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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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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빌에선 할 일이 없다

등록 2006-09-15 15:00 수정 2020-05-02 19:24

자이툰부대 주둔 초기 1년여 동안 현지에서 생활한 독자의 기고 … 재건사업·의료지원·치안 확보 등에 한국군이 맡은 역할은 거의 없어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자이툰부대를 다룬 제625호 표지이야기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많은 독자들이 다양한 의견을 전해왔는데, 유독 눈에 띄는 글이 있었다. 자이툰부대의 이라크 에르빌 주둔 초기 1년여 동안 현지에서 생활했다는 이 독자는 “이제 한국군이 현지에 주둔할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그의 양해를 구해 편지 내용을 요약해 싣는다. 편집자

▣ 김창남(가명)/ 이라크 파견근무 경험자

나는 지난 2004년 여름 이라크를 처음 방문했고, 그해 가을 다시 에르빌로 가 1년여 일하다 지난해 귀국했다.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논쟁은 자이툰부대가 당초 파병 목적에 부합하는 사업을 해왔느냐,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활동이 필요한 것이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믿는다.

폭탄테러 부상자 단 1명만 받아

정부가 파병 목적으로 내세운 것은 이라크 재건복구와 의료지원, 미군의 동맹군으로서 공식 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공백 상태인 현지 치안 확보 등이었다. 이 밖에 국익 차원으로 한-미 동맹 강화, 이라크 재건복구 사업에 한국 기업 참여, 이라크 원유 확보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런 목적대로 자이툰부대가 활동했고, 앞으로도 그런 활동이 필요한 것인지, 또 국익을 위한 기대효과도 거두고 있는지에 대해 따져물어야 한다고 본다.

이라크 평화재건과 의료지원과 관련해 한국군은 현지에서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알려진 대로 에르빌은 전쟁 지역이 아니다. 이라크 전쟁 기간 중 한 번도 교전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쿠르드족은 미군에 적극 협력했다. 복구할 전쟁피해는 애초 없었던 게다.

미군은 이른바 ‘CERP’(Commander Emergency Response Program)라고 하는 전쟁 복구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연간 예산이 20억달러가량 되는데, 매년 각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동맹군으로부터 전쟁복구 사업에 필요한 자금 소요를 제출받은 뒤 심사해 자금을 배분한다. 한국군은 지난 2005년(2004년 10월~2005년 9월)에 2천만달러, 즉 전체 예산의 약 1%를 지원받았다. 미군은 에르빌 지역에 복구할 만한 사업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재건복구를 위해 파병한 공병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역시 거의 하는 일이 없다. 부대 내부공사와 외부에 발주한 공사의 준공검사(공사가 완료되어야 대금을 지불하므로)가 주임무다. 외부공사에 한국군이 참여했다가 인명피해가 발생할 경우 닥쳐올 부담 때문에 병사들을 거의 외부에 내보내지 않는다. 현지 기업에 돈만 주고 감독만 하는 것이라면 굳이 공병대가 파병될 이유가 없다.

의료부대의 경우 수십 명의 군의관과 간호장교가 파병됐고 치과·내과·외과에 정신과까지 종합병원만큼의 인력이 와 있지만 실제로는 각 분야의 동네 의원들을 모아놓은 수준이다. 현지인을 진료하지만 간단한 환자에 대한 진료 위주다. 2005년 5월 에르빌 시내 폭탄테러 당시에도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수용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단 1명의 부상자만 받았다. 나머지 부상자들은 헬기로 모술 미군병원이나 심지어 터키로 수송됐다고 들었다.

한국군은 2004년 9월 말 에르빌에 도착해, 10월 초 미군 사령관으로부터 현지 작전권을 이양받았다. 한국군이 에르빌과 도후크 등 2개 주의 치안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황당한 얘기다. 에르빌과 도후크주는 쿠르드민주당(KDP)이 장악한 지역으로 주정부이긴 하나 독립국가 수준의 정부가 구성돼 있다. 자체 군(제르바니) 약 3만 명과 경찰을 보유하고 있어 별도의 치안확보를 위한 전력이 필요 없다. 따라서 한국군의 치안확보를 위한 외부 활동은 내가 현지에 있던 1년여 동안 전무했다. 오히려 현지 군병력이 한국군 부대의 외곽을 지켜주고 있다.

주둔만 한다고 석유자원 확보되나

한-미 동맹 관련 사항은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현지 재건복구 사업에 한국 기업이 참여해 ‘제2의 중동 붐’이 일어날 것이란 얘기는 꿈같은 말이다. 에르빌 지역은 치안이 비교적 확보돼 있어 실제 3대 사업(상하수도·살라하딘대학·종합경기장)에 한국 기업이 참여하게 될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가나무역 김선일씨 납치·살해 사건 이후 정부는 민간인의 이라크 입국을 엄격히 금지했다. 아마도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한국인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면, 국내에서 철군 주장이 나올 것을 우려한 때문인 듯싶다. 그래서 부대 납품 및 부대 공사와 관련된 회사가 아니면 민간인은 입국할 수 없다.

석유자원 확보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국군의 주둔 지역은 유전지대가 아니다. 또 별로 하는 일도 없이 3천 명이 주둔하고 있다고 해 석유자원 확보에 우선권을 가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결국 당초 정부가 내세웠던 파병의 이유나 목적이 실제 현지에서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고, 많은 병력이 부대 경계근무 이외에는 할 일이 없다. 다시금 파병 연장 움직임이 있는 이때 도대체 한국군이 현지에 계속 주둔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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