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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토피아> 만든 소그노, “성적 대상화 없어야 재밌단다”

유튜브 예능 <뉴토피아> 대박 터뜨린 여성그룹 ‘소그노’ 인터뷰
등록 2020-05-16 07:39 수정 2020-05-21 01:36
여성 콘텐츠 유튜브 채널 ‘소그노’의 예능 프로그램 <뉴토피아> 제작진. 왼쪽부터 허휘수, 송채림, 이혜지, 권현지, 김은하. 박승화 기자

여성 콘텐츠 유튜브 채널 ‘소그노’의 예능 프로그램 <뉴토피아> 제작진. 왼쪽부터 허휘수, 송채림, 이혜지, 권현지, 김은하. 박승화 기자

“빻은 세상의 한 줄기 빛, 뉴토피아가 찾아온다.”

유튜브 10부작 웹예능 <뉴토피아> 예고편에 나오는 문구다. 쇼트커트를 한 20대 여성 8명이 나와 댄스 신고식, 축구경기, 초성게임 등을 한다. 기존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하던 것이지만 ‘○○녀’ ‘○○여신’ 등의 표현은 물론, 출연자의 애교를 요구하지 않고, 성차별 발언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요소 때문이었을까. 유튜브 채널 ‘소그노’ 개설 2년간 1만여 명을 맴돌던 구독자 수가 <뉴토피아>가 끝난 5월 현재 8만6천 명을 돌파했다. 직접 페미니즘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여성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고, 여성 출연자를 주변화하지 않고, 각각 살아 있는 캐릭터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예능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웹예능을 제작한 여성 미디어그룹 소그노가 생각한 인기 비결은 단순했다. “재미죠.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 요소일 뿐이고요. 각각의 캐릭터가 재미있고 겹치지 않아서 케미(조화)도 돋보였죠.”

8만6천 구독자 비결은 당근 ‘재미’

소그노의 허휘수(휘슬), 김은하(우나), 이혜지, 권현지, 송채림을 5월7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이탈리아어로 ‘꿈’을 뜻하는 소그노(sogno, 이탈리아어 표기는 ‘소뇨’)는 대학 선후배 여성 7명이 2017년 11월 모여 시작한 유튜브 채널이자 예비 사회적기업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라는 구호를 내걸고 여러 사회 이슈와 미디어 업계 성차별 등을 다룬 인터뷰 시리즈 <다큐모멘터리>, 현대판 전래동화 콩트 <허휘슬전>, 예능과 토크쇼를 넘나드는 <하와수의 랜덤박스>, 비혼 여성들을 위한 음주방송 <현생술집> 등을 꾸준히 내놨다. 그런 노하우가 집결된 것이 <뉴토피아>다. <뉴토피아>는 2월부터 매주 일요일 밤 9시에 한 회씩 공개했다. 휘슬·우나·현지 소그노 멤버 3명에다가 구독자 16만 명의 유명 유튜브 채널 <하말넘많>을 운영하는 강민지와 서솔, ‘지컨’ 등 유튜버 5명이 더 출연한다. 허휘수(대표)와 김은하가 주로 채널 출연자로 나서지만, 이혜지(법인이사)와 권현지도 종종 모습을 드러낸다. 다들 기획과 편집이 가능해 편집·촬영·기획·디자인은 프로그램에 따라 나눠 맡는다.

소그노는 같은 영화학회에서 웹시트콤을 찍은 것을 계기로 한데 모였다. “콘텐츠 제작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모여 소그노가 탄생했어요.”(김은하) 여성을 위한 예능을 기획한 건, 콘텐츠 제작 업계에 팽배한 남성 중심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예능PD 등을 준비하기도 했던 이들은 현재 프리랜서 형태로 콘텐츠를 만들거나 공연 기획 등을 한다. “나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이후, 짧은 옷을 입고 나오는 여성 댄서들을 공연 무대에 세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성 댄서는 짧은 옷을 입어야 하는 문화를 참을 수 없어서 관두고 나왔죠.”(허휘수)

성별 관습에 벗어나기 위해 <뉴토피아>에서는 남성만의 스포츠로 인식돼온 축구 경기 미션을 가져왔다. 스포츠 예능에서 여성 출연자를 ‘매니저’ ‘서포터’로 내세워왔던 것과는 정반대다. 여성들이 진지하게 축구 경기에 임하며 엄청난 승부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체육을 전공한 권현지의 능력도 자연스레 드러났다. 댄스교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존 예능에서 여성 출연자에게 요구됐던 섹시 댄스 대신 실제 댄서로 활동하는 허휘수의 춤 실력과 매력을 보여주며 관심을 모았다.

탈코르셋,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이상

이런 고정관념 비틀기는 <뉴토피아>뿐 아니라 소그노가 제작한 예능 콘텐츠 곳곳에 담겨 있다. <하와수의 랜덤박스> 1회를 보면, 서울 종로구 동묘시장에서 구제옷으로 ‘멋쟁이’ 되기라는 미션을 주고 김은하가 옷을 고른다. 옷가게 주인은 “얼굴이 예쁘니까 다 잘 어울릴 것”이라고 말하는데, 소그노는 그때 ‘예쁘다는 말이 칭찬이 아닌 이유’를 짚고 넘어간다.

인터뷰 시리즈 <다큐모멘터리>에선 짧은 머리의 여성 3명이 나와 택시를 탈 때마다 “여자였어?”라고 무례한 질문을 받은 경험에 관해 이야기하며 각자의 대처 방식을 나눈다. “알아서 뭐 하게요? 용산역 가주세요”라고 답하는 유형, 최대한 예의를 차려 이 질문이 얼마나 무례한지 설명하는 유형, “여잔지 남잔지 맞혀보세요”라고 답하는 유형까지 다양하다. 이외에 미디어의 ‘형님’ 문화, 탈코르셋(코르셋을 벗어난다는 뜻으로, 남을 의식해 억지로 꾸미지 않는다) 같은 주제를 다루며 남성 중심 문화에 돌직구를 날린다. 각 영상에 자기 경험담 등을 나누는 수백 개 댓글이 달렸다. “아직 탈코르셋을 못했지만 언젠가는 할 것”이라는 다짐도 있었다. 이들은 페미니즘과 탈코르셋의 속도와 방향은 개인 몫이라고 강조했다. “어릴 때부터 여성성을 입어본 적이 없어 ‘탈코’(탈코르셋)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개념을 알고 나니까 달라지더라고요. 예전엔 내가 이상해 보였는데, 이젠 나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이상하다고 생각해요.”(허휘수) “유튜브 댓글을 보면, 페미니스트라면 당연히 ‘탈코’를 해야 하고, ‘탈코를 못했다’며 자책하더라고요. 하지만 그건 각자 상황에 맞춰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이혜지)

<뉴토피아>는 시즌1이 끝나기도 전에 시즌2 제작을 약속해달라는 팬들도 생겼다. “오디오가 아쉽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시즌2를 한다면 (제작비를 확보해) 모든 출연진에게 마이크를 채우는 것, 이것만이라도 하고 싶어요.”(김은하)

지상파 못지않은 양질의 예능은 적은 제작비와 고작 8명뿐인 스태프로부터 나왔다. 유튜브 광고 수익은 모두 새 콘텐츠 제작비로 썼다. 아직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은 없다. ‘투잡’을 뛰며 여성을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명감을 느껴요.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만들 수 있어서 좋고요.”(이혜지) “명실상부 최고의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요.”(김은하)

이왕 이렇게 된 것, 골드 버튼?

쉬지 않고 달려온 소그노의 향후 계획과 꿈은 소박했다. 소그노 콘텐츠 제작만으로도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5월13일부터 채널 후원 기능인 멤버십 제도를 도입한 이유다. “멤버들이 기본급만이라도 가져갈 수 있도록 채널이 커졌으면 좋겠어요.”(이혜지) “여성가족부의 예비 사회적기업에 선정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사무실에 입주해 일하는데, 사무실 계약을 연장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권현지)

물론 100만 명 구독자를 가진 유튜브 채널에 주어지는 ‘골드 버튼’ 같은 원대한 포부도 있다. “알아봐주는 분이 많은데 이왕 이렇게 된 것, 온 세상이 저를 주목해줬으면 좋겠다.”(허휘수) “휘수는 세상이 본인을 주목하기 바라지만, 저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뭔가를 만들고 싶다.”(김은하) “그걸 만들면 세상이 출연자인 나를 주목할 것이다.”(허휘수) 티카타카(빠르게 주고받는 대화)와 웃음이 한동안 이어졌다. 당연한 것도 당연하지 않게 만들어줄 소그노의 다음 콘텐츠가 기대된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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