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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되지 않은 입’들의 시대, 읽기로 버티자

입 놀리는 재미에 빠져 입에서 배설되는 것을 통제 못하는 정치인 등 엘리트들…시민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책 추천
등록 2024-03-01 07:23 수정 2024-03-03 02:53
정치인들의 입이 공동체를 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부적절한 말로 입길에 오른다. 한동훈(왼쪽)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대표의 코를 대신 파주거나 대표가 차은우보다 잘생겼다고 하는, 비위 좋은 아부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정글이 돼버린 것이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일부 의원 평가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며 “0점 맞은 분도 있다”며 웃었다가 논란이 됐다. 연합뉴스, 공동취재사진

정치인들의 입이 공동체를 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부적절한 말로 입길에 오른다. 한동훈(왼쪽)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대표의 코를 대신 파주거나 대표가 차은우보다 잘생겼다고 하는, 비위 좋은 아부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정글이 돼버린 것이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일부 의원 평가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며 “0점 맞은 분도 있다”며 웃었다가 논란이 됐다. 연합뉴스, 공동취재사진


이야기를 만드는 창작자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한국의 정치인들을 보면 절망적일 때가 많다. 말을 잘 못하거나 조롱, 비아냥처럼 못된 말을 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저 말로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지, 만들어질 수는 있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암담하다. 나라라는 정치공동체란 역사 안에서 그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해나가는 ‘이야기 공동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아무 이야기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입이야말로 가장 쓸모없는 입이기 때문이다.

이야기 만들지 못하는 정치인의 말

이야기를 만들 때 가장 어려운 것이 등장인물의 말이다. 말을 두려워하지 않는 등장인물은 아직 주인공이 아니다. 누군가 말을 하면 그를 화자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말이 등장인물의 입을 빌릴 뿐이다. 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말의 화자가 아니라 말을 실어 나르는 ‘통나무’에 불과하다. 말의 화자, 즉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말을 절제하고 통제함으로써 말이 제멋대로 가속되지 않게 한다는 의미다. 지금 한국 정치인들의 ‘입’은 전혀 통제되지 않고 있다. 말에 놀아나는 입이다.

그들은 말하여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입을 ‘놀리는’ 재미에 빠져 있다. 먹는 것의 재미에 빠져 입의 즐거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말하는 입으로 이행하는 것을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프랑수아즈 돌토는 ‘구강 거세’라고 했다. 그런데 입을 놀리는 재미에 빠져 말을 통제하지 못하면 입은 입이 아니라 항문이 된다. 입을 놀리는 재미에 빠져 끊임없이 아무 곳에서나 입에서 배설되는 것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돌토가 말하는 ‘항문 거세’가 항문이 아니라 입에서 발생하지 못한 것이 한국의 정치인들이다.

공평을 기하기 위해 거대 양당의 말을 다 살펴보자.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이재명 당대표의 측근이라는 김지호 당대표 정무조정부실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영주 국회부의장의 탈당 기사를 공유하며 “부디 앞으로는 마음 편하게 지인분들과 일본 여행 다녀오시길 기원한다”고 썼다고 한다. 2023년 6월 국회 본회의에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계획 철회 촉구 결의안을 논의하는 회기 중에 김 부의장이 일본 여행 일정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던 것을 비꼰 것이다. 이재명 당대표 자신도 김 부의장과 박용진 의원의 평가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며 “0점 맞은 분도 있다”며 헤헤 웃었다가 논란이 됐다. 입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뭐가 계속 새고 있는 것이다. 거세되지 않은 입이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역시 다르지 않다. 얼마 전 그는 “대표의 코를 대신 파주거나 대표가 차은우보다 잘생겼다고 하는, 비위 좋은 아부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정글이 돼버린 것이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안귀령 부대변인이 한 방송에서 한 말을 캡처한 사진에서 시작된 일이지만 굳이 대표가 할 필요 없고, 방식도 아닌 것을 굳이 한다. 놀리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입이다. 역시 거세되지 않은 입이다.

(그런데 이게 어디 정치권만의 일인가? 지금 진행되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에서도 마찬가지다. “반에서 20~30등 하는 의사를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 “데이트 몇 번 했다고 성폭행해도 되나” 등 온갖 말이 다 쏟아지고 있다. 이런 말들은 그냥 막말이 아니다. 말하는 순간 내뱉는 사람이 입을 놀리는 것에 취해서 나오는 말이다. 역시 항문 거세가 되지 않은 입이다. 한국의 이른바 ‘엘리트’들이 이렇게 항문 거세가 되지 않은 입을 가졌다는 것이야말로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성장하지 못한 자기 상태만 드러낸다

거세되지 않은 입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말하는 자신의 품격, 특히 그중에서도 성장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행위’에 불과하다.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가 말한 것이 곧 그’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정치인들의 말은 정말 ‘날것’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자신과 다른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입이 아니라 자기에 대해 드러내기만 하는 입이다. 말할수록 상대를 공격하는 것뿐 아니라 성장하지 못한 자신의 상태만 드러내고 있다.

인간은 말과 관련해 두 번의 성장 과정을 거친다. 첫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뭐든 얻을 수는 없고, 말로는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언어의 세계로 진입한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마트 바닥을 뒹구는 어린아이를 보며 부모가 “어서 일어나. 떼쓰지 말고 말로 해. 원하는 게 뭐야?”라고 묻는 것은 아이를 언어의 세계로 진입시키는 중요한 교육이다.

그러나 말의 세계에 진입한 다음 사람은 곧 다시 깨닫게 된다. 말로 할 수 있다고 해서 다 말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사회의 억압을 통해 금기시되기도 하고 윤리적 존재가 되기 위해 스스로 금지하기도 한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전자의 금기에 대해서는 도전하고 저항하면서 스스로의 척도를 세워 후자를 만들어간다. 금지가 없는 언어의 세계란 없기 때문이다. 말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 줄 아는 것이 윤리적 존재로서 인간의 성장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주인공이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되는 시점은 이야기의 시작이 아니라 끝 무렵에서나 가능하다. 이야기라는 것 자체가 사실 주인공이 자신의 진짜 욕망과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가 그것을 깨달아가는 성장의 과정이 아닌가. 그러니 등장인물은 자기가 뭘 말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사실 이 점 때문에 작가가 자꾸 등장하려는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의 말은 주인공의 ‘진정한’ 욕망과 맞지 않고 어긋나며 간극을 가진다. 이 간극이 지루함이 아니라 재미와 긴장 요소가 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이야기를 이야기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요즘에는 이것 때문에 이런 전개가 ‘고구마’ 전개라고 욕먹기도 한다. 주인공이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바보로 보이고 그 간극을 깨닫고 알아가는 과정이 너무 지난하고 지루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냉소주의적 독자가 다수면 말이다. 이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자기 욕망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할 줄 아는 ‘만렙’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게 대세이기도 하다.)

‘말이 죽어본 적 있는 자’만 주인공이 된다

주인공은 처음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실을 알지 못한 상태라 횡설수설한다. 그러다 자기 말과 욕망의 괴리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나 그는 아직 자기 욕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자기 말이 그 욕망을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되면 주인공에게는 딱 하나의 말만이 가능해진다. 침묵이다. 그저 침묵하고 있기만 하면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는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침묵이어야 한다.

동어반복인 것 같지만 침묵하는 동안 주인공은 말할 수 없다. 그는 말하지 않고 행동한다. 심지어 이 행동은 실어증의 결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동을 포함한다. 그를 통해 그가 말을 상실했음을 드러낸다. 가끔씩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수수께끼와 같거나 전보처럼 툭툭 끊길 뿐이다. 그러다 완전한 침묵에 빠지기도 한다. 말이 죽음에 빠진 상태의 주인공을 말로 드러내는 것만큼 어려운 작업이 없다. 하지만 말이 죽지 않고서 주인공은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입의 거세를 넘어 말이 죽어본 적 있는 자만이 주인공이 되는 결말로 갈 수 있다.

왜 한국의 정치인 다수는 입이 거세되지 않았을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지만 아주 사소한 이유가 아닌 것 하나는 이미 오래전 논객의 시대와 함께 시작됐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등에서 진행하는 토론 프로그램은 형식적으로는 출연자들끼리 서로의 말을 치열하게 논박하며 진행된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철저하게 시청자를 향해 하는 것으로 계산되어 말해진다. 즉 상대의 말을 반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상대의 말을 반박하는 것조차 관심이 아니다. 시청자의 주목·관심을 끄는 것이 목적이다. 토론은 주목의 정치경제학에 포섭됐다. 따라서 반박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인 것이다. 애초부터 시선 자체가 시청자, 즉 관중을 향해 있다.

소위 논객의 시대 이후 한국 정치는 서로 말을 주고받음으로써 이어지는 이야기를 만들어가지 않는다. 서로 마주 보고 있지만 말은 관중석을 향해서만 한다. 그것도 그 ‘논쟁’을 팝콘을 들고 즐기는 관중을 향해서만 말이다. 그러니 서로 주고받는 말은 서로를 무시하는 말이다. 무시할수록 팝콘 든 관중의 열광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관중과 말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좁은 의미에서 이야기 바깥의 관중과 주고받으며 만드는 이야기는 ‘정치’가 아니라 ‘운동’인데 한국은 그런 운동도 부재하지 않는가? 정치의 이야기도 없고 운동의 이야기도 없다.

관객을 구경꾼이 아니라 이야기의 한 주체로 끌어들이는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관객을 직접적으로 즐겁게 하는 것에 철저히 무심하며 이야기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이야기 안에서 진행되는 말이 이야기 밖으로 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안에 있는 상대를 향해 진행돼야 한다. 그래서 관객·독자가 이야기 바깥에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이렇게 해야 역설적으로 구경꾼·심판자가 아니라 이야기 ‘안’의 핵심 주체가 되어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가고 완성하는 관객·주체가 된다.

독자를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책 2권을 추천한다. 왼쪽부터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표지 이미지. 돌베개, 메이븐 제공

독자를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책 2권을 추천한다. 왼쪽부터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표지 이미지. 돌베개, 메이븐 제공


여기에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의 역할이 있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거세되지 않은 입으로 이야기를 망치고 있는 사람들만을 이야기로 삼는다면 그것 역시 ‘엘리트’들만 쳐다보는 절망의 이야기일 뿐이다. 저 엘리트들이 아니라 어디엔가 듣는 이를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있을 것이다. 구경만 하고 싶어도 도저히 밖에서 구경하며 품평할 수 없게 하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고, 그런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주목은 거기로 가야 한다.

정치의 이야기, 운동의 이야기 부재한 사회

그런 이야기를 읽고 이야기 안으로 끌려들어가 관객·독자가 돼야 이 시대를 겨우 버틸 수 있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이 글의 끝으로 다소 뜬금없는 말 같지만 그런 이야기 두 권을 소개하려 한다. 한 권은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이고 다른 한 권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다. 항문이 거세되지 않은 입들로부터 배설되는 것 때문에 자신의 입에서도 뭔가 끊임없이 구토가 새어 나온다면 ‘읽기’로 버티자. 여전히 우리를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이 난세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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