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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공간] 숙종, 붕당정치를 ‘죽임의 정치’로 바꾸다

신사협정 깨뜨린 숙종의 ‘환국’ 정치, 공존이 승자독식으로
등록 2022-03-18 17:39 수정 2022-03-30 10:30
경희궁 숭정전 옆 빈터. 회상전과 융복전이 있던 자리에 방공호가 들어서 있다. 류우종 기자

경희궁 숭정전 옆 빈터. 회상전과 융복전이 있던 자리에 방공호가 들어서 있다. 류우종 기자

“윤휴가 ‘대비의 동정을 맡으라’고 한 말은 그 본심이 있는 곳이 이미 극도로 흉악하고 잘못됐다. 또 ‘역적 허견의 은밀한 사주를 받아 체찰부의 재설치를 찬성한 것은 오로지 역적 이남(복선군)의 처지를 위한 것’이라는 말이 고발자인 정원로의 진술에서 나왔다. (…) 그 잘못된 실상은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숙종실록> 1680년 5월15일 숙종의 발언)

“아! 송시열의 더할 수 없이 흉악함을 모두 들 수 없으나, 가장 중대한 것을 말하자면, 효종을 폄하했고, 현종을 속였으며, 세자(뒤의 경종)를 흔들었다. 진실로 이는 <춘추>에서 보면 왕을 업신여긴 것이며, 한나라에서 보면 반란을 조장한 것이다. (…) 임금을 잊고 당을 위해 죽는 무리를 무거운 법률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숙종실록> 1689년 5월 30일 숙종의 발언)

윤휴와 송시열에게 사약을 먹인 절대군주

숙종 이순(1661~1720)은 조선 역사에서 ‘절대군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왕과 사대부가 함께 다스렸던 조선에서 숙종만큼 신하를 쥐락펴락한 왕은 드물었다. 숙종은 1680년 남인의 최고 지도자이자 이론가인 윤휴에게 사약을 먹였다. 1689년엔 서인의 최고 지도자이자 자신과 할아버지(효종)의 스승인 송시열에게도 사약을 먹였다. 이는 개국 전후 태종 이방원이 정몽주와 정도전을 죽인 일에 비견할 만했다.

과연 숙종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구김이 없는 왕이었다.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아무 흠결이 없었다. 1661년 즉위 3년째인 현종 이연의 맏아들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정비인 명성왕후 김씨였다. 왕과 정비의 맏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조선의 왕은 숙종에 앞서 단종 정도였다. 조선의 왕 대부분은 왕의 맏아들이 아니었고, 어머니는 정비가 아니었다. 심지어 아버지가 왕이 아닌 경우도 있었고, 어머니가 궁녀인 경우도 있었다.

숙종은 뛰어난 정치력을 갖추고 있었다. 1674년 아버지 현종이 갑작스럽게 죽자 13살에 왕위에 올랐고 바로 친정(직접 통치)을 했다. 조선에서 10대에 즉위한 왕은 많았지만 대부분 할머니나 어머니의 수렴청정이나 고명대신의 섭정을 거쳤다. 성종, 명종, 선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이 그랬다. 그러나 타고난 왕인 숙종은 그 과정을 건너뛰었다.

숙종은 재위 기간도 46년으로 아들인 영조(52년) 다음으로 길었고, 업적도 많았다. 대표적 업적은 전후 복구 사업이었다. 숙종이 집권한 1674년은 병자호란(1636~1637)이 끝난 지 한 세대 뒤였다. 두 전쟁으로 무너진 국가를 다시 세우는 일이 시급했다. 쑥대밭이 된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숙종은 꾸준히 토지 측량(양전) 사업을 벌였고, 재위 기간에 모두 67만 결을 새로 확보했다. 또 대동법을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확대해 변경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시행했다.

병자호란 이후 청이 금지한 군사력 강화에도 나섰다. 금위영을 설치해 한성의 5군영 제도를 완성했다. 또 한양도성과 남한산성을 보수했고, 북한산성을 새로 쌓았다. 강화도에 50여 곳의 돈대(높은 보루)를 설치하고 성을 쌓아 요새로 만들었다. 세조 이후 버려진 폐4군을 회복했고, 압록강 주변도 개척했다. 청나라와의 영토분쟁 지역이던 백두산엔 정계비를 세웠다. 일본인이 출몰한 울릉도는 일본 정부와 교섭해 조선 영토임을 확인했다.

숙종의 어진으로 추정되는 그림. 1954년 부산 용두산 화재로 어진 대부분이 불탔다. 문화재청 제공

숙종의 어진으로 추정되는 그림. 1954년 부산 용두산 화재로 어진 대부분이 불탔다. 문화재청 제공

농업뿐이던 조선의 산업을 상업까지 확대

상업 활동도 활발해졌다. 인조 때 발행됐다가 사용이 중지된 상평통보를 다시 발행해 전국에 유통했다. 상평통보의 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은과 연동하는 은본위제를 채택했다. 농업뿐이던 조선의 산업이 상업까지 확대됐다. 인문학 연구자인 강명관 선생은 “이 시기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중개무역도 활발히 벌였다. 청나라에서 비단실 같은 사치품을 수입해 2배 이상의 가격으로 일본에 팔았다. 일본에서 막대한 양의 은이 들어와 정부 재정이 튼튼해졌다”고 말했다.

숙종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국가를 통합하기 위해 화해 조처도 시행했다. 태종 이방원에게 희생된 이방번, 이방석 형제를 각각 무안대군, 의안대군으로 지위를 회복시켰다. 이방원의 형으로 2대 왕에 올랐으나 묘호를 받지 못한 이방과에게 ‘정종’이란 묘호를 올렸다. 세조 이유에 의해 폐위된 노산군 이홍위에겐 ‘단종’이란 묘호를 올렸다. 그와 함께 사육신도 복권시켰다.

그러나 숙종의 환국(정권교체)정치와 관련해선 비판이 적잖다. 숙종은 집권 직후 서인을 몰아낸 일까지 포함해 모두 네 차례 ‘환국’을 일으켰다. 환국정치는 기본적으로 왕이 붕당(친구당)정치에 적극 개입한 일이었다. 왕의 붕당정치 개입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환국정치는 이전의 붕당정치와 비교해 극단적이었다. 이긴 쪽은 권력을 독점하고 진 쪽은 목숨을 내놔야 했다. 그전에 붕당들이 공존하면서 주도권을 두고 경쟁한 것과는 딴판이었다.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역사학)는 “조선 역사상 붕당 사이의 다툼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숙종은 붕당 사이의 극단적 싸움을 막지 않고 오히려 부추기거나 활용했다. 숙종 시기에 붕당정치의 신사협정이 깨졌다”고 말했다.

폐단을 알면서도 왜 환국정치를 했을까?

홍순민 명지대 교수(역사학)도 “숙종 이전엔 붕당이 공존하면서 견제와 균형을 이뤘다. 그러나 숙종의 환국정치로 한쪽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균형이 깨졌다. 왕이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 선수로 뛰어든 일은 이전과 크게 다른 점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숙종이 이런 문제점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네 차례의 환국정치를 벌인 숙종은 1698년 1월19일 이렇게 말했다. “아! 국가가 불행해 동인-서인을 표방한 지 100년이 됐는데, 갈수록 더 고질이 되니 한탄스럽다. 우리나라는 좁고 작은데다 문벌을 숭상해 인재를 등용하는 길이 넓지 못한데, 조정에서 한쪽이 등용되면 한쪽이 도태돼 나라의 절반을 차지하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적체된다. 이 폐단을 제거하지 않고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숙종은 문제점을 잘 알면서도 왜 극단적인 환국정치를 했을까?

숙종은 경덕궁(현재 경희궁) 회상전에서 태어났고 바로 옆 융복전에서 죽었다. 태어난 경희궁을 고향 집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재위 기간에 여러 차례 경희궁에 와서 지냈다. 그러나 경희궁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 때 대부분 건물이 헐려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숙종이 태어난 회상전과 죽은 융복전도 사라졌다. 현재 정전인 숭정전의 동쪽, 방공호와 녹지가 있는 곳이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김규원의 역사 속 공간: 역사와 정치, 공간에 관심이 많은 김규원 선임기자가 옛 서울의 공간에서 오늘의 의미를 찾아봅니다. 

참고 문헌
이성무, <조선왕조사>, 수막새, 2011
이한우, <숙종, 조선의 지존으로 서다>, 해냄, 2007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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