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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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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70%는 기회주의자들”

등록 2006-09-12 15:00 수정 2020-05-02 19:24

대통령 ‘경제 가정교사’ 유종일 교수는 왜 참여정부에 직격탄 날렸나 … 한미 FTA까지 제기하는 걸 보고 나라 망하겠다는 절박한 심정 느껴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참여정부는 성장과 분배 모두에서 실패했다’는 비판이 그다지 새삼스럽게 들리지 않을지 몰라도 발언의 당사자가 유종일(48)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라면 얘기가 다르다. 유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 후보 시절의 ‘경제 가정교사’로 불렸던 인물이다.

노 대통령 참모 출신들의 참여정부 정책 비판이 이어지는 가운데에도 유 교수는 줄곧 침묵을 지켜온 터였다. 그러던 유 교수가 가을호에 실린 ‘참여정부의 좌파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란 글에서 “(참여정부가) 분배와 개혁의 약속을 저버리고 성장중심주의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급선회했다”고 혹평했다.

그 동안 원고 청탁은 물론, 인터뷰 요청마저 번번이 거절하던 태도를 바꾼 게 궁금해 다시 요청해 이뤄진 인터뷰에서 유 교수는 “‘대연정’에 이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가 제기돼 잘못하면 나라가 망가진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유 교수는 참여정부의 지지층 붕괴를 초래한 개혁 실패의 요인으로 집권세력의 무능을 꼽고, 특히 열린우리당의 모호한 정체성을 비중 있게 거론했다. 열린우리당에 대해선 ‘포말정당’ ‘잡탕정당’이란 표현을 써가며 애초부터 방향성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이번 인터뷰는 9월5일 서울 청량리2동 KDI국제정책대학원 연구실에서 이뤄졌다.

대연정, 대북송금 특검과 유사한 발상

에 쓴 것처럼 (참여정부에 대해) 이렇게 정색하고 나선 걸 거의 보지 못했다. (은 참여정부 경제정책과 관련해 몇 차례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유 교수는 거절했다. 노무현 정부 탄생에 일조한 처지에 대놓고 비판하는 게 부담스러운 듯했다.)

“(노무현) 정권이 가진 사회구조적 한계 때문에 결국은 기대와 너무나 다른 데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걸 일찍 간파했다.” 그렇다면 좀더 일찍 비판의 칼날을 세웠어야 하지 않을까? “바뀌었으면 하는 기대감도 있었고, (대통령과) 만나 얘기도 했지만 굉장히 비관적이었다. (정권 초기) 동북아위에서 일해달라고 하도 간곡히 얘기해서 (위원으로) 참여하다가 1년도 안 돼 그만둬버렸다. 이건 도저히 일할 수 있는 데가 아니고, 통치 스타일과 인사 과정의 의사결정 방식을 보고…. 나중에 (대통령) 탄핵 때문에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는데, 그 이전에 다 포기하고 외국으로 나갔다(유 교수는 참여정부 출범 이듬해인 2004년 안식년 휴가 기간에 중국 베이징대와 미국 캘리포니아대의 초빙 교수로 강의했다).”

유 교수는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자제해온 배경에 대해 “한자리 못하고 소외돼 ‘삐져서 그런다’는 식으로 비쳐질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본격적인 발언에 나서기로 마음먹은 것은 ‘대연정’ 얘기가 나오면서부터였다고 했다.

“대연정 제안이 나온 다음, 이제 ‘글 쓸 때가 됐다’ ‘갈 데까지 갔다’고 생각했다. 대연정이란 게 ‘대북송금 특검제’ 수용과 유사한 발상이다. 영남 기반을 만드는 게 중요하지, 이념적 정체성은 안중에 없다는 얘기 아니냐. 한나라당과의 차이가 뭐냐고 그랬지 않나. 그래서 이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12월호(2005)에 ‘양극화’를 주제로 글을 먼저 썼다. 에 글을 쓴 건 개인적 사정과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니 한-미 FTA 문제가 제기됐다. 경제정책상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하자는 거다. 이건 되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나라가 망가진다는, 그런 절박한 심정에서 미력이나마 본격적으로 제기할 생각을 한 것이다.”

한미 FTA를 그렇게 심각한 사안으로 여긴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게 한-미 관계를 더 악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좀 뜻밖으로 들린다.
“약값, 금융, 자동차 이렇게 구체적인 분야로 들어가다 보면 제약업계 등 각계의 ‘자기 이익’이 침해되는 걸 점점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막연히 ‘미국과 잘 지내야지 좋은 것 아니냐’고 했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다. 처음엔 농민과 영화인들만 그렇게 느꼈는데….”

한미 FTA에서 우리가 얻을 건 없다

그렇지만 개방을 해야 먹고사는 경제 구조라는 인식이 득세하고 있지 않은가?
“한-미 FTA에서 미국 쪽은 얻어갈 게 많다. 쇠고기·쌀·콩 같은 농산물을 더 팔든, 영화를 더 많이 팔든 구체적으로 이익을 갖고 간다. 지적재산권 연장으로 로열티(사용료)도 많이 받아갈 거고….

그런데 한국 입장에선 눈을 씻고 찾아봐도 (추가로 얻을 게) 거의 없다. 대표적인 수출품인 자동차를 보자. 이미 (미국) 현지에서 생산을 하고 있지, 외제차가 더 들어와 내수시장을 더 내주는 문제도 있고, 관세율은 (지금도) 어차피 낮다.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같은 미국 쪽의 무역구제 조치나 섬유 원산지 규정이 달라질 가능성도 없다. 교역 확대를 통해 (한국이) 얻을 게 대단히 적다. 관변 연구단체마저 대미 수입 증가가 훨씬 많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유 교수는 “이렇게 협상 결과의 비대칭성 때문에 미국이 악랄하게 뺏어가려고 한다는 반미 감정이 강화될 것”으로 진단했다. “반대 여론 때문에 협상이 결렬될 수도 있고, 타결되더라도 수용 불가능한 내용이라면 6·10 항쟁(1987) 못지은 반대 투쟁이 일어날 거다. 그렇게 되면 국회를 통과하기 어렵고 한-미 관계의 상처가 커진다고 본다.”

주류(보수) 언론이 한-미 FTA 찬성 여론을 주도하는 것을 감안할 때 반미 감정이 확산될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또 한나라당의 정책 방향과 맞아 보이는 FTA 추진을 열린우리당 쪽에서 먼저 내놓은 것으로 보아 국회 통과가 불투명하다는 관측은 납득하기 어렵다.

“벌써 여론은 반반 아니냐. 아니, 반대 여론이 절반을 넘지. 잠잠하면 찬성 여론이 슬슬 올라가겠지만, 협상이 진행되면서 갈등이 불거지면 다르다. ‘효순·미선 사건’(2002) 때처럼 잠재된 반미 감정을 확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리고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앞장서거나 총대를 메지 않는다. 반대 여론이 많은 상태에서 왜 앞장을 서겠나. 그게 또 (한나라당의) 공식 포지션(방침)이기도 하다. 열린우리당이 앞장서야 할 텐데, 그 당은 갈라질 거다. 대통령선거 정국이 가까워지면서 열린우리당의 다수는 청와대로부터 필연적으로 멀어질 거다. 그 과정에서 협상 결과에 문제가 많다는 것으로 드러나면 다수가 FTA에 반대하는 걸 무시할 수 없게 된다. 반대 여론이 절반을 넘으면, (의원들도)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다. 대선주자들도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 다행히 협상 결과에서 우려하는 독소 조항이 빠지고, 충격이 덜한 ‘제한적인 FTA’로 타결됐을 경우엔 큰 문제는 없겠지만….”

(한미 FTA) 협상은 어떻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하는가?

“반대 운동의 힘에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미 많이 달라져 있다. 지금도 정부는 서두르고 있지만, 국내의 큰 저항 때문에 함부로 협상하다간 안 된다는 걸 한국 정부도, 미국 정부도 느끼고 있다. 협상 결과는 상당히 가변적이다. 협상단의 전략과 태도에 상당 부분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 뒤에는 국내 여론이 있다. 그게 크다. 그럼에도 결국 미국의 요구가 상당히 관철되는 타결안이 최종적으로 나올 것으로 본다.”

비전2030? 하나 마나 한 짓

노 대통령이 왜 한미 FTA를 추진했을까, 하는 의문은 진작부터 제기됐는데 아직도 시원하게 풀리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 추측은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뭐 하나 이뤄놓은 게 없다는 것 때문 아니었을까? 정권 임기가 다 끝나가는데 ‘비전 2030’ 나오고…. 한 게 없으니 큰 건을 하나 해야겠다는 게 심리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기왕 말 나온 김에 ‘비전 2030’(8월30일 발표)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발전 단계에 따라 물적 자본의 축적을 통한 성장에서 혁신 주도형 성장으로 가야 한다는 방향은 맞다. 그런데 한심한 것은 애초부터 방향은 다 있었다는 점이다. 이제 정책을 추진해야지, 다 끝나가는 마당에 무슨 비전을 만드나. 더 황당한 건 지금도 실행계획이 없다는 사실이다. 혁신주도형 성장을 이루고 복지 정책을 추진하려면, 세금을 언제부터 올린다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다. 하나 마나 한 짓을 하는 거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나락에 빠진 게 외부 환경 탓이라 보는가, 개혁 주체 세력의 힘이 약해서라고 보나?
“정량적으로 이게 몇%이고 저건 몇%라고 할 성질은 아니고, 크게 보아 구조적인 문제라고 본다.”

누가 집권을 했더라도 개혁은 힘든 것이었다는 얘기인가?
“그런 의미가 아니고…. 잘 준비돼 있고 ‘괜찮은’ 정당이 뒷받침되고 있었으면, ‘괜찮은’ 사람들이 (개혁을 추진)했으면 많은 진전을 이뤘을 걸로 본다. 개혁을 이루기가 구조적으로 쉽지 않은 데 반해 집권세력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대통령의 퀄리티(질), 참모들….”

유 교수는 이 대목에서 험악한 말로 열린우리당을 혹평했다. “열린우리당 탄생 때도 내가 대놓고 그랬다. 또 하나의 ‘포말정당’이고 얼마 못 가 깨진다고. 왜? 정체성이 없다. 선거를 위해 급조된 정당이다. 어느 방향으로 나라를 끌고 간다는 게 없는 ‘잡탕정당’이다. 결국은 또 권력자를 매개로 형성된 포말정당에 불과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열린우리당 같은 당이 정권을 잡으면 개혁 못한다. 5·31 지방선거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음 나온 얘기라는 게 ‘부동산세’ 완화였다. 완전 ‘바보’들이다. 자기 지지 베이스(기반)가 무슨 생각을 하고 뭘 느끼는지 전혀 모른다. ‘상류사회’에서 놀고 거기서 듣는 얘기로 판단한다. 열린우리당은 애초 정책 방향성으로 모인 게 아니다. 70%의 기회주의자와 10%의 ‘또라이’와 20%의 비교적 괜찮은 이들이 있을 뿐이다.”

뭔가 다른 시민정치 조직 만들어야

비판한다는 건 (참여정부에) 아직 애정이 남아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는데, 개선 여지가 있다 보는가?
“개선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해도 글은 쓸 수 있다. 비판도 했지만,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왜 이렇게 된 건가’ ‘바람직한 경제개혁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실패의 경험에서 뭘 배워야 하나’ 하는 질문이었다. 하나하나 점검하는 과정에서 교훈을 얻는 차원이다. 국민 한 사람으로서 (참여정부가) 잘해주기를, 경제 운용도 더 잘해주기를, 지금이라도 방향을 수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지만, 실제 그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개선 가능성은) 0.01%도 없다고 본다.”

유 교수는 거듭 “열린우리당으로는 안 되고, (개혁을 이룰) 뭔가 다른 ‘시민정치’ 조직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이며, (개혁을 이룰 도구로) ‘정책정당’을 중요한 화두로 거론했다. 그런 준비를 하며 만나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당연히 있다”고만 밝혔을 뿐 “더 이상 얘기는 하지 않겠다”며 입을 닫았다.



유종일은 누구인가

원칙을 중시하는 개혁 성향, 대통령 경제 공약 대부분 만들어

유종일 교수는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노연’(盧硏·노무현과 함께하는 연구자그룹)을 이끌면서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경제 관련 공약을 대부분 만들어낸 인물로 꼽힌다. ‘행정수도 이전’ ‘연 7% 성장잠재력 확충’ 등 굵직한 공약이 그의 손을 거쳤다. 노 후보의 ‘경제 가정교사’로 불린 게 그 때문이다.
유종근 전 전북지사의 친동생인 유 교수는 1991년 미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 노트르담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재직하다 1998년 KDI 국제정책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국 포드재단, 국제노동기구(ILO) 등에서 컨설턴트로 일한 적도 있다. 대학 다닐 때 학생운동을 하다 두 번이나 퇴학을 당한 데서 엿볼 수 있듯 원칙을 중시하는 개혁 성향의 학자로 평가받는다.
노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건 2001년 4월. 이때 다리를 놓은 이는 윤석규 전 열린우리당 원내기획실장이었다. 유 교수의 서울대 1년 후배인 윤 전 실장은 청와대(정책기획수석실 시민사회국장)를 떠나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작업에 나서려던 참이었다고 한다. 유 교수는 “(윤 전 실장이) 청와대에서 나오기로 마음먹은 뒤 두 사람에게 상의하고 있다며 그중 한 사람이 천정배 열린우리당 의원(당시 새천년민주당 의원), 또 한 사람이 ‘나라고 하더라”며 웃었다. “불쑥 찾아와선 노무현의 가능성을 얘기하며 자신의 로직(논리)을 얘기하더라. 들어보니 말이 되더라. 그래서… (참여하게 됐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음에도 어찌된 일인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는 참여하지 않아 구구한 해석을 낳았는데, “개혁성이 너무 강해 (대통령 당선자가) 부담스러워한다”는 말이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참여정부 출범 뒤에도 대통령직속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 위원으로 1년가량 일했을 뿐 뚜렷한 소임을 맡지 않았다. 그를 노무현 대통령과 연결시킨 윤석규 전 실장과 함께 천정배 의원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씨는 현재 천 의원의 대선 준비 기지로 여겨지는 사단법인 동북아연구원의 기획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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