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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쓴 이재용, 위기로 위기 넘기?

특검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재판부 기피신청… ‘코로나19 사태’ 속 책임 있는 기업인 이미지 반전 꾀해
등록 2020-03-07 05:30 수정 2020-05-02 19:29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가운데)이 3월3일 경북 구미시에 있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을 방문해 생산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가운데)이 3월3일 경북 구미시에 있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을 방문해 생산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3월3일 경북 구미에 있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을 방문했다. 이곳은 전날까지 모두 4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구미사업장은 2월22~24일, 2월29일~3월1일 두 차례 공장 문을 닫았다. 이 부회장의 방문은 구미사업장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한 행보였다. 이 부회장은 직원들과 차담회를 하고, “저를 비롯한 회사는 여러분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 모두 힘을 내서 함께 이 위기를 이겨내, 조만간 마스크 벗고 활짝 웃으며 만나자”고 말했다고 한다.

재벌 총수가 직원들을 격려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전혀 아니다. 문제는 언론의 보도 태도다. 이튿날 를 포함한 거의 모든 언론이 이 소식을 경제면 주요 뉴스로 전했다. 이 뉴스는 그가 전직 대통령에게 수십억원의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유죄가 인정된 피고인이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그 대신 ‘코로나 사태’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경영 일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책임 있는 기업인으로 보이게 한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댓글들은 그를 ‘국가적 재난에서 국민을 구해낼 진정한 리더’로 추어올린다. ‘국정농단’ 집단에 뇌물을 갖다 바친 부도덕한 기업인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다. 불과 2년여 만에 벌어진 기막힌 ‘반전’이다.

이 역설적 상황을 가능케 한 것 중 하나는 이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재판부다. 대법원은 원심(2심)이 이 부회장의 뇌물 및 횡령 액수를 너무 적게 인정한 잘못이 있으니 다시 재판하라고 돌려보냈는데도, 파기환송심 재판부(서울고법 형사1부, 재판장 정준영)는 이 부회장을 집행유예로 풀어준 2심 재판부(서울고법 형사13부, 재판장 정형식)보다 더 편파적으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편파적인 재판 진행에 특검팀 반발

정준영 재판장은 파기환송심 첫 공판인 2019년 10월25일 ‘미국 연방양형기준 제8장을 참고한 준법감시제도’를 언급하면서 “이 사건 재판 진행이나 재판 결과와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삼성이 준법감시제도를 만들면 2심 형량(징역 2년6개월·집행유예 4년)을 유지할 것이라는 의심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1월17일 열린 4차 공판에서 정 재판장은 “삼성이 만든 준법감시위원회(준법감시위)의 실효성을 평가하기 위해 전문심리위원제도를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삼성 준법감시위를 이 부회장의 양형 사유로 인정하겠다는 것으로, 첫 공판 때 자신이 했던 말을 뒤집은 것이다.

반면 정 재판장은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신청한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사기 관련 수사기록 등 23개 증거는 모조리 기각했다. 정 재판장은 ‘핵심 증거 8개만이라도 증거로 채택해달라’는 특검팀의 이의신청도 기각했다. 이 부회장에게 불리한 양형 요소는 모두 기각하고, 그에게 유리한 준법감시위는 양형 요소로 채택한 것이다. 이처럼 편파적인 재판 진행에 박영수 특검팀이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2월24일 특검팀이 ‘정준영 재판장’에 대한 기피신청을 낸 것은 예상 밖의 강수였다(특검팀은 재판부가 아닌 재판장에 대한 기피신청을 냈다. 두 배석판사는 기피 사유가 특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소를 제기한 쪽(검찰, 특검)에서 재판부에 대해 기피신청을 내는 것은 매우 드물다. 법원에서 잘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례를 보면 기피신청은 주로 피고인 쪽에서 낼 때 인용된다. 판사가 법정에서 피고인의 유죄를 예단하는 취지의 발언을 하거나, 언론에 보도된 혐의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피고인에게 말한 경우 등 피고인에게 불리할 때 기피 사유가 인정됐다.

2017년 8월7일 박영수 특별검사(가운데)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중앙지법 청사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2017년 8월7일 박영수 특별검사(가운데)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중앙지법 청사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용 ‘국정농단’ 재판,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또 기피신청 인용 여부를 결정할 때까지 공판은 중단되기에 재판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재판이 길어지면 불구속 상태인 이 부회장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의 부정적 이미지는 시간이 갈수록 희석되고,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한 삼성의 언론플레이는 더욱 정교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박영수 특검팀이 재판장 기피신청을 낸 것은 파기환송심의 편파성이 임계점을 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검 관계자는 “지금 재판부의 태도로는 이 재판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더 이상 재판을 진행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국정농단 사건에서 이 부회장에 대한 재판은 이번 파기환송심이 사실상 마지막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특검과 이 부회장 쪽은 양형에 대해서만 다투고 있기 때문에 대법원에 재상고할 수 없다. 형사소송법은 ‘양형 부당’을 이유로 한 상고는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이 선고됐을 때만 허용한다. 따라서 2심 때 이 부회장에게 선고된 집행유예가 파기환송심에서도 유지되면 특검은 재상고할 수 없다.

특검의 기피신청은 이 부회장 쪽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팀이 정 재판장의 재판 진행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지만 실제로 기피신청을 낼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 쪽은 특검이 재판부를 압박하려는 의도로 보는 것으로 전해졌다. 설사 재판이 장기간 지연되더라도 정준영 재판장이 법원 정기인사로 교체될 수 있기 때문에 특검 쪽이 꼭 불리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박영수 특검팀은 최근 70여 쪽에 이르는 기피신청 사유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사유서에는 특검이 파기환송심의 편파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자세히 적힌 것으로 전해졌다. 특검팀 관계자는 “기피신청 사유서를 읽어본 법조인이라면 재판부가 얼마나 편파적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 준법감시위는 감경 사유 될 수 없다

특검은 삼성 준법감시위의 허구성을 집중해서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가 준법감시제도의 근거로 제시한 ‘미국 연방양형기준 제8장’(제8장)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다. 제8장의 양형기준은 개인이 아니라 회사에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에 부과할 벌금을 어떻게 산정할지에 관한 기준일 뿐이다. 이를 이 부회장의 양형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미 연방양형기준의 취지를 왜곡한다.

설사 ‘재판장 마음대로’ 제8장을 이 부회장 재판에 적용하더라도 삼성 준법감시위는 감경 사유가 될 수 없다. 제8장은 “범죄행위시를 기준으로 그 이전부터 준법감시제도가 실효적으로 이행되고 있어야” 감경 사유가 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삼성처럼 재판장의 주문에 따라 사후에 만든 준법감시위는 감경 사유가 될 수 없다. 또 이 부회장처럼 ‘의도적으로 범행을 무시한 개인’이 조직(회사)의 최고책임자인 경우에는 감경 사유의 적용이 배제된다. 회사의 최고책임자는 준법감시위의 최고책임자이기도 해서 그의 범행은 오히려 준법감시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무엇보다 삼성 준법감시위는 대한민국 사법시스템에서 통용되는 ‘양형기준’에 비춰볼 때 감경 사유가 될 수 없다. 법원조직법의 양형기준 가운데 ‘진지한 반성’ ‘범행 후의 정황’을 기준으로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태가 본격화한 2016년 10월까지도 범행을 가장, 은폐했고 국회 청문회에서는 위증까지 했다. 또 횡령한 회삿돈을 일부 변제했지만,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으로 인한 소액주주와 국민연금공단의 피해는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부회장은 법원조직법의 양형기준으로 볼 때 불리한 요소가 더 많다. 뇌물공여 혐의에서 ‘청탁 내용이 불법하거나 부정한 업무 집행과 관련된 경우’ ‘피지휘자(부하직원 등)에 대한 교사’는 양형 가중요소로 작용한다. 횡령·배임 혐의에서도 ‘대량 피해자(주주, 채권자 등)를 발생시킨 경우’ ‘범죄 수익을 의도적으로 은닉한 경우’ ‘지배권 강화나 기업 내 지위 보전의 목적이 있는 경우’는 가중요소가 된다. 따라서 이 부회장은 앞서 대법원 판결에서 뇌물공여와 횡령·배임 혐의에서 모두 유죄가 인정됐기에 파기환송심이 정상으로 진행된다면 집행유예 판결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게 특검팀의 판단이다.

국정농단의 그림자는 희미해지고

특검팀은 정 재판장과 이 부회장 변호인단의 ‘근무 인연’도 사유서에서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대법원 선고(2019년 8월29일) 다음날에 추가로 지정된 박아무개 변호사가 정 재판장과 서울중앙지법에서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음을 지적했다. 특검에 따르면 박 변호사는 변호인 의견서에는 서명, 날인했지만 공판에는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공판에 나오지 않으면서 의견서에는 이름을 올리는 건 대법관 출신 ‘전관’들이 주로 쓰는 수법이다.

특검이 낸 기피신청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질지는 불투명하다. 기피신청이 어느 쪽에 유리한 결과를 낳을지도 미지수다. 확실한 건 시간이 지날수록 국정농단의 그림자가 희미해진다는 사실이다. 박영수 특검은 지금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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