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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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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도 몰랑] 나는 왜 그때 안도했을까

자식이 여성의 고통을 피해가기 바라는 마음과 육아휴직의 상관관계
등록 2020-05-16 07:42 수정 2020-05-21 01:37
주중에 일하는 아내는 주말엔 주로 육아를 하고 나는 집안일을 하는데, 월요일 아침이면 아내는 “몸이 젖은 빨래처럼 무겁고 얻어맞은 것처럼 아프다”고 말한다.

주중에 일하는 아내는 주말엔 주로 육아를 하고 나는 집안일을 하는데, 월요일 아침이면 아내는 “몸이 젖은 빨래처럼 무겁고 얻어맞은 것처럼 아프다”고 말한다.

“다리 사이에 뭐가 보이네요.”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산부인과 의사가 초음파 영상을 보며 말했다. 남자아이란 이야기를 듣고 난 어떤 기분에 휩싸였는데, 이런 기분이 든 것 자체가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어 난감했다. 나는 그 뒤로도 여러 번 왜 그때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곱씹었다. 그때 나는, 안도했었다.

꼭 아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성별이 뭐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딸이 좀더 키우기 수월하다는 이야기가 많고, 조카도 아들이고 해서 내 아이는 딸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조금 더 컸다. 당장 나부터 어머니를 섭섭하게 해드릴 때가 많아 “아들놈 키워봐야 소용없다” “너 같은 아들 낳아서 한번 고생해봐라”는 말을 여러 번 들은 터였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안도했던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여성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차별과 고통을, 내 아이는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자식이 최대한 고통을 피해가며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본능이 이성보다 앞서 반응한 것이었다. 만약 딸이었다면 어땠을까. 사랑스러운 딸을 얻어 기뻐했겠지만, 마음 한편에선 이 아이가 살아가며 겪어야 할 어려움을 걱정했을 것이다.

지난 1월 육아휴직을 시작하자마자 석 달간 구글에서 운영하는 육아휴직자를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다. 육아휴직 중인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재교육 프로그램으로는 세계 최초였다(이런 프로그램은 꼭 국내 기업이 아닌 외국계 기업이 시작하는 것 같다). 마지막 강의는 컨설턴트인 장은지 이머징리더십인터벤션즈 대표가 ‘여성, 조직문화, 리더십’이란 제목으로 진행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중 새삼 놀란 대목이 있었다. 조직에서 고위급 여성 관리자가 적은 것은 단순히 고위직이 적은 것 때문이라기보단, 육아와 가사 부담으로 인해 관리자가 되는 첫 단계인 팀장급 직책부터 진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2011년 매킨지 조사를 보면, 한국 여성 40%가 기업에 들어가는데 이 중 오직 6%만이 관리자가 되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단 6%라니. 아시아에서도 최하위권이었다(인도 9%, 말레이시아 11%, 중국 21% 등).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육아휴직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적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만약 남성 육아휴직이 늘어나 육아휴직을 쓰는 게 당연시된다면 어떨까? 이미 활성화된 나라들이 보여주듯이 출산, 육아, 휴직으로 인한 여성의 경력단절이 줄어들 것이다. 다수를 차별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나만 해도 내가 휴직을 선택할 때 이로 인해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리 회사는 사회 전체적으로 봐도 빠른 편인 2000년 남성이 육아휴직을 시작해, 이젠 문화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 보면 갈 길은 멀다. 1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바, 2018년 기준 육아휴직이 가능한 전체 남성 노동자 가운데 육아휴직을 이용한 비율은 1.2%에 그쳤다. 여성의 육아휴직 사용률은 11.9%였다.

30여 년 뒤 내 아이가 혹시나 아이를 낳게 된다면, 꼭 육아휴직을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 아이와 아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평등 사회를 만들어가는 작은 디딤돌이 되는 일이기도 하니까. 여성 동료가 부담하는 육아와 가사를 똑같이 감당함으로써 여성의 삶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같은 자리에 설 때, 조금은 더 좋은 동료가 될 수 있다고. 물론 그때는 그런 말을 할 필요조차 없는 세상이 돼 있다면 좋겠지만.

글·사진 김지훈 <한겨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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