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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법 제정됐지만 아무도 웃을 수 없었다

중대재해법 제정됐지만 5인 미만 사업장 적용 제외, 인과관계 추정 삭제 등 후퇴
등록 2021-01-16 15:29 수정 2021-01-18 02:27
2021년 1월8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 본관 앞 중대재해법 제정 촉구 단식농성 해단식에서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울먹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2021년 1월8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 본관 앞 중대재해법 제정 촉구 단식농성 해단식에서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울먹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새로운 법제도의 등장은 사회구성원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자 행동의 준거 틀이 되곤 한다. 2021년 1월8일, 짧게는 33일간 단식농성 투쟁으로 제정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법)’이 그렇다. 노동자와 시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기업의 행위는 ‘기업범죄’임을 분명히 했다. 그동안 기업이 안전의무를 위반해 발생한 산업재해와 시민재해임에도 피해자 개인의 불운이나 잘못으로 취급되던 것이, 이제는 사업주의 책임이란 점을 분명히 해 처벌할 수 있게 됐다.

1993년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던 때처럼 ‘규범의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현재 ‘비동의간음죄’로 개정운동이 한창인 형법상 강간죄는 당시까지 ‘정조에 관한 죄’로 명명할 정도로 성차별과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것과 유사하다.

노동자 재해에 원청과 경영자 처벌

무엇보다 하청업체 말단 관리자만 처벌해 재발 방지와 안전조치가 이어지지 못하던 현행 산업안전보건법과 달리, 원청과 경영책임자에게 직접 안전의무를 부과했다. 계약 형태와 관계없이 하청관계에 있는 모든 노동자와 특수고용형태노동자의 재해에 대한 원청 사업주 처벌이 가능해졌다. 사고사만이 아니라 부상과 질병도 중대재해에 포함된다. 전자산업이나 메탄올 등 위험물질을 다루는 일을 하다 병을 얻는 경우도 해당한다. 또한 솜방망이 처벌을 하지 못하도록 경영책임자에게 1년 이상 징역을 내리도록 형사처벌 하한을 정했고 징벌적 손해배상도 법에 명시했다.

그러나 거대 양당 합의로 법안 명칭에서 ‘기업’이 빠지는 등 실효성이 의심될 만큼 내용이 후퇴했다. 가장 큰 문제는 제3조(적용범위)에 떡하니 5명 미만 사업장 적용 배제가 명시된 것이다. 근로기준법 제11조의 적용 제외로 인해 5명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이미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데, 안전조차 사각지대에 놓이게 됐다. 임금 등 노동조건과 사회보험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죽음조차 차별받게 된 것이다. 중대재해가 발생해도 기업주는 처벌받지 않는 면책특권이 생겼다.

‘5인 미만 사업장 적용 제외’는 10만 명의 국회 국민동의청원으로 발의된 법안뿐 아니라 어느 의원의 발의 안에도 없었다. 임시국회 만료를 이틀 앞두고 김도읍 의원(국민의힘)이 갑자기 내놓은 조항이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소상공인 부담’을 운운하며 압박하던 터라 거대 양당의 공모로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그 뒤 3일 만에 5명 미만 사업장인 플라스틱 재생업체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가 파쇄기에 끼여 숨졌다. 사고 원인은 더 조사해봐야겠으나 ‘2인 1조 작업’만 지켰어도 살릴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10명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김재순의 아버지 김선양씨 표정이 어두워졌던 것도 이 때문이다.

소상공인 보호는 허구의 프레임

5명 미만 사업장에 다니는 노동자가 적지 않다. 2018년 기준 587만 명으로, 노동자 4명 중 한 명이다. 전체 산업재해 사망자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은 20%나 된다. 백혜련 의원(더불어민주당)은 “5인 미만 사업주는 산업안전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고, 5인 미만 사업자의 원청업체는 중대재해법으로 처벌받는다”고 했으나, 이는 하나만 짚었을 뿐이다. ‘적용 제외’라는 제도적 결함이 가져올 편법과 안전조치 부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지금도 가짜 5명 미만 사업장이 많은데, 이제 더 늘어날 것이다.

또한 큰 비용이 들지 않음에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하지 않아 발생하는 영세사업장의 산재를 막을 수 없게 됐다. 소상공인 보호는 허구의 프레임이다. 중대재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가 안전조치 마련을 지원하면 될 일이다. 사업장 규모의 영세함을 이유로 안전을 소홀히 하도록 면책을 주는 것은 ‘생명의 존엄’이라는 가치를 지우는 일이자, 헌법에 있는 평등 원칙에도 반하는 일이다.

중대재해법의 실효성이 문제가 된 이유는 다른 중요한 조항도 유예되거나 삭제됐기 때문이다. 전체 사업장의 98%를 차지하고 산재 사망자 10명 중 6명이 속한 50명 미만 사업장에도 3년이나 적용 유예를 했다. 4년 동안 2% 사업장에만 법을 적용하는 셈이니 심각한 문제다. 직장 내 괴롭힘 적용도 삭제됐고, 발주처도 처벌 대상에서 제외됐다. 건설업과 조선업처럼 발주처가 무리하게 공사 기간 단축을 요구하면서 발생하는 산재 사망에 대한 책임을 묻기 어렵게 됐다. 경기도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참사처럼 위험작업을 동시에 하는 혼재작업은 공사기한을 맞추다가 생기는 일이다. 게다가 유예기간이 1년이라 법은 2022년에나 발효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영책임자 정의’에 사업을 대표하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 외에 ‘또는 안전보건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을 삽입해 회사 대표가 안전담당이사 등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이외에 안전관리를 감독할 의무가 있는 공무원들에 대한 처벌도 빠졌다. 기업의 편의를 봐준다는 명목이나 유착에 의한 불법 인허가로 발생한 산재와 시민재해가 빈번함에도 공무원 처벌은 삭제됐다. 세월호나 스텔라데이지호처럼 낡은 선박의 증·개축을 허가해준 정부 부처의 책임이나, 22명이 숨진 장성요양병원 화재 참사처럼 공무원과 병원의 뇌물 수수로 이뤄진 건물 인허가만 떠올려도 해당 조항의 필요성은 충분하다. 산재 사건 재범률이 98%(2017년 기준)임을 고려하면 사고가 반복해서 발생하거나 사고 은폐 기업에 대해서는 인과관계를 추정하도록 하는 조항을 넣어야 하지만, 이 또한 삭제됐다. 전체적으로 형량이 낮아졌고, 벌금의 경우 하한을 정하지 않아 책임을 가볍게 했다.

그래서 국회에서 농성하던 사람들은 법이 통과됐다는 소식에 아무도 웃을 수 없었다. 1월8일 농성 해단식에서 고 이한빛 피디의 아버지 이용관씨가 산재와 시민재해로 죽은 사람들을 호명하며 한 얘기처럼 “많이 부족하지만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되는 역사적인 날”은 죽음과 유가족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미숙씨 “끝이 아니라 시작”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법이 만들어졌지만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했듯이, 실효성 있는 법이 되도록 법 적용을 감시해야 한다. ‘김용균 투쟁’의 결과물로 28년 만에 대폭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조차 시행령을 개악해 무력화했던 것을 기억하자. 벌써 재계의 반격이 들어오고 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경제단체와의 간담회에서 “중대재해법 통과에 합의한 적이 없다”며 보완 입법을 운운한다. 지금보다 더 효력 없는 법으로 만들겠다는 선포다. 먼저 직업병 종류 등 시행령에 위임한 사항들이 제대로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5명 미만 사업장에도 법이 적용되도록, 후퇴한 법안을 개정하기 위한 실천을 벌여야 한다.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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