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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통치’가 보이지 않는다

‘한강 사망 사건’은 명확한 사회적 사건인 평택항 산재보다 왜 더 ‘사회적 사건’이 되었는가
등록 2021-05-29 11:07 수정 2021-06-02 02:45
손정민씨 사망 사건과 관련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평화집회가 2021년 5월16일 서울 서초구 반포 수상택시 승강장 인근에서 열리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손정민씨 사망 사건과 관련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평화집회가 2021년 5월16일 서울 서초구 반포 수상택시 승강장 인근에서 열리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어릴 때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바닷가에 놀러 갔을 때다. 어른들은 왁자하게 술을 마셨고 아이들은 밖에서 뛰어다녔다. 아이들과 밀치고 달리고 하다가 그만 바닷가 제방 밑으로 떨어졌다. 그 밑은 깨진 병이며 쓰레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지나가던 어른에게 나 좀 올려달라 말하고 겨우 올라왔는데 그분이 어머니를 찢어지는 목소리로 부르는 것까지 기억하고 기절했다.

다시 눈 떴을 때 나는 병원에 누워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동네 의원의 의사가 내가 곧 죽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발가락이 깨진 병에 찔려 반쯤 날아가고 엄청난 고열이어서 가망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다들 절망하고 있을 때 그래도 한번 살려보겠다고 어머니가 밤중에 택시를 대절해서 부산의 큰 병원까지 달려갔다. 다행히 나는 살아났다. 아직도 가끔 그때 나를 안고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슬픔에 애끊던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자식을 잃는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은 없을 것이다. 한강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고 손정민씨의 아버지가 쓴 글을 보면 자식 잃은 아버지의 애통함이 절절히 느껴진다. 생전 손정민씨가 아버지와 주고받은 말들을 보면 살갑기 그지없다. 아버지의 애통함은 조선시대 자식을 잃거나 자식과 멀리 떨어져 절절한 그리움을 토로한 글들을 모은 책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생각나게 한다.

‘논리’와 ‘담론’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그래서인가. 이 사건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이 남다르다. 자식 잃은 부모와 마음을 같이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애도하고 공정한 수사를 촉구하고 한 점 의혹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저렇게 허망하게 내 자식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다른 사건과 달리 유독 더 많은 관심을 끌게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관심과 애도 그리고 정의에 대한 요구는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보지 못한 어떤 높은 수준의 ‘감정 상태’를 보여준다. 코로나19로 집합 금지가 엄격해진 시국임에도 5월16일 손정민씨를 추모하기 위해 200여 명이 모였다. 비까지 내린 날이었다. 일주일여 지나 5월24일에는 수백 명이 모여 추모제를 열었다. 아직 이 사건을 ‘사회적 사건’이라 봐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음에도 말이다.

어떤 이들은 명백히 ‘사회적 사건’인 이선호씨의 죽음(경기도 평택항에서 산업재해 사고로 숨짐)과 비교하며 관심 정도가 왜 이렇게 다른지 한탄하며 묻기도 한다. 분명 사회적으로 보면 고 손정민씨에 대한 사람들의 애도와 연대는 지금까지의 통상적인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개인적 불운, 사적 사건으로 보이는데도 말이다. 이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야말로 ‘사회적 사건’일 것이다.

여러 측면에서 이 사건을 대하는 사람들을 설명하기에 적당한 개념이 ‘과잉’이 아닌가 한다. 경찰에 대한 불신이 만들었다고 해도 보통은 자기 일이 아닌 일에 이 정도로 평범한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잉이다. 사건의 특징이 누리꾼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하다고 보는 이가 있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직접 한강변에 나와 추모하는 저 마음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과잉이다. 사고당한 이가 의대생이라는 점에서 한국 특유의 엘리트주의가 작동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도 한참이나 저 과잉된 열정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이 열정에는 ‘논리’와 ‘담론’만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한국의 보통 사람들 마음에 잠재된 어떤 실재를 건드린 측면이 분명 있다.

코로나19 격리 장병이 페이스북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에 올린 급식 사진. 같은 페이지에는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받지 못해 장애가 생겼다’는 글도 올라왔다. 페이스북 화면 갈무리

코로나19 격리 장병이 페이스북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에 올린 급식 사진. 같은 페이지에는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받지 못해 장애가 생겼다’는 글도 올라왔다. 페이스북 화면 갈무리

행정을 대하는 일반 시민의 무력감

폭력을 제도 내에서 해결하려 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권력이 제도로 폭력을 비호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특히 그 폭력을 권력자가 자행했을 때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제도가 권력을 비호하기 위해 폭력을 은폐하고 축소하고 피해자를 억압하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정의가 제도를 통해 실현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도리어 정의를 요구하다 권력의 폭력만 경험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일선의 행정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불신과 불만이다. 권력을 가진 자의 ‘민원'은 일사천리로 해결된다. 반면 민초의 경우에는 묵살되거나 무시된다. 아니면 자기 소관이 아니라며 여기저기 무한 ‘뺑뺑이’를 돌린다. 한마디로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공공기관이 권력이 없는 자를 대하는 태도는 대충대충 처리하는 무성의이거나 책임 전가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민원을 제기할 때마다 공적 기관의 높은 벽을 실감한다.

2021년 5월24일 보도된, 군복무 중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민간병원에서 제때 치료받지 못해 장애가 생겼다고 폭로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기사에는 권력자의 자식이라면 이렇게 무성의하게 다루고 방치했겠느냐며 권력 유무에 따라 일선 행정이 얼마나 달라지는지에 대한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며 성토하는 글이 많다. 일선 행정의 편파성이 일반 시민이 보통 겪는 ‘주관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선 행정/권력에 대한 불신은 심각한 수준이다. 보통 사람들은 일선 행정에서 자신의 자원과 위치를 알게 되며 굴욕감을 느낀다. 국가를 통해 자신이 당한 폭력에 대해 정의를 실현하려는 피해자가 겪는 것은 자기가 가진 자원의 빈약함에서 나오는 무력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돈이건 권력이건 성적이건, 사회가 철저히 자원의 힘에 따라 움직이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며 그 정글에선 통제하고 규율하는 질서 따위 없다는 것을 학습한다. 핵심은 이것이다. 자원의 힘을 통제하는 질서 따위 없다는 것, 이것이 폭력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세상에 대한 인식이다.

그래서 일반인 대부분은 권력 상층부보다 일선 행정을 더 불신한다. 누구 말처럼 검찰은 저 멀리 있는 권력이지만, 경찰은 대다수 사람의 삶에 실재하는 권력이다. 이 때문에 상층부의 권력구조를 바꾸는 데만 관심 가지는 정치를 극도로 혐오하게 된다. 상층 권력구조 개편이 권력의 민주화가 아니라 지배 엘리트들의 권력다툼으로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친구가 적으로 돌변하고 그것을 권력이 비호한다

일선 행정에 대한 극도의 불신은 일선 행정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 또한 좌절시키며 이들 역시 정의를 바로 세우는 과정을 폭력으로 경험하게 한다. 학교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동으로 서로 뛰어다니는 교사들은 대부분 양쪽 모두로부터 욕먹고 좌절하는 일이 많다.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 누구 편이냐는 불신과 위협 속에 좌절하고 정신적 충격을 받으며 결국 자신도 절망하게 된다. (그 와중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시도해 성공하는 교사들도 있다. 나는 이들을 정말 존경한다.)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려 동분서주하는 동안 제도가 도움되기는 커녕 결정적 순간에 배신한다는 것을 경험한다. 민원인을 맨몸으로 상대함으로써 발생하는 모든 사태에 대해 성심성의껏 처리하려는 사람이 독박을 뒤집어써야 한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공공성의 일선에 선 양쪽 사람들이 모두 깨닫는 게 있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곤혹에 처한 자신을 보호하거나 증언해줄 증인이 배신하거나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배신을 넘어 폭력에 협력하거나 공모하기도 한다. 웹툰 <스위트홈>에 나오는 것처럼, 증인이 돼야 할 친구가 오히려 가해자가 되기를 강요하는 것이 권력이다. 친구의 침묵과 배신, 그리고 친구의 폭력. 학교폭력 경험은 인간에 대한 불신과 경멸을 인간관계의 원점으로 만든다. 믿을 놈은 아무도 없고, 사람을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음을 처절하게 깨닫는다.

친구가 적으로 돌변하고 그것을 권력이 부추기고 비호하며 은폐하는 상황, 이것이 한국 사람들이 언제 내 삶에 벌어질지 모른다고 느끼는 가장 불길한 불안과 분노다. 그 반대편에는 내가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려 해도 결국 불신하며 날것의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있다. 그리하여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일선에 선 사람들끼리 맨몸으로 부딪치며 서로 불신하고 혐오한다.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고 들으면서 ‘권력이 가해자를 비호하면 진상이 은폐되고 밝혀지지 않는다’는 말은, 그 앞뒤 순서를 바꿔 ‘아직 충분히 진상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권력이 가해자를 은폐하고 비호하기 때문이다’와 같은 말이 됐다. 두 말은 전혀 다른 진술임에도 같은 진릿값을 가진 말이 돼버린다. 두 말이 같은 말이 되면 말할 수 없게 된다. 말하면 바로 ‘너는 뭐’라는 낙인이 찍혀버리기 때문이다.

일선 행정, 군 급식이 ‘일선’의 문제일까

이런 이유로 가해 여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사건일수록 결과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뒤에서 어떤 권력이 작동하는 게 아닌지 의심한다. 여기서는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하며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고 움직일 여지라도 있다. 반면 평택항에서 벌어진 산업재해처럼 명확하게 가해가 구조적인 ‘사회적 사건’일 때는 오히려 사람들이 더 움직이지 않는다. 서울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다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부터 시작해, 목소리를 아무리 내도 바뀌는 게 전혀 없었기에 진상을 요구하고 정의를 촉구하는 일에 무력감만 느낀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사회적 사건일수록 외려 사회가 작동하지 않는 한 이유인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 모든 사건 어디에도 ‘통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민과 일선 행정이 충돌하며 공공성과 국가에 대한 불신이 양쪽 모두에서 높아지는 상황을 무관심하게 방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선 행정이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 공공성 신뢰를 회복하도록 동인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잇달아 소집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터지는 군 급식 문제가 대표적이다. 이를 ‘일선’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그렇지 않다. 이는 ‘통치’의 문제다. 통치의 핵심은 상부에서 말단까지 국정의 목표와 방향이 막히거나 끊이지 않고 순환되도록 하는 것이다. 모세혈관 같은 행정의 일선이 활력 있게 시민과 호흡하며 일이 해결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게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것을 풀지 않고 일선의 문제라고만 생각하고 상층 권력구조에만 매몰되면 시민의 불신은 일선 행정뿐만 아니라 국가 시스템 전체와 정치 자체를 향하게 된다. 이는 공공성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며 파국을 몰아오는 반정치의 불씨가 된다. 이 현상이 너무나 불길한 이유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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