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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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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사람 없이 맑은 하늘

오수영·여민희 편집위원 ‘착륙의 길’ 동행기
등록 2013-08-31 16:09 수정 2020-05-02 19:27

 ‘둘만 남은 하늘’에서 그들이 내려왔습니다.
 202일 만입니다. 태풍(콩레이)의 ‘북진’이 시작되기 전이었습니다. 쌓인 눈과 잠자리를 다투고, 천둥·번개 속에서 울며 버틴 종탑(서울 종로구 혜화동성당)이었습니다. 성난 바람을 참아준 하늘이 처음으로 고마웠습니다. 이 오수영·여민희 편집위원의 ‘착륙의 길’에 기쁘게 동행했습니다. 하늘에서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땅에서의 시작을 마중했습니다. 끝내, ‘땅의 노동자’로, 두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고공 절벽’에 매달린 사람 없는 모처럼 만의 하늘입니다. 화창하지만은 않습니다. ‘여백 많은 하늘’이 얼마나 유지될진 알 수 없습니다.

 
 

202일간의 고공농성을 마친 오수영(오른쪽)·여민희씨가 지난 8월26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성당 종탑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한겨레21 김명진

202일간의 고공농성을 마친 오수영(오른쪽)·여민희씨가 지난 8월26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성당 종탑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한겨레21 김명진

 8월19일. 오수영씨의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오늘부터 목요일까지 집중교섭 기간입니다. 기자님한테만 알려드리는 거예요.”

 종탑 농성 200일(8월24일)맞이 기자회견(8월20일) 일정을 공지하면서였습니다. 이 민주노총 서비스연맹과 서울본부의 교섭 제안 계획(975호)을 전한 직후였습니다. 재능교육 사 쪽이 제안을 수용했다는 뜻이었습니다.

  

 첫날처럼 꼬박 밤을 새운 마지막 날  

 8월21일. 교섭 종료 하루 전 문자는 담담했습니다.

 “좋은 소식 있으면 가장 먼저 알려드릴게요.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좋은 소식’이란 낱말에서 특별한 기대가 읽히진 않았습니다. 무엇을 쉽게 기대하기엔 2070일을 넘긴 ‘거리의 삶’이 너무 길고 험했습니다. 교섭 상황도 매끄럽지만은 않아 보였습니다.

 8월23일. “오늘 아침 가합의안 나왔어요. 노동조합 총회 준비 중입니다.”

 ‘해직 노조원 12명(사망 조합원 고 이지현씨 포함) 전원 즉시 복직과 2008년 10월 해지한 단체협약 원상 회복. 올해 12월31일까지 새 단협 체결.’ 노조 요구의 핵심이 담겼습니다. 전날 교섭 시한을 넘겨 새벽에야 의견 접근을 이뤘다고 했습니다.

 8월25일. “조합원 89% 찬성으로 가결됐어요. 내일 오후 3시 하산.”

 짧은 문장 사이에 숨은 일주일이 긴박했습니다.

 8월26일 오전 8시50분. “타결 전까지 몇 차례 고비가 있었어요. 우리만 남은 고공이잖아요. 사회적 압박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어요.” 전화기 저편에서 오수영씨가 말했습니다.

 “조금 정신이 없네요. 잠을 못 잤어요.” 여민희씨는 전날 꼬박 밤을 밝혔습니다. “생각이 너무 복잡하다”고 했습니다. 종탑에 오른 첫날(2월6일)에도 그들은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얼어붙어버린 뚜껑을 밀어올리고 선 종탑이 너무 추워서였습니다. 앞으로 견뎌야 할 기약 없는 날들이 무서워서였습니다. 내려가는 날도 그들은 눈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내려가는 건가” 싶었고, “조인식이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두렵기도 했습니다. 오랜 하늘 생활 탓입니다. 그들은 섣불리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수영씨는 “그동안 좋았던 기억보다 힘들었던 기억이 선명하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현장에서 부딪칠 일들을 어떻게 헤쳐가야 하나 생각하다 결국 한숨도 못 잤다”고 했습니다.

 긴장을 풀어보겠다고 문자로 물었습니다. 땅에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요? “약속을 지켰습니다. 나 자신과의 약속, 동지들에게 한 약속….” 여민희씨가 답했습니다.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은요? “집인데 병원 가래요.”


땅에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요? “약속을 지켰습니다. 나 자신과의 약속, 동지들에게 한 약속….” 여민희씨가 답했습니다.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은요? “집인데 병원 가래요.”

 오후 2시30분. 그들의 ‘마지막 종탑’에 올랐습니다. 종탑은 처음처럼 끝도 위태로웠습니다. 하강을 준비 중인 두 사람의 얼굴이 발갰습니다. 배낭에 가지고 내려갈 짐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종탑에 오르며 멨던 배낭이었습니다. 오수영씨는 벌써부터 울먹였습니다. 두 사람은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송재영 신부(혜화동성당 부주임)가 종탑에 섰습니다. “폐를 너무 많이 끼쳐 죄송합니다.” 오수영씨가 말했습니다. “처음 종탑에 올랐을 때 얼어죽을까봐 고량주를 주신 분”이라고 신부를 소개했습니다. 신부는 제게 202일 동안의 ‘성당 공식 견해’를 전했습니다. “경찰이 성당에 진입하려 해서 막았습니다.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의 안전이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품어왔던 ‘개인적 견해’도 밝혔습니다. “신부는 이 세상 ‘을’들의 편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오수영(왼쪽)·여민희씨가 고공농성을 끝내고 내려오기 직전 종탑에서 촬영한 마지막 모습. 한겨레21 김명진

오수영(왼쪽)·여민희씨가 고공농성을 끝내고 내려오기 직전 종탑에서 촬영한 마지막 모습. 한겨레21 김명진

 오후 2시50분. 두 사람이 얇은 철근 계단을 밟고 종탑 벽에 매달렸습니다. 똑같은 모양의 하얀 새 운동화가 그들의 허공을 떠받쳤습니다. 다 망가진 천막이 종탑에서 그들의 하강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우는 사람이 벌금 5만원씩 내자”  

 “5만원.”

 종탑을 종탑이게 하는 장소에 섰습니다. 대형 종이 매달린 곳입니다. 21회씩 하루 세 차례 울며 종탑을 흔들던 종입니다. 계단 14개를 딛고 내려온 여민희씨에게 오수영씨가 말했습니다. 종탑 위에서 두 사람은 “우는 사람이 벌금 5만원씩 내자”고 약속했습니다. 먼저 도착한 오수영씨는 친구가 안 보는 틈을 타 이미 눈물을 닦은 뒤였습니다.

 두 사람은 마중하러 올라온 사람들과 포옹했습니다. 종탑 입구까지 다시 50개의 나무계단을 걸어 내려갔습니다. 64개의 계단을 내려오기까지 세 계절이 걸렸습니다. 종탑 아래에서 ‘종지기 아저씨’에게도 작별 인사를 건넸습니다. 매일 종탑을 올려다보며 마음을 졸인 분입니다.

 오후 3시. 성당 본당 계단 앞에 섰습니다. 수많은 카메라가 그들의 얼굴을 조준했습니다. 수직으로 조여둔 그들의 시야가 수평을 만나며 확 풀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어지럼증을 느꼈습니다. “땅바닥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고 오수영씨는 나중에 말했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고동민(금속노조 쌍용차지부 대외협력실장)씨가 꽃다발을 건넸습니다. 두 사람의 하강을 도운 하얀 새 운동화는 그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는 제게 따로 말했습니다.


오후 3시. 성당 본당 계단 앞에 섰습니다. 두 사람은 어지럼증을 느꼈습니다. “땅바닥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고 오수영씨는 나중에 말했습니다.

 “새 마음, 새 몸으로 현장과 맞서자는 마음으로 선물했습니다. 두 사람이 너무 잘 버텨줘서 고마웠습니다. 고공농성 싸움에서 이 정도 성과는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3명도 지난 5월 171일의 송전탑 농성을 마치고 내려왔습니다.

 “지난 2월6일 새벽 종탑을 오르며 종탑 뚜껑이 열리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뚜껑은 결국 열렸습니다. 언제 끝날지 확신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됐고 오늘 끝났습니다. 특수고용노동자 최초의 단체협약을 회복했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현장에서 채워나가겠습니다.”

 재능교육 본사 앞 기자회견에서 오수영씨가 말했습니다. 여민희씨는 맞은편 종탑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뗐습니다.

 “누군가가 올려주는 밥을 먹고 누군가가 찾아와야만 만날 수 있는 곳에서 202일을 보냈습니다. 살고 싶어서 고공에 오르는 노동자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종탑 위로 무심한 듯 뭉게구름이 피어올랐습니다. 두 사람이 종탑에 오르자마자 내건 플래카드는 빛바랜 연두로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비와 바람과 태양에게 짙은 초록을 빼앗긴 지 오래였습니다. 두 사람이 등진 재능 사옥 벽의 영어 문구가 가슴으로부터 멀었습니다. “We promise! Your dreams come true.”

 오후 3시55분. 오수영·여민희씨가 노사합의문 체결을 위해 재능교육 본사로 들어갔습니다. 6층 조인식 장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두 사람이 섰습니다. “5년8개월 만이네.” 2007년 12월21일. 바로 그 장소에서 건물 밖으로 쫓겨났던 그날을 그들은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재능교육 노조의 ‘끝을 알 수 없는’ 천막농성이 시작된 날이기도 합니다.

 

조인식 때 경직된 얼굴이 된 이유 

 오후 4시. 대회의실에서 사 쪽과 마주 앉았습니다. 황창훈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위원장 직무대행은 “2076일이란 날짜의 상처가 너무 크다”고 했습니다. 양병무 재능교육 대표이사는 “두 여성 노동자가 안전하게 내려와 다행”이라고 답했습니다.


202일 동안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몇 시간 동안 서 있으려니까 너무 힘드네요.” 오수영씨가 말했습니다. 그의 머리로 눈이 갔습니다. 하늘 생활 동안 머리카락 절반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오후 4시35분. 노사가 합의문에 서명하고 악수했습니다. 웃음 띤 양 대표의 손을 잡고 오수영씨는 웃지 못했습니다. 오후 4시38분. 조인식을 마친 ‘땅의 노동자들’은 사옥 앞에서 동료들과 껴안으며 비로소 활짝 웃었습니다.

 “202일 동안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몇 시간 동안 서 있으려니까 너무 힘드네요.”

 오수영씨가 말했습니다. 그의 머리로 눈이 갔습니다. 하늘 생활 동안 머리카락 절반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그의 나이 이제 만으로 39살(여민희씨 40살)입니다. 두 사람은 건강검진을 위해 녹색병원(서울 중랑구 면목동)으로 향했습니다.

 종탑 높이에 적응하지 못한 ‘겨울의 그들’은 위태로웠습니다. 농성이 장기화되던 ‘봄의 그들’은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장마와 더위로 사투하던 ‘여름의 그들’은 생존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8월28일 오후 4시. 병원에서 만난 두 사람은 아직 착륙을 완료하지 못한 듯했습니다. 환자복을 입은 그들은 ‘고공의 삶’ 이전으로 귀환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하늘과 땅의 중간쯤에서 부유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여민희씨는 “아직 농성 중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종탑 농성 종료 직후 재능교육 사옥에서 가진 노사합의문 조인식에서 오수영씨가 웃는 얼굴의 양병무 대표이사(왼쪽)와 굳은 표정으로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21 김명진

종탑 농성 종료 직후 재능교육 사옥에서 가진 노사합의문 조인식에서 오수영씨가 웃는 얼굴의 양병무 대표이사(왼쪽)와 굳은 표정으로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21 김명진

 “종탑 생활이 ‘기억’의 단계로 넘어가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오수영씨는 또 울먹였습니다. “화장실이 병실 바로 옆에 붙어 있고, 샤워도 언제든 할 수 있어요. 이 당연한 삶이 내게 다시 올까 생각하며 종탑에서 잠을 깰 때마다 악몽이었어요. 지금 땅에 있어서 참 다행이에요.”

 두 사람은 가족의 면회도 말렸다고 했습니다. 퇴원 뒤 ‘204일 만의 귀가’를 통해 마음 편히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틀 동안의 검진 결과 크게 우려할 만한 건강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병원 내과과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두 사람을 안심시켰습니다. 여민희씨는 살짝 겁을 먹기도 했습니다. 초음파 검사를 하는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뭔가 있구나’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종탑 농성 도중 ‘내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으로 혼자 운 적이 많았습니다.


노조가 현장 교사들과 거리를 얼마나 빨리 좁혀내느냐가 눈앞에 닥친 과제입니다. “동료들이 현장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는 노조가 되는 게 중요해요.”

 집중교섭 땐 몇 차례 고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선 단협 후 복귀’를 요구하는 노조와 ‘선 복귀 후 단협’의 사 쪽 방침이 충돌했습니다. 분위기가 험해지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교섭 시한을 넘긴 8월23일 새벽 사 쪽이 ‘(단협) 원상 회복’이란 표현을 썼을 때에야 노조는 합의안 도출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오수영씨는 조인식 때 보여준 ‘경직된 표정’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조인식장에 들어가는 순간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이 과거 우리를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났어요. 그래도 지부 대표로 참석한 자리니까 억지로 웃어야 한다는 강박은 있었어요. 나름 웃는다고 웃었는데 사진 보니까 감정이 다 드러나 있더군요. 올해 연말 제대로 된 새 단협을 체결할 때라야 정말 웃을 수 있을 거예요.”

 

4500여 명 중 남은 조합원은 11명뿐 

 재능교육 노조는 1999년 33일간의 파업 끝에 특수고용노동자 첫 단협을 체결했습니다. 4차례 갱신 뒤 2008년 10월 사 쪽이 일방 해지했습니다. 기륭전자 노조의 1895일 투쟁을 넘어서고부턴 2076일째까지 최장기 농성 기록을 날마다 새로 썼습니다. 땅의 삶을 마주한 두 사람은 고민이 많아 보였습니다. 격렬한 투쟁 끝에 사회적 주목을 받으며 복귀하는 노조가 현장 교사들과 거리를 얼마나 빨리 좁혀내느냐가 눈앞에 닥친 과제입니다. 전체 4500여 명의 재능 교사 중 현재 남은 조합원은 11명뿐입니다.

 “동료들이 현장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는 노조가 되는 게 중요해요.”

 오수영씨가 말했습니다. 교섭 때 합의하지 못한 ‘자동충당제도’(회비 입금을 제때 못하면 교사 급여에서 자동 차감)와 ‘마이너스월별정산’(줄어든 회원 수 대비 과목 수만큼 급여 차감) 같은 ‘문제적 제도’ 개선도 숙제입니다. 종탑과 시청 환구단으로 찢어진 노조 내부 상처를 현장 복귀 과정에서 어떻게 치유하느냐도 시급합니다.

이틀 동안 머물며 건강검진을 받은 녹색병원 침상에서 오수영·여민희씨가 미소짓고 있다. 촬영 직후 두 사람은 204일 만에 귀가했다. 한겨레21 김명진

이틀 동안 머물며 건강검진을 받은 녹색병원 침상에서 오수영·여민희씨가 미소짓고 있다. 촬영 직후 두 사람은 204일 만에 귀가했다. 한겨레21 김명진

 조합원들은 9월2일 각자의 지역국으로 출근해 계약서를 씁니다. 이후 한 달간 휴식을 취하며 복귀를 준비할 계획입니다. 그동안 연대해준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개인 휴식도 갖는다고 합니다.

 미혼인 여민희씨는 “202일 동안 ‘홀로 남겨둔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수영씨는 “이제 ‘집밥’을 먹으며 ‘집잠’을 자고 싶다”고 했습니다. “9살 난 아들 채운이를 날마다 껴안고 자겠다”고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날 오후 6시께 퇴원했습니다. 그들 손엔 부산에 사는 페이스북 친구가 각자 앞으로 배달한 화분이 들려 있었습니다. 친구는 리본에 짧게 썼습니다. “빨랑 나아 출근하자.”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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