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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듣지 않는다면

등록 2022-04-06 16:39 수정 2022-04-07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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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 1-용산과 통의동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여기에는 공간과 상호작용하는 인간의 행위가 전제돼 있다. 수평적인 의사결정을 중시하는 조직에서 회의실을 바꾸는 이유도 그래서다. 각 공간의 이름이 단지 특정한 장소를 일컫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모두 안다. ‘대치동’과 ‘동자동’이라는 서울의 공간에서 자동 연상되는 심상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보라. 아무리 작은 공간이라도 자원 배분, 사회적 관계 등 많은 요소가 응축돼 나타난다. 그래서 격차와 불평등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공간이라는 관점에서 사회구조를 연구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3월20일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하겠다며 한 말을 곰곰 곱씹어본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내려놓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는 것 아니냐”고 기자가 질문하자, 윤 당선자는 “결단하지 않으면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며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국민의 54%가 ‘이전 반대’ 의견을 밝힌 여론조사 결과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막대한 이전비용이나 안보 불안 따위는 애써 무시하며, 오직 용산 이전만이 ‘제왕적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를 벗어나’ ‘국민과 소통하는’ 길이라고, 이것은 자신의 ‘결단’이라고 했다. 모든 길은 용산으로 통한다, 고 생각하는 걸까. 청와대에 지배당하지 않을지 몰라도, 이젠 용산이라는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위치한 종로구 통의동 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의심은 확신에 가까워진다. 당선 뒤 20일이 지났다. ‘임대차 3법’ 후퇴, 반노동 정책, 여성가족부 폐지 등을 우려하는 시민들이 그곳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듣지 않는다면 (집무실이) 청와대든 용산이든 무슨 상관입니까” 묻지만, 답은 들을 수 없다. 어떤 공간에 있는 이들은 허니문 기간임에도 껴안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규원, 방준호, 이정규 기자가 ‘제왕적 권력’을 내려놓겠다면서 ‘제왕적 리더십’을 보이는 윤석열 당선자에 대해 정치인, 전문가,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 공간 2-혜화역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 이곳은 상징적인 공간이다. 장애인단체들의 이동권 투쟁이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2번 출구 앞의 바닥에는 동판이 새겨져 있다. ‘장애인 이동권 요구 현장’이라는 글씨 아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999.6.28. 혜화역 장애인(장애인이동권연대 투쟁국장 이규식) 휠체어 추락사고 이후, 여기서 이동권을 외치다.’ 휠체어를 타고 장애인 야학을 다녀오던 이규식씨는 이동용 리프트에서 떨어져 다쳤다. 서울지하철공사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어, 처음으로 장애인이 안전하게 이동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 뒤로도 지하철역 곳곳에서 리프트 추락사고가 잇따랐다. 지하철역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설계할 것이냐 역시 권력의 문제다. 처음부터 비장애인만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없이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만 설치됐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혜화역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싸웠다. 무려 22년간. 그 결과, 지하철역마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유모차를 미는 젊은 부부도, 지팡이를 짚은 노인도, 무거운 짐을 양손에 든 시민도 모두 그 덕분에 편해졌다. 혜화역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상징적인 공간이 됐다. 공간을 탓하는 대신 이들은 그 공간을 변화시켜냈다. 한 사회학자의 말처럼 ‘공간 변화는 사회구조의 변화를 기록하며, 그 명세서로 분석돼야 한다’.

그 변화의 기록은, 다음호에서 자세히 다룰 계획이다.

# 공간 3-만리동

<한겨레21>이 있는 만리동에 반가운 소식이 있어 독자 여러분께 전한다. 독립유공자 이석영 서거 88년 만에 직계 후손을 확인해 단독 보도(제1373호)했던 조일준 선임기자가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다. ‘쓰는 사람’ 21명을 인터뷰한 통권 6호(제1405·1406호) ‘21 WRITERS 2’는 글쓰기를 사랑하는 여러분 덕분에 곧 ‘완판’될 예정이다.

만리동 뉴스룸은 독자의 사랑과 응원에 지배당한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1407호 표지이야기 

윤석열의 대통령실 이전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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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허니문 시기, 밀어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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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실 어디로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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