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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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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지 않는 축적의 시간 [이날치 뮤지션 장영규]

등록 2021-03-22 11:10 수정 2021-03-26 05:00

한 가지 주제로만 제작하는 특별한 잡지를 네 번째 만듭니다. 2020년 코로나 뉴노멀(제1315·1316호), <한겨레21>이 사랑한 작가 21명(제1326·1327호), 디지털성범죄 끝장 프로젝트 너머n(제1340호)에 이어 2021년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조금씩 바꾸고 있는 ‘체인저스 21명’을 펴냅니다. 지속가능한 세계, 평등한 세계, 자유로운 세계, 더불어 사는 세계를 꿈꾸며 체인저스들은 오늘도 한 걸음씩 내딛습니다. 때론 변하지 않는 사회를 보면서 분노하지만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고 그 작은 변화의 흐름에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한 이들은, 작지만 값진 승리를 향해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도 동행해볼까요? _편집자주

2002년 2월 기자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 기자회견이나 집회 현장의 첫 줄에 앉아 있던 머리 희끗희끗한 기자가 있었다. 경찰서 숙직실에서 서너 시간씩 눈 붙이며 취재할 때라 그 나이에도 이 직업을 놓지 않은 그가 존경스러웠다. 현장을 지키는 노기자로 은퇴하는 꿈을 품은 순간이었다. 그 머리 희끗희끗한 기자가 <시사저널> 편집국장 출신으로 <한겨레> 경찰기자로 현업에 복귀해 주목받았던 소설가 김훈(당시 54살)이다. 하지만 그는 1년여 만에 사표를 냈다. “늙음은 낡음인 것 같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기사를 쓸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쓰고는.

멋지게 늙어가는 음악인이 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도 늙지 않고 낡지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오랜 궁금증을 마침내 풀었다. 최근 가장 ‘핫’하고 ‘힙’하다는 평가를 받는 밴드 이날치를 이끄는 뮤지션 장영규(53)(존칭 생략)를 만나면서다. 1990년대 초반부터 연극·미술·무용 등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해온 그는 밴드 음악으로 독창성과 실험성을 인정받았고, 영화 <전우치> <타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도둑들> <암살> 등 90편 가까운 영화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그리고 2020년 ‘이날치 신드롬’을 일으켰다.

장영규는 30년간 고이지 않고 흘려보내는 축적의 시간을 보냈다. 끊임없이 변화하며 동시대와 호흡하고 열린 자세로 낯선 것을 받아들였다. 그의 주변에 탁월한 (그리고 젊은) 협업자가 몰려드는 이유다. 3월7일 경기도 파주시 송촌동 녹음실에서 만난 장영규가 말했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 활동하면서 멋지게 늙어가는 음악인들이 좋아 보였어요. 근데 국내에선 나이 들면 인정을 못 받는 분위기잖아요. 바로바로 도태되고. (오래) 살아남고 싶다는 꿈이 있었죠.”

적어도 지금 장영규는 꿈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초등학교 때 그룹 산울림과 퀸을 보고 친구들과 탬버린과 멜로디언으로 연주하는 “말도 안 되는 밴드”를 만들었던 그는, 중학교 때부터 “봐줄 만한 밴드”를 했지만 음악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 대학 전공(중국어)에 도통 흥미가 없어 미술을 전공하던 사촌누나를 통해 다양한 예술인을 접했다. 그때 세계적인 예술가로 발돋움한 이불(설치미술가)과 최정화(화가)와 어울렸고 안은미(현대무용가)를 만났다.

안은미는 1991년 어느 날 엘피(LP)판 여러 장을 휙 던져주며 장영규에게 “공연에 쓸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주문은 간단했다. “잘 섞어봐.” 당시 무용음악은 서울 중구 회현동 지하상가의 엘피 가게 아저씨가 대충 감각으로 기존 음악을 붙여서 만들었다. 장영규는 더빙할 수 있는 4채널 카세트(가정용 녹음기)가 있었기에 제대로 짜깁기할 수 있었다. 그는 섞을 재료를 찾으려고 월드뮤직, 일렉트로닉댄스뮤직(EDM), 클래식 등 전 장르를 뒤졌다. 그렇게 “음악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지금의 음악 활동에 큰 밑거름이 됐다”.

음악 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느낌입니다.

“미술 하는 사람들과 초반에 만났을 때, 그동안 내가 들어온 팝이나 대중가요 문법으로 음악을 만들면 재미없어했어요. 근데 뭔가 잘못해서 망가졌을 때 재밌어하는 거예요. 많이 혼란스러웠어요.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음악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지점이 전부가 아니고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죠. 다른 음악도 들어보고 다른 경험도 해보고 이렇게 저렇게 부딪히면서 많이 변할 수 있었어요.”

미술가들의 말을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잖아요.

“(내가) 모르니까요.”

아무것도 모를 때 다 아는 것처럼 굴기 쉽죠.

“정말 몰라서 그랬어요.(웃음)”

2004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건축비엔날레 개막식에서 공연한 어어부프로젝트. 장영규 제공

2004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건축비엔날레 개막식에서 공연한 어어부프로젝트. 장영규 제공

30대부터 50대까지 모인 혼성 밴드

장영규의 다음 행보는 잘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중반 보컬 겸 미술작가 백현진, 원일과 함께 한국형 아방가르드 음악의 상징이라 불리는 록밴드 ‘어어부 프로젝트’를 결성했다. 국악 하던 원일의 영향으로 국악인과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불교음악, 가면극음악, 궁중음악을 재해석한 국악 프로젝트 그룹 ‘비빙’을 만들었다. “주변에 전통음악 하는 친구가 많아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생겨 같이 프로젝트를 했어요. 한 7년 하다보니 나는 영화음악을 하면서 (경제)생활이 되지만, 다른 멤버들은 버티기가 힘들었어요.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떠나야 하는 친구들이 생겼어요. 팀이 깨졌고, 이런 식으로 음악을 하는 게 옳은가 생각했죠.”

무슨 일이든 보상이 없으면 꾸준히 하기 힘든 법. 그러나 국내에서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상업시장이 아이돌 그룹으로 틈 없이 꽉 짜인 탓이다. 좀더 열린 해외시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팝·록 시장은 (국내와) 규모가 달라요. 가능한 방법을 찾아보자 마음먹었고 그렇게 탄생한 게 ‘씽씽’이에요.”

경기민요 소리꾼 이희문이 보컬로 나선 록밴드 ‘씽씽’을 만들었다. 씽씽은 2017년 미국 공영라디오 의 인기 프로그램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에 한국 음악가로는 처음 출연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핫하면서도 힙한 음악가를 라이브 영상으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으로, 2020년 9월 방탄소년단(BTS)이 <다이너마이트>를 공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파격적인 무대 매너와 끓어오르는 에너지로 북미 시장을 강타했지만 씽씽은 얼마 뒤 해체됐다. 아쉬움이 짙어지는데 ‘희한하게 익숙하고 아름답게 낯선’( 라디오 소개) 이날치가 2019년 나타났다.

“우연이었어요.” 장영규의 말이다. 2018년 양정웅 연출가가 <수궁가>를 모티브로 한 음악극 <드라곤 킹>을 그에게 제안했는데 안은미의 2007년 공연에서 함께했던 소리꾼 안이호가 떠올랐다. 안이호가 원래 알고 지내던 여러 소리꾼이 그 음악극을 위해 모였다. 공연은 성공리에 끝났지만 아쉬웠다. 계속 발전시키고 싶었다. 2019년 초 서울 홍익대 앞 작은 클럽에서 극 없이 음악으로만 공연했다. 반응이 좋았다. 장영규가 베이스를 맡았고, 씽씽 출신 이철희가 드럼, ‘장기하와 얼굴들’ 출신 베이스 정중엽과 소리꾼 권송희·신유진·안이호·이나래가 뭉쳤다. 20대, 30대, 40대, 50대가 다 있는 7인조 혼성 밴드가 탄생했다. 이름은 조선 후기 여덟 명창 중 한 명인 이날치(본명 이경숙·1820~1892)에서 따왔다. “오랜 시간 이런저런 활동을 끊임없이 해왔는데 그 인연이 한번에 모인 거죠.”

스무 살을 넘나드는 밴드 멤버라니 놀랍네요.

“30대 때 해외에서 많이 활동했는데, 세대가 어우러져 작업하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독일의 현대무용가) 피나 바우슈 무용단의 경우 대학을 졸업한 20대부터 그보다 스무 살 많은 피나 바우슈 또래까지 함께 작업해요. 자연스러웠어요. 임신하면 그 상태로 춤추고, 출산하면 또 아이하고 출근하고. (다른 나이대랑 일하는 것을)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고 잘 안 하잖아요. 이번에 모인 7명은 그렇지 않았어요. 개의치 않고 잘 적응해서 친구처럼, 가족처럼 지내요.”

2010년 LIG아트홀 무대에서 독립영화+음악 프로젝트 <영화음악∞음악영화> 공연이 펼쳐졌다. 장영규 제공

2010년 LIG아트홀 무대에서 독립영화+음악 프로젝트 <영화음악∞음악영화> 공연이 펼쳐졌다. 장영규 제공

충돌과 혼란이 만든 <범 내려온다>

밴드를 구성한 뒤 출산하게 된 멤버(권송희)를 기다리며 이날치의 음반 발매와 활동 시기를 조율한 것도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2019년 첫 공연 때 관객으로 왔던 공연 관계자가 5월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단독 공연을 제안해 ‘들썩들썩 수궁가’를 선보였다.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흥겨운 춤이 결합한 네이버 온스테이지의 온라인 공연 <범 내려온다>도 했다. 2019년 9월이었다. 돌풍이 몰아쳤다. 반복되는 가사와 중독적인 멜로디로 누적 조회수가 1317만 회를 기록했다.

2020년 6월 정규 1집 《수궁가》가 나왔고 서울, 부산 등 전국 도시를 돌며 찍은 한국관광공사의 홍보 영상 시리즈 ‘필 더 리듬 오브 코리아’(Feel the Rhythm of Korea)에도 출연했다. 이 영상 시리즈는 국내를 넘어 국외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누적 조회수가 6억 건을 넘어섰다.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은 물론 예능, 라디오방송, 인터뷰가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휴대전화 등 광고도 네 개나 찍었다. 2021년 2월 열린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는 종합 분야 ‘올해의 음악인’상과 더불어 정규 1집 《수궁가》로 장르 분야 ‘최우수 크로스오버 음반’상과, 타이틀곡 <범 내려온다>로 ‘최우수 모던록 노래’상을 받았다.

이날치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대중음악 상업시장에서 살아남아 지속가능한 음악을 하는 것, 또한 팀원 개개인의 생활이 유지되도록 하는 거요. 씽씽이라는 밴드로 가능성을 봤으니까 이날치로 도전해보면 (생존) 환경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해요. 목표로 삼은 성공이 빠르게 다가오는 듯해요.”

너무 크게 떠서 지속가능성이 어려워질 수도 있잖아요.

“한 곡(<범 내려온다>)이 너무 떠버렸으니까 그럴 수 있죠.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일이 많으니까요. 지금은 화제의 인물 정도인데 관심이 사그라지겠죠. 이미지만이 아니라 음악이 같이 떠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결국 해외로 가야겠지요. 국내 대중음악에는 밴드가 존립하기 어려워요. <범 내려온다>를 많이들 얘기하지만 그렇다고 음원 순위에 진입하느냐, 그건 전혀 다른 얘기거든요.”

밴드를 왜 자꾸 만드나요.

“어떤 목표를 갖고 했던 일들은 아니에요. 씽씽이 끝났을 때 해외 마케팅 관계자들은 다음 밴드를 만들라고 했어요. 근데 싫다고 했죠. 우연히 다시 밴드를 만들 수 있는 상황으로 흘러간 거죠. 살아가는 과정에서 누가 나타나고 하다보니 재밌고 잘 맞으니까 팀을 만들고. 밴드를 계속하고 싶긴 해요.”

밴드 하면 뭐가 좋은가요.

“(곡을) 만드는 것 자체가 재밌어요.”

이날치의 음악은 리듬을 탈 수 있는 곡을 만들고 이에 어울리는 <수궁가> 대목을 얹는, 자르고 반복하는 방식으로 만든다. “(만든) 연주곡을 틀어놓고 소리꾼들에게 (<수궁가>의) 한 대목 한 대목을 불러보라고 해요.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수궁가>를 불렀으니까, 우리는 어떻게 다른 식으로 들려줄 수 있을지 그 충돌 지점을 만들죠. 그렇게 한바탕 다 대입해봐요.” 판소리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연구한 장영규가 만들어낸 창작 방식이다. “판소리는 타악기인 북 하나만으로 연주하고, 다른 성악들보다 덜 화성적이에요. 선율과 규칙도 없어요. 힙합의 랩과 닮았어요. (그래서) 리듬 위주로 재밌게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는 거죠.”

편곡이랑은 완전히 다르군요.

“만약 <범 내려온다>라는 대목을 찾아놓고 거기다 편곡하면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근데 내가 만들어놓은 4박자 리듬에 3박자인 <범 내려온다>를 가져오면 독특한 재미가 생겨요. 원래 들어올 수 없는데 밀어넣었으니까. 처음엔 소리꾼들이 리듬하고 어울릴 만한 대목을 자꾸만 불러줬어요. 그럼 그 길이 아니다라고 얘기하고 다른 지점을 찾죠.”

소리꾼에게 낯선 창작 방식이네요. 싫어하지 않나요.

“내가 예전 미술가들과 어울릴 때 그랬던 것처럼 혼란스러울 순 있죠. 내가 겪으면서 배웠던 것처럼 소리꾼들도 점점 재미를 느끼죠. 이제는 익숙한 대목을 들이밀지 않아요.(웃음)”

‘1일 1범’(하루 한 번 <범 내려온다> 영상을 보는 현상) 열풍을 일으킨 <범 내려온다>도 5분 정도 되는 곡에 ‘범 내려온다’라는 후렴구가 수십 번 나오니까 멤버들이 처음에 갸웃했다. 용왕의 병을 고치려 토끼의 간을 찾아 뭍으로 올라온 별주부가 호랑이를 만나 위기에 빠지는 대목인데, 원래 판소리에서는 1분30초 정도로 ‘범 내려온다’가 이렇게 반복되지 않는다. “이만큼 반복해야 한다고 했어요. 클럽에서 들으면서 춤출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거기에 시장이 있다고 본 거죠.” 국악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대중음악을 이날치는 지향한다.

2014년 필리핀 인디펜던스 라디오에 출연했다. 장영규 제공

2014년 필리핀 인디펜던스 라디오에 출연했다. 장영규 제공

내 취향은 아니지만 일단 믿고 ‘해보자’

이날치 열풍은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와의 협업이 한몫했다. 장영규는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를 2016년 처음 만났다. 엘지(LG)아트센터의 ‘댄스 엘라지’에서 심사를 맡았는데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가 눈에 들어왔다. 여러 방법으로 여러 명이 추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다른 무용단하고 확실히 다른 지점이 보였고, 갇힌 공연장보다 열린 공간에 더 잘 어울리는 춤이라고 생각했다.

이날치 작업을 하며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가 떠올랐다. 음원을 넘겼더니 재밌다고 같이해보자고 했다. 첫 협업 무대는 2019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시리즈 ‘위대한 유산, 오늘과 만나다’ 개막 공연(<첨벙첨벙 수궁가>). 그러나 연습이 없었다. “마침 그 팀이 바로 해외 장기 공연을 떠나야 했어요. 공연 당일 조금 일찍 만나 리허설을 했는데,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 보여주더라고요.”

사전 연습이 없었다니 불안하지 않았나요.

“아니요. 그 팀의 장점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요. 자기가 뭘 하는지 아는 잘하는 팀이니까 주문을 전혀 안 했어요. 제 취향이 아니더라도 일단 믿고 ‘해보자’고 해요.”

그런 열린 태도는 어떻게 생겼죠.

“영화음악을 만들면서요. 초기에는 음악적 욕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만들었는데, 그때 (영화)감독의 반응이 천차만별이에요. 같은 장면이라도 그 효과를 내는 음악은 수백 가지가 나올 수 있어요. 어떤 감독은 자기가 살면서 들어왔던 음악만 허용해요. 같은 효과를 내는데도 ‘아니야’라고 말하죠. 그러나 박찬욱 감독 같은 분은 자기가 모르는 음악이고 원하지 않은 스타일이라도 결과적으로 같은 역할을 하면 받아들여요. 자기 경험 안에 있는 것 이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작업할 때 과정도 결과도 좋았어요. 그런 게 내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어요.”

2017년 록밴드 ‘씽씽’은 미국 공영라디오 의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에 출연했다. 장영규 제공

2017년 록밴드 ‘씽씽’은 미국 공영라디오 의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에 출연했다. 장영규 제공

2020년 이날치 정규음반 《수궁가》 표지. 장영규 제공

2020년 이날치 정규음반 《수궁가》 표지. 장영규 제공

소진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장영규는 “내 취향은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기에 협업할 때 마음을 열어두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만났을 때 발생하는, 의도치 않은 낯선 지점이 매력적이에요. 그런 게 재밌어요.”

나이 들수록 낯선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잖아요.

“부딪히는 부분이 생겼을 때 끝까지 고집 피우지 않아요. 안 맞을 수 있다고 먼저 생각하고 시작해요. 예컨대 이날치 뮤직비디오를 ‘오래오 스튜디오’가 만들었는데요. 그 친구들은 20대 중반이에요. 그들이 가져온 그래픽 이미지가 정말 낯설었어요. 내가 그동안 봐왔거나 상상했던 거랑 완전히 다른 거예요.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모르는 게 많구나 느껴지더라고요. 그들 이야기가 맞으니까 받아들이죠. 반응도 좋았고요. 모르는 게 많고 재능이 없는 부분에선 도움을 받아야 해요. 서로 어울리는 팀을 만나면 굉장한 시너지가 나요.”

30년 넘게 음악을 했는데 모른다고요.

“잘 모르죠. 아직 한 게 별로 없고요. (그래서) 할 것도 되게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요. 할 수 있는 게 아직 많다고 생각하니까 긴 시간을 두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죠.”

장영규의 대답은 설명 같기도, 다짐 같기도 했다. 반짝반짝 작업했던 친구들이 20년, 30년이 지나 어떻게 이런 음악을 만들지 싶은 상황을 그는 자꾸 마주하게 된다. 20대에 잘했으니 50대에는 얼마나 더 잘할까 기대했는데 소진되는 사람을 보며, 나는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계속 나아가길 꿈꿨다.

“시간의 힘이 분명히 있는데 자꾸 배제하고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쉬워요. 그렇게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작게, 조금씩. 작은 것들의 변화가 더 중요할 수 있잖아요.”

영화든 음악이든 세대교체가 빨라 나이 든 사람이 없잖아요.

“현장에 가면 제가 제일 나이 많아요. 지금은 영화 제작자보다 많아요. 그래서 어른 대접을 해주려고 하죠. 낯설어요. 그래서 현장에 잘 안 가요.(웃음)”

오래 일하려면 견뎌내야 하잖아요.

“익숙해지려 노력하고요. 내 생각과 달리 50살이 한참 넘은 나이로 밖에서 바라보고, 그것은 어쩔 수 없으니까 이 나이에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지 싶죠.”

장영규의 증명은 2021년에도 계속된다. 이날치 2집 음반을 준비하고, 9월에는 북서울미술관에서 미술작가 임민욱과 전시 ‘타이틀매치’를 한다.

2015년 국립무용단에서 무용 연출(<완월>)에 이어 미술 전시도 하네요. 도전을 즐기나요.

“기회를 찾아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다가왔을 때는 ‘해볼 수 있다’ 싶으면 그냥 해요. 재밌겠다 정도로 출발해요. 내가 하는 게 다른 사람과 다를 수 있냐 없냐 정도가 기준이에요. 괴롭지만 자꾸 생각해보면 (차별점을 만들)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렇게요.”

글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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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규를 바꾼 것

사람과 공간
변화의 시간으로 장영규는 사람과 공간을 꼽았다. 20대 때 장영규는 다양한 사람들과 섞여 지냈다. 미술, 무용,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담한 시도를 하는 사람들과 만나 퍼포먼스를 했다. 그런 낯선 경험이 그의 실험성과 독창성의 밑바탕이 됐다. “완성되지 않은 사람들이 거칠게 만났지만 계속 부딪치면서 작업했어요. 경험을 쌓으면서 서로 원하는 걸 알 수 있고 장점도 파악해갔고요. 음악이 놀이였죠. 그때 만난 사람들이 큰 자산이 됐죠.”
그리고 30대 때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작업할 기회가 생겼다. “(현대무용가) 안은미랑 저랑 5년 정도 계속 불려다녔어요. 독일 학교에 두 달 머물면서 학생들과 음악과 안무를 하는 거죠. 한집에 살며 출퇴근하면서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것, 여행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몸으로 조금씩 조금씩 변화가 스며들었어요. 그냥 삶이 바뀌더라고요.”
에필로그
30살 문턱에서 영화를 하겠다고 선언한 남자와 나는 결혼했다. 당시 그는 대학생이었다. 내 월급으로 등록금과 생활비를 내는 빠듯한 살림인데 그는 졸업영화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하물며 단편영화 음악을 장영규에게 맡기겠다고 했다. 당시에도 장영규는 1년에 상업영화를 수편씩 작업하는 잘나가는 영화음악 감독이었다. 도대체 돈을 얼마나 줘야 할지, 캄캄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공짜라고 했다. “단편영화는 돈 안 받는데. 정말이야.” 15년 지난 그때 일을 물어봤다.
단편영화는 돈을 안 받고 음악을 만든다면서요.
“지금은 연락이 안 오는데 예전에 할 때 안 받았죠. 영화 작업에 총예산이 있고 그 예산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율이 있잖아요. 저는 그것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근데 단편영화는 (영화감독이 자비로 찍으니까) 마이너스죠. 그러니까 안 받는 거죠.”
돈도 못 받는데 단편영화 작업을 왜 하나요.
“어릴 때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여러 경험을 했고 그게 좋았어요. 행운이죠. 근데 영화, 연극, 음악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작업하고 영향을 주고받기가 쉽지 않아요. 자기들끼리만 놀죠. 서로 만날 기회가 많아졌으면 하니까 (단편영화 음악을) 부탁하면 거절할 수 없었어요. 지금은 그런 기회를 잡고 싶은, 다른 음악 하는 친구를 연결해줘요.”
30대의 장영규는 50대의 장영규만큼이나 멋있었다. 나는 70대의 장영규가 정말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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