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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풍랑주의보’

북-미 비핵화 협상, 남북관계 교착 국면에서
등록 2019-04-27 05:18 수정 2020-05-02 19:29
4월2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연방대학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4월2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연방대학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기 마련이다.”

지난 4월25일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비난한 북한 정부기관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대변인 담화에 나온 문장이다.

조평통 대변인 담화는 최근 한-미 연합공중훈련을 ‘9·19 군사합의’ 위반이고 배신행위라고 주장하며, 향후 남북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담화는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기 마련이다. 남조선 당국이 미국과 함께 우리를 반대하는 군사적 도발 책동을 노골화하는 이상 그에 상응한 우리 군대의 대응도 불가피하게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기 마련’이란 표현은 4월1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도 등장했다. 김 위원장은 “미국에서는 우리의 대륙간탄도로케트 요격을 가상한 시험이 진행되고, 미국 대통령이 직접 중지를 공약한 군사 연습들이 재개되는 등 6·12 조-미 공동성명의 정신에 역행하는 적대적 움직임들이 노골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기 마련이듯이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이 노골화될수록 그에 화답하는 우리의 행동도 따라서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북, 한-미 연합공중훈련 비난

조평통 대변인 담화는 시기와 주체, 형식이 눈길을 끈다. 4·27 남북 정상회담 1주년을 이틀 앞두고 발표됐다. 이 담화는 여러 차례 판문점선언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바라는 온 민족의 총의가 반영된 역사적인 4·27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며 북과 남이 군사적 긴장 완화와 적대관계 해소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확약한 군사 분야 합의에 대한 노골적인 위반 행위이다.”

최근 북한의 대남 선전 매체 에서 한-미 군사훈련을 문제 삼긴 했다. “남조선 당국이 긴밀한 한-미 공조 유지를 통한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의 선순환적 진전이니, 북·미 대화 재개의 동력을 살리기 위한 중재자, 촉진자 역할이니 하고 횡설수설한 것들을 보면 도대체 남조선 당국에 북남관계를 개선해나갈 의사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남조선 당국의 태도는 온 민족의 실망과 혐오를 자아내는 처사이고 우리(북한)의 아량과 성의를 모독하는 배신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북한 당국 차원에서 대남 경고를 내기는 지난해 평창겨울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풀린 뒤 이번이 처음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조평통이 대변인 담화 형식으로 메시지를 발표한 것은 지난해 1월23일 이후 458일 만”이라고 설명했다.

북한 조평통은 남북관계에서 북한을 공식 대변하는 국가기관이다. 리선권 조평통 위원장이 남북 고위급회담 북쪽 단장을 맡고 있다. 조평통은 북한 내각 소속으로 알려졌으며, 최근 김 위원장이 직접 관할하는 국무위원회 산하로 옮겼다는 분석도 나온 바 있다.

조평통은 남한 당국을 비난하면서 대변인 담화 형식을 띠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발표 형식에서 수위를 세밀하게 조정한 것이다.

북한은 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힐 때 사안과 메시지 강도에 따라 발표 주체, 발표 형식을 엄격하게 정한다. 남북관계는 이번처럼 조평통, 북-미 관계는 외무성이 나선다. 남북관계는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조평통이 나서지만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면 국방위원회, 인민군최고사령부 등이 나선다.

지난해 2월9일 평창겨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손 흔드는 문재인 대통령 부부 뒤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도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2월9일 평창겨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손 흔드는 문재인 대통령 부부 뒤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도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평창’ 이후 북 당국 차원 첫 대남 경고

북핵 문제, 통일 방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등 국가 차원의 최고 수준 대응이 필요하면 국가 이름이 들어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공화국) 정부 성명’ ‘공화국 정부 대변인 성명’이 나온다. ‘공화국 정부 성명’이 ‘공화국 정부 대변인 성명’보다 세다. 발표 형식은 대변인이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 대변인 담화, 대변인 성명, 기관명의 성명순으로 높아진다. 일상적인 남북관계일 때는 조평통이 주체로 나서고, 형식은 조평통 대변인과 기자와 문답-조평통 대변인 담화-조평통 대변인 성명-조평통 성명 등의 순서로 강도가 세진다. 조평통은 대변인 담화를 통해 메시지를 냈다. 북한 당국이 나서서 대남 압박 수위를 높이되 대변인 성명 아래로 수위를 조정한 것이다.

조평통 대변인 성명부터는 ‘북한의 권위 있는 기관의 공식적 입장을 대변한 법적 성격의 문건’이다. 2009년 2월 조평통 대변인 성명 성격을 놓고 남한이 ‘일방적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북한 노동당 기관지 은 ‘조평통 성명은 북쪽 당국을 공식 대변하는 법적 성격의 문건’이라며 “법적 성격의 문건은 한번 채택되면 그만이다. 거기에 흐지부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남조선 당국도 잘 알 것”이라고 재반박한 바 있다.

비록 북한이 발표 형식을 낮춰 수위를 조절했지만 지난해 ‘평창의 봄’ 이후 처음으로 북한 당국이 남한 당국을 비난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4월11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대남 발언과 행보가 거칠어지고 있다.

‘조평통 대변인 담화’ 형식 예사롭지 않아

김정은 위원장은 4월12일 시정연설에서 한국 정부를 두고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청와대는 ‘단어 하나하나보다는 큰 틀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4월1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명시적으로 이에 답변 형태로 발언하지 않았고, 북-미 정상회담을 하겠다는 김 국무위원장의 의지를 높게 평가했다.

4월12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은 2기’가 공식 출범한 뒤, 김 위원장은 ‘북-미 3차 정상회담 뜻을 밝히면서 대화 시한을 올해 말까지로 한정하고 미국의 입장 전환을 촉구’(4월13일)했다. 그는 4월16일 평양을 방어하는 공군부대를 찾아 전투비행 훈련을 ‘지도’했다. 4월17일 김 위원장은 신형전술유도무기 사격 실험을 참관했다. 그는 “이 무기 체계의 개발 완성은 인민군대의 전투력 강화에서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사변”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일부에서는 핵무기 소형화와 연계된 핵능력을 과시했다는 분석이 나왔지만, 합동참모본부는 북한 신형 전술유도무기가 탄도미사일이 아니라 지상 전투용 유도무기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중국 외교부는 북한의 신형 전술무기 발사 실험과 관련해 ‘한반도 문제 관련 정치 해결 과정은 중요한 단계에 있으며, 관계 각국 특히 북-미 쌍방이 상호 협조하여 대화를 강화할 것을 바란다’는 입장을 내놨다.

지난해 10월15일 판문점에서 남북 고위급회담 북쪽 수석대표 리선권(왼쪽 셋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10월15일 판문점에서 남북 고위급회담 북쪽 수석대표 리선권(왼쪽 셋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4~6월 한반도 주변국 연쇄 정상회담

북-미 비핵화 협상과 남북관계 교착 국면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북한은 4월2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8년 만에 러시아와 정상회담을 했다. 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언급한 대로 이 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다자협상테이블을 만들고, 러시아로부터 경제 지원 등을 받기를 기대했다. 러시아는 북한의 단계적·동시적 비핵화 해법을 지지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편에서는 6자회담이 중단된 뒤 한반도 문제에서 한동안 벗어나 있다가 관련 논의의 프레임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김 위원장은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3차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2차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4차례)을 만났고, 이번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다. 다음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만나면 김 위원장은 역내 주요국 지도자를 모두 만나 국제사회에서 리더십을 강화할 수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북-러 정상회담 뒤 4월26일 중국 베이징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중-러 정상회담을 연다. 아베 총리는 4월26~27일 미국을 찾아 트럼프 대통령과 미-일 정상회담을 한다. 4월11일 한-미 정상회담 이후 4월 내내 한반도 주요국 정상 외교전이 뜨겁다.

5월 하순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을 국빈 방문하고, 6월 하순 일본 오사카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이 열린다. 올해 안에 한-중 정상회담, 북-중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이 나오고, 이르면 상반기에 시진핑 국가 주석이 남북한을 잇달아 방문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중국은 5월이나 6월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 무역협상 타결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북-러 정상회담 결과를 보고 남북한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4월25일 국회에서 열린 4·27 남북 정상회담 1주년 행사 기념 강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5·6월 방일을 거론하며 “우리가 그런 계기를 어떻게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한 과제”라고 밝혔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한반도 주변국 연쇄 정상 외교를 활용해 비핵화 협상 모멘텀을 살려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비핵화 협상 모멘텀 살려야

지난해 5월 판문점 북쪽 구역 통일각에서 ‘2차 남북 정상회담’을 한 뒤 문재인 대통령은 “산의 정상이 보일 때부터 한 걸음 한 걸음이 더욱 힘들어지듯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완전한 평화에 이르는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지만, 국민이 제게 부여한 모든 권한과 의무를 다해 그 길을 갈 것이고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상이 보인다는 건 목표가 가까워졌다는 뜻이지만, 걸어온 길로 인한 피로가 누적되기 때문에 걸음을 내딛기 쉽지 않다. 작은 걸음이라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멈추지 않아야 비로소 보이는 정상에 이를 수 있다.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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