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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변호인단의 미 판례 거꾸로 읽기

박근혜·최순실·이재용 ‘대법원 선고’ 앞두고 미국 판결 일부만 따 “공갈죄 뇌물죄 양립 않는다”
등록 2019-04-27 04:51 수정 2020-05-02 19:29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가운데)이 지난 1월31일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빈소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가운데)이 지난 1월31일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빈소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변론을 맡은 법무법인 태평양은 지난 2월19일 대법원에 특이한 의견서를 냈다.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의 측근 최순실씨에게 승마 등을 지원한 것은 “박 전 대통령의 강요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이 부회장을 뇌물공여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내용의 의견서였다. ‘공무원의 강요(또는 공갈)에 따라 뇌물을 건넸을 경우 뇌물공여죄가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은, 앞서 이 부회장의 1·2심은 물론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재판에서도 변호인들이 주장했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부회장 쪽은 상고심에서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법무법인 태평양, 1·2심 배척 주장 되풀이

이 의견서가 눈길을 끈 이유는, 대륙법 계통의 한국 법정에 영미법 계통의 미국 연방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다, 판결 취지가 이 부회장에게 오히려 불리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입수한 의견서를 보면 법무법인 태평양은 미 연방대법원이 1992년에 선고한 에번스 판결(Evans v. US, 204 U.S. 255)을 제시했다. 이 사건은 미국 조지아주의 디캘브 카운티 시의원인 에번스가 부동산개발업자를 가장한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한테서 “토지용도 변경의 대가로 금품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받고 이에 응했다가 기소된 사건이었다. 태평양은 이 판결의 본문이 아닌 각주의 다음 대목을 근거로 들었다.

“법원이 공갈죄와 뇌물죄가 서로 양립하지 않는다고 판시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자발적으로 뇌물을 공여한 것이 아니라 (공무원의) 협박으로 인하여 이익을 제공한 피해자에 대해서는 맞을지 몰라도, 보통법이나 홉스법(Hobbs Act·미국의 뇌물 관련 법) 하에서 공갈죄와 뇌물죄가 양립할 수 없다는 취지는 아니다.”

태평양은 이 중 앞부분(밑줄 친 부분)을 근거로 “미국 법원은 공무원의 강요에 따라 이익을 제공한 공여자에 대한 뇌물죄의 성립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뇌물을 받은 공무원에게는 강요죄와 뇌물수수죄를 동시에 적용할 수 있지만, 뇌물을 건넨 공여자는 강요에 못 이겨 뇌물을 건넸다면 뇌물공여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게 에번스 사건을 심리한 연방대법원의 견해라는 것이다.

“강요 못 이겼다면 뇌물공여죄 아니다”

그러나 이 각주를 다 읽어보면 태평양의 주장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이 각주는 태평양이 언급한 대목에 이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다른 연구자는 뇌물죄와 공갈죄가 서로 겹치는 범죄라고 주장하면서 피고인에게 뇌물죄와 공갈죄가 모두 유죄로 인정된 과거 뉴욕주 사건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는 또 공갈죄와 뇌물죄가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인용되는 사례들은 협박에 의한 공갈죄와 뇌물죄에 관한 것임을 강조했고, 우리(미 연방대법원)는 후자의 판례가 홉스법 제정 이후에 선고돼 의회가 근거로 삼았던 판례가 아니라는 점도 주목한다. 우리는 제7항소법원의 ‘뇌물죄와 홉스법상 공갈죄는 서로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 최근 연방법원의 경향이다(인용 판결: 미국 대 칸 United State v. Kahn 항소법원 판결)’라는 판결에 동의한다.”

이 각주에서 에번스 사건 재판부의 결론은 ‘뇌물죄와 공갈죄는 서로 양립 가능하다’(밑줄 친 부분 참조)는 것이다. 특히 연방대법원이 이런 결론을 내리면서 인용한 항소법원의 칸 판결은 이런 견해를 더욱 분명하게 밝힌다. 칸 사건은 지역 케이블방송 사업자인 칸이 시장과 시의원 등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칸은 “공무원들의 공갈과 협박에 못 이겨 금품을 제공했다”고 주장했지만, 항소법원은 “부패한 공직자의 강요에 대한 올바른 대응은 수사 당국에 가는 것이지 뇌물을 주는 게 아니다”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거의 모든 뇌물 사건은 공직자의 강요 행위가 포함돼 있다. (중략) 공무원의 협박이 매우 압도적이어서 뇌물 제공을 거부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우리 법원은 불법적인 강요에 굴복한 피고인이 뇌물 제공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미 연방대법 취지는 “뇌물죄 공갈죄 양립 가능”

결국 에번스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이 명확하게 밝힌 견해는 ‘공무원의 강요에 따라 뇌물을 제공한 공여자에게도 뇌물공여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에번스 판결은 이 부회장에게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할 판례다.

대법원에 따르면 박영수 특별검사팀과 태평양은 2월19일부터 4월12일까지 각각 네 차례씩 의견서를 주고받으며 에번스 판결을 두고 공방을 벌였다. 특검팀은 태평양이 에번스 판결의 취지를 왜곡했다고 반박했고, 태평양은 특검팀이 판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공격했다. 특검팀과 태평양의 ‘의견서 공방’은 4월1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국정 농단’ 사건 네 번째 평의에서도 심도 있게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뇌물수수자와 뇌물공여자를 대향범(對向犯·상대편이 있어야 이뤄지는 범죄) 관계로 보고 함께 처벌하는 것은 우리 법원의 기본 태도다. 대표적인 대법원 판례는 노태우 전 대통령 뇌물 사건(대법원 1997. 4.17. 선고 96도 3377)이다. 노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제공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 재벌 총수들은 “회사에 가해질 수 있는 불이익을 우려해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지원했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김 회장 등에게 뇌물공여죄가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대통령의 직무와 뇌물 제공 간에 대가 관계가 인정된다”는 게 판결 이유였다.

뇌물공여자를 처벌하지 않은 판례도 있긴 하다. 공무원이 ‘직무집행의 의사 없이 또는 직무처리와 대가적 관계 없이 타인을 공갈하여 재물을 교부하게 한 경우에는 공갈죄만 성립한다’는 판결(대법원 1966. 4.6. 선고 66도12)이다. 직무관련성이나 대가 관계가 전혀 없이 오직 협박과 공갈에 못 이겨 뇌물을 건넸다면 공여자는 공갈죄의 피해자가 될 뿐 뇌물공여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하지만 대법원이 이 판례를 이 부회장 사건에 적용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삼성의 최순실씨에 대한 승마 지원은 박근혜 정부의 ‘이 부회장 경영권 승계 협조’라는 대가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서 이 부회장의 1·2심과 신동빈 회장의 1·2심도 ‘대통령의 강요 내지 겁박이 있었다고 해도 피고인의 뇌물공여죄는 성립한다’고 판결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7년 5월23일 최순실씨와 함께 뇌물 혐의 첫 공판에 출석해 피고인석에 앉아 있다(왼쪽). 2018년 11월14일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7년 5월23일 최순실씨와 함께 뇌물 혐의 첫 공판에 출석해 피고인석에 앉아 있다(왼쪽). 2018년 11월14일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청와대사진기자단

법조계, ‘봐주기 판결’ 노린 시간 끌기 의심

법조계에서는 이 부회장 쪽이 미 연방대법원의 판례까지 무리하게 동원해 ‘뇌물죄와 공갈죄는 양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을 일종의 ‘시간 끌기’ 전략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있다. 형사재판 경험이 많은 법원 출신의 한 변호사는 “처음엔 전혀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검찰 수사를 돌파할 수 있는 구멍이 보이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재판을 오래 끌면 여론의 관심도 시들해지기 때문에 법원의 ‘봐주기 판결’에 대한 부담도 줄어든다.

더욱이 일자리 성적표가 신통치 않은 문재인 정부는 이 부회장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3월19일 국무회의에서 “메모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비메모리 분야의 경쟁력을 높여 메모리 반도체 편중 현상을 완화하는 방안을 신속히 내놓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는 4월24일 대규모 투자계획 발표로 화답했다.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등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연구개발과 생산시설 확충에 133조원을 투자하고, 전문인력 1만5천 명을 채용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부회장 쪽 전략은 일단 통한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의 구속 기간이 만료되는 4월16일 전후로 결론이 날 것으로 예상됐던 ‘국정농단’ 상고심은 4월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 애초 4월18일 전원합의체 평의를 끝으로 선고기일이 정해질 것으로 기대됐지만 지금 상태로는 5월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선고는 마지막 평의가 끝난 뒤 최소 한 달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판결문 작성에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판결문은 먼저 다수의견을 쓴 뒤 이를 토대로 소수의견을 작성하는데, 소수의견이 완성된 뒤에도 판결문 작성은 끝나지 않는다. 소수의견을 검토한 뒤 다수의견을 더 정교하게 수정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시간 끌다 ‘삼바’ 수사 끝나면 불리할 수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청탁을 인정하지 않고 집행유예로 풀어준 2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 부회장과 대향범 관계에 있는 박 전 대통령의 2심에서 경영권 승계 청탁이 인정됐고, 이 부회장의 1심과 박 전 대통령의 1·2심에서 인정된 뇌물 액수가 이 부회장의 2심보다 많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원심을 파기환송하더라도 이 부회장이 곧바로 재수감되지는 않는다. 그의 재수감 여부는 서울고등법원에서 진행되는 파기환송심 결과에 따라 달라진다.

이 부회장 쪽의 시간 끌기 전략이 꼭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현재 검찰에서 진행 중인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 분식회계 수사 결과 경영권 승계를 위한 고의 분식회계임이 인정되면 이 부회장의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검찰 관계자는 “삼바 수사 결과가 파기환송심의 증거로 제출된다면 재판부의 유죄 심증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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