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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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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당면’한 위기, 끼니마다 희망을 불붙이며

새해 첫 단체 식사 바비큐 끝낸 뒤 ‘동물 신체 입장 금지’ 나만의 식탁에서 만든 유부부추당면국수
등록 2024-01-06 05:09 수정 2024-01-11 12:59


새 마음으로 맞이하기 어려운 새해다. 2024년 첫날부터 일본 이시카와현에서 규모 7.6 지진이 발생했다. 2022년 11월 개봉한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묘사된 ‘미미즈’(극중 지진을 일으키는 가상의 존재)처럼, 자연은 어떤 의도 없이 그냥 재앙을 일으키곤 했다.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재해 소식에 마음이 무거워지면서도 더는 천재지변이 인간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점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류세’를 살아가는 까닭이다.

인류세는 인류의 활동이 지구의 화학·물리적 체계를 바꾼 새로운 지질시대를 말한다. 인류의 활동으로 온실가스가 급증하고 날씨가 변했다. 해수면이 상승하면 물의 무게로 더 지진에 취약해지고, 가뭄이나 홍수 같은 극단적인 기상 현상은 판의 압력을 변경해 지각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한다. 날씨가 지진에 영향이 없다고 치더라도 날카롭게 부서지는 건축물과 원전 사고는 모두 인간의 활동에서 비롯된 위험이다.

일상에서 이런 위험을 체감하긴 쉽지 않다. 그 어느 해보다 따뜻한 겨울,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외투 없이 산책하면서도 이상기온에 대한 걱정보다는 당장의 포근함을 반기게 된다. 나름의 염려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행동이 따르지 않는 염려는 없는 것과 같다. 온실가스의 주범인 고기를 쌓아두고 먹으면서 날씨가 예전 같지 않다고 입으로만 걱정하면 뭐 하나.

가족이 모두 모인 2024년 첫 끼는 야외 바비큐였다. 비건을 실천하는 내가 먹을 음식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조금 식은 밥에 구운 양송이를 올려 먹는 게 최선이었다. 충분히 맛있게 채식을 즐길 수 있는데…. 깨작거리는 내 모습을 보면 역시 채식은 맛없다고 생각할까봐 며칠 굶은 사람이란 자기 암시를 걸고 푹푹 퍼먹었다. 함께하는 시간 자체가 좋았다는 사실과 별개로, 얼른 나만의 식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동물의 신체는 입장 금지인 나의 부엌에서 한 맺힌 양 큰 냄비에 물부터 끓인다. 추운 날씨에 더 맛있게 느껴지는 요리 중 하나인 어묵탕, 그 안에 든 여러 재료 중 유부주머니를 무척 좋아하는데 날이 추워지면 그 비슷한 식감과 맛을 주는 국수를 끓여 먹는다. 한국에서 당면은 거의 잡채로 활용하지만 물국수처럼 끓여도 맛있다. 밀가루를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뜨끈한 당면국수다.

조미되지 않은 유부를 길게 잘라 뜨거운 물에 기름기를 제거한 뒤, 맑고 깊은 채수에 당면이 거의 익어갈 때쯤 가득 넣어준다. 폭신한 유부에 국물이 쫙 스며든다. 부추는 종종 잘라 간장과 식초, 고춧가루로 무친 다음 국수 위에 올려준다. 뜨끈한 당면과 유부를 만나 살짝 부드러워지면서 향과 감칠맛을 뿜어내는데, 그 식감과 조화가 유부주머니 부럽지 않다. 이렇게 맛있다는 걸 알면 적어도 하루에 한 끼 정도는 식물성으로 꾸리지 않을까.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폭풍에 훅 꺼질 듯한 희망이라는 촛불. 끼니마다 불을 붙이며 희미한 힘을 내본다.

2023년은 이미 2016년을 제치고 지구가 가장 뜨거웠던 해로 기록됐다. 독일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와 영국 기상청에 따르면 2024년이 역사상 가장 뜨거운 해가 되리라는 전망이다.

글·그림 초식마녀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가 ‘남을 살리는 밥상으로 나를 살리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4주마다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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