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사이에 뭐가 보이네요.”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산부인과 의사가 초음파 영상을 보며 말했다. 남자아이란 이야기를 듣고 난 어떤 기분에 휩싸였는데, 이런 기분이 든 것 자체가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어 난감했다. 나는 그 뒤로도 여러 번 왜 그때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곱씹었다. 그때 나는, 안도했었다.
꼭 아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성별이 뭐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딸이 좀더 키우기 수월하다는 이야기가 많고, 조카도 아들이고 해서 내 아이는 딸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조금 더 컸다. 당장 나부터 어머니를 섭섭하게 해드릴 때가 많아 “아들놈 키워봐야 소용없다” “너 같은 아들 낳아서 한번 고생해봐라”는 말을 여러 번 들은 터였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안도했던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여성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차별과 고통을, 내 아이는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자식이 최대한 고통을 피해가며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본능이 이성보다 앞서 반응한 것이었다. 만약 딸이었다면 어땠을까. 사랑스러운 딸을 얻어 기뻐했겠지만, 마음 한편에선 이 아이가 살아가며 겪어야 할 어려움을 걱정했을 것이다.
지난 1월 육아휴직을 시작하자마자 석 달간 구글에서 운영하는 육아휴직자를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다. 육아휴직 중인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재교육 프로그램으로는 세계 최초였다(이런 프로그램은 꼭 국내 기업이 아닌 외국계 기업이 시작하는 것 같다). 마지막 강의는 컨설턴트인 장은지 이머징리더십인터벤션즈 대표가 ‘여성, 조직문화, 리더십’이란 제목으로 진행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중 새삼 놀란 대목이 있었다. 조직에서 고위급 여성 관리자가 적은 것은 단순히 고위직이 적은 것 때문이라기보단, 육아와 가사 부담으로 인해 관리자가 되는 첫 단계인 팀장급 직책부터 진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2011년 매킨지 조사를 보면, 한국 여성 40%가 기업에 들어가는데 이 중 오직 6%만이 관리자가 되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단 6%라니. 아시아에서도 최하위권이었다(인도 9%, 말레이시아 11%, 중국 21% 등).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육아휴직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적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만약 남성 육아휴직이 늘어나 육아휴직을 쓰는 게 당연시된다면 어떨까? 이미 활성화된 나라들이 보여주듯이 출산, 육아, 휴직으로 인한 여성의 경력단절이 줄어들 것이다. 다수를 차별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나만 해도 내가 휴직을 선택할 때 이로 인해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리 회사는 사회 전체적으로 봐도 빠른 편인 2000년 남성이 육아휴직을 시작해, 이젠 문화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 보면 갈 길은 멀다. 1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바, 2018년 기준 육아휴직이 가능한 전체 남성 노동자 가운데 육아휴직을 이용한 비율은 1.2%에 그쳤다. 여성의 육아휴직 사용률은 11.9%였다.
30여 년 뒤 내 아이가 혹시나 아이를 낳게 된다면, 꼭 육아휴직을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 아이와 아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평등 사회를 만들어가는 작은 디딤돌이 되는 일이기도 하니까. 여성 동료가 부담하는 육아와 가사를 똑같이 감당함으로써 여성의 삶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같은 자리에 설 때, 조금은 더 좋은 동료가 될 수 있다고. 물론 그때는 그런 말을 할 필요조차 없는 세상이 돼 있다면 좋겠지만.
글·사진 김지훈 <한겨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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