기자

내가 한 모든 첫 경험에 장군이가

장군이와 함께 여행을 다니는 것에 부정적인 댓글을 다는 누리꾼도 있다. 가장 불편한 댓글은 무엇이었나.
‘개가 나이도 있는데 주인 때문에 고생하는 건 아니냐’ ‘개가 무슨 경치 좋은 걸 아나, 그냥 동네 산책이나 시켜주면 되지’ 등의 댓글이다. 우리가 함께해온 시간을 전혀 이해 못하는 댓글들이다. 함께하는 시간 속에 이제 우리는 호흡도 같아지고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개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사람보다 더 많은 걸 발견하고 기뻐할 줄 안다. 또한 성취를 느낄 줄 아는 동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9박10일 동안 168㎞ 몽블랑 둘레길을 함께 걸으면서 어느 때보다 뜨거운 전우애를 공유했다.

장군이에게 더 넓고 자유로운 세계를 보여주려는 마음이 크다. 장군이가 반려견 이상의 의미가 있어 보인다.
고3 끝날 무렵부터 장군이랑 산책을 다녔고, 20살 때 첫 여행으로 제주도 올레길을 함께 걸었다. 나의 첫 사회생활로 장군이와 두 달간 승마장 숙식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렇게 내가 한 모든 첫 경험에 장군이가 있었다. 내가 처음 뭔가를 결정하고 실행하는 순간은 모두 장군이와 함께하거나 장군이와 관련된 일이었기에 장군이의 의미가 크다. 첫 유럽 여행도 장군이와 함께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장군이와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볼 때, 장군이가 더없이 행복해 보일 때, 행복과 동시에 슬픔을 많이 느끼는 거 같다.
모든 게 영원하지 않고 지나가니까 그렇다. 장군이가 지금 8살이다. 사람 나이로 치면 환갑 정도다. 골든레트리버의 수명은 길지 않은 편이고, 순혈종이라서 유전병이 생기기 쉽다. 그러다보니 내가 장군이 체력관리에 강박관념을 갖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시키고 있어서 다행히 또래보다는 건강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늘 걱정이 된다. 유럽 여행을 가기 직전에 엄청 우울했다. 기쁘고 설레기보다 장군이와의 마지막 여행일 거 같은 기분에 우울했다. 막상 유럽을 가니 그런 걱정을 왜 했는지 싶을 정도로 좋았다. 다음해에 장군이가 건강하면 미국도 갈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1~2년 늦게 들어간다고 해서

남들이 ‘스펙 쌓기’에 바쁜 대학 시절에 장군이와 여행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냈다. 진로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없나.
전혀 불안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친한 친구들도 전문직 혹은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기 위해 오랫동안 공부하고 있다. 그들을 만나고 나면 한동안은 ‘어떡하지’ 하면서 내 인생과 미래가 걱정된다. (웃음) 취업과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내린 결론은, 일단 장군이가 건강한 동안은, 장군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회사를 1~2년 일찍 들어가나 늦게 들어가나 인생을 길게 보면 큰 차이가 없을 거 같다. 그래서 지금은 아르바이트로 돈을 바짝 벌어서 유럽을 또 가려고 생각 중이다. 이번에는 언제 돌아올지 결정하지 않고 떠나려 한다. 가는 비행기 티켓만 살 계획이다.

미래에 대한 근심보다 현재에 충실한 삶이 인상적이다.
원래 낙천적이다. 안 좋은 일도 금방 털어버리는 편이고, 그런 성격이 내 삶의 방식에 반영된 거 같다. 사실 스무 살 때 장군이랑 제주도를 갔을 때 나중에 유럽 여행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유럽 여행을 할 때는 내가 책을 쓰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인생은 앞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현재에 충실한 거 같다.

자연과 여행을 좋아하는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
산을 보면 산 위가 궁금하고, 바다를 보면 거기 있는 섬이 궁금하다. 그래서 등산도 하고 트레킹도 하고 카약도 탄다. 사람을 많이 좋아하지만, 나에겐 혼자 있는 시간도 많이 필요하다. 혼자 있고 싶을 때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가까운 공원이라도 가서 햇볕을 쬐면 훨씬 더 편안해진다.

인생의 좌우명이 있나.
한 번도 이게 내 좌우명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다. (웃음) 평소 ‘현재에 충실하게, 부지런하게 그리고 즐겁게 살자’고 다짐하며 사는 거 같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현재를 단단히 쌓고 기회가 왔을 때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으니까.

나만을 바라보는 털북숭이 친구와

언제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나.
스무 살에 장군이랑 제주도 올레길을 다녀왔을 때다. 사실상 첫 여행이었던 그때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가 모두 결정하고 책임지는 데서 엄청난 자유를 느꼈다. 내 삶의 방향키가 된 것 같다.

행복을 정의한다면.
평소 장군이에게 ‘이렇게 너랑 나란히 앉아서 풍경을 바라보는 게 행복이지’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나에게 행복이란 나만을 바라보는 털북숭이 친구와 함께 계절을 느끼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9303@naver.com
*지금까지 ‘김아리의 그럼에도 행복’ 연재 인터뷰를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행복의 의미와 과정을 배울 수 있게 인터뷰에 응해준 여러 분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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