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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갚아야 할 빚이 있다

노력한 만큼 성공하는 게 공정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등록 2019-04-01 18:51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몸이 아프면 으레 꾸는 악몽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한동안 똑같은 꿈을 꿨다. 고등학교 시험 기간이다. 그날 수학 시험을 보는 줄 알았다. 시험장에 가니 국어 시간이다. 한 문제도 모르겠다. 글자가 뱅뱅 돈다. 그러다 잠이 깨곤 했다. 입사한 뒤 이 꿈은 다른 악몽으로 대체됐다.

시험 악몽은 고통의 그림자다. 중1부터 고3까지 끔찍했다. 만날 절벽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이상한 건 그 고통의 기능이다. 고통의 트랙을 달릴 때 이 게임 법칙에 내가 동의한 건 아니다. 그런 거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나. 뛰기도 죽을 맛이다. 그런데 출구를 빠져나오고 ‘간판’을 따자 이 게임이 공정했다고 믿고 싶어졌다. 이게 공정한 게임이 아니라면 내 고통의 의미가 없어지니까. 그 고통을 뚫고 얻은 간판 뒤에 오래 머물고 싶으니까. 그걸 벗어던지는 게 두려우니까. 불혹을 넘기고도 그렇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별로 잘하지 못했던 동창이 성공해 나타나면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든다. ‘뭐야, 불공평해.’ 내가 15살에 피똥을 싸는 훈련으로 귀청을 뜯어내는 데시벨의 방귀를 뀌는 신공을 터득했다고 내가 지금 고소득을 얻어야 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도 ‘내가 그때 얼마나 고생했는데…’란다. 어떤 고통은 타인을 향한 통로가 되는데 어떤 고통은 차별을 합리화하는 데 쓰인다.

고통의 잘못된 용도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세상에 나온 거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거다.” 드라마 에서 장그래는 이렇게 읊조렸다. 생활고 탓에 편의점, 목욕탕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바둑을 병행하다 프로 기사가 되는 데 실패했다. 고졸 검정고시로 졸업장을 땄다. 대기업 인턴이 돼 갖은 모욕을 감수하다 프레젠테이션 경쟁에서 이겨 계약직 사원이 된다. 그때 떨어진 상현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턴 동기 장백기에게 울분을 토한다. “공평한 기회 웃기고 있네. 걔가 어떻게 우리랑 공평한 기회를 나눠요. 우리 엄마가 나 학원 보내고 과외 붙이려고 쓴 돈이 얼만데. 우리 엄마 고생이 얼만데. 이거는 역차별이라고요. 나도 좀 놀걸, 중고딩 내내 12시 전에 자본 적이 없었어요. 초딩 때 학원만 몇 개를 돌았다고요. 대학 때는 그 어학연수, 근데… 이게 뭐야.” 이름 자체가 ‘그래’다. 시청자 속 터지게 모든 모욕에 ‘예스’ 하며 ‘노오력’하는 인물이다. 상현은 자기가 겪은 고통 때문에 다른 고통을 겪어온 장그래를 인정할 수가 없다.

사회학자 오찬호가 쓴 에는 수능 점수표대로 사람을 일렬로 세우는 20대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다 소수점 세 자리까지 따지겠다. 같은 과 안에서도 ‘지균충’(지역균형발전 전형으로 들어온 입학생), ‘수시충’(수시로 들어온 입학생)은 성골이 아닌 육두품 취급한다. 그 밑에 깔린 전제는 이렇다. ‘시스템은 바꿀 수 없는 상수다. 수능은 공정한 경쟁이다. 나쁜 점수는 자기계발에 실패한 결과다. 그 1점을 높이려 얼마나 많은 밤을 새웠나.’ 한 학생은 이렇게 고백했다. “나에게 있어 수능 점수는 475점어치의 ‘상품권’과 같았다. …당시 나는 수능 점수가 재수까지 해서 힘들게 획득한 상품권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내가 살 수 있는 최대의 가격표가 붙은 대학에 썼다.” 나노 단위로 나뉜 위계 속에서 우월감과 열등감이 꼬리를 무는 무한 루프를 돈다. 책에는 ‘괴물이 된 20대의 자화상’이란 부제가 붙었는데, 20대만? 20대가 기성세대 눈에 특히 그렇게 보인다면, 기성세대가 청춘일 때보다 지금 그들이 더 고통스럽고, 더 불안해서일 거다.

이걸 왜 알아야 하나?

사실 모두 내심 안다. 그 경주는 출발선이 다르다. 어떤 이는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어야 한다. 책에 나온 수치만 옮겨도 이렇다. 서울대 신입생의 아버지 65%는 사무직, 전문직, 경영관리직 종사자였다. 비숙련 단순노동자는 0.9%다(2010년 기사 재인용). 서울 출신 일반고 합격자 70%가 강남, 서초, 송파 출신이었다(2013년 자료 재인용).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09~2010년 대학을 졸업한 1만4349명을 조사해 발표한 ‘부모의 소득계층과 자녀의 취업 스펙’ 보고서를 보면, 어학연수 경험이 있으면 대기업 취업 확률이 49% 높아지는데, 부모 소득이 월 200만원 미만일 때는 자녀의 어학연수 비율이 10%, 월 700만원 이상일 때는 32%였다.

시험으로 무엇을 검증하나?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한 청년은 괴로운 건 컵밥이 아니라 ‘이걸 왜 알아야 하나’라는 의문이라고 했다. “을사늑약이 맺어진 곳은? 질문이 이러면 이제 변별력이 없어요. 다 알아요. 그래서 을사늑약이 맺어진 방은? 이렇게 물어요.” 그 방 이름을 아는 게 좋은 공무원이 되는 거랑 무슨 상관인가? 장강명이 쓴 르포 에 2017년 지방직 9급 공무원 임용시험 국어 기출 문제를 예로 들었다. 괄호 안에 들어갈 숫자의 합을 구하는 거다. “쌈: 바늘 (  )개를 묶어 세는 단위. 제: 한약의 분량을 나타내는 단위. 한 제는 탕약 (  )첩. 거리: 한 거리는 오이나 가지 (  )개.” 글로 밥벌이하는 장강명 작가도 못 맞히겠다고 했다. 2014년 삼성그룹 상반기 신입사원 공채 필기시험에는 이런 문제가 나왔다고 한다. “1. 아침 점심 저녁 2. 5월 6월 7월 3. ㄱ ㄴ ㄷ 4. 가을 겨울 봄 5.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이 중 성격이 다른 걸 고르시오.” 기준에 따라 모든 게 답이 될 수 있는데 한 개만 골라야 한다. 쌈이 바늘 몇 개를 세는 단위인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사이 실력의 차이는 뭘까? 뭐건 그에 따라 ‘신분’이 갈리고, 한번 갈리면 되돌리기 어렵다. 공정하지 않다고? 컵밥 1천 그릇을 먹고 시험에 붙고 나면 공정하다고 믿고 싶어질 거다.

공정한 것은 없다는 인정

고통을 통과해 용케 출입구를 찾은 사람은 그 과정이 공정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게 괴롭다. 운이라고 생각하면 자기 안전이 흔들린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화병만 난다. 세상을 바꾸자고 하기엔 엄두가 안 난다. 차라리 자기의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믿는 게 속 편하다. 그래야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니까. 그렇게 고통의 무한 루프를 돌며 악몽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기 고통으로 남의 고통을 합리화하면서.

공정한 척하는 불공정이 제일 불공정하다. 약자에게 실패의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세상을 뜯어고칠 뾰족한 방법은 없더라도 최소한 인정할 수는 없을까? 이건 정말 불공정해! 만약 당신이 이 게임에서 이겼다면, 운이 큰 몫 했다. 그러니 당신은 갚아야 할 빚이 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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