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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습생, 학생도 노동자도 아닌

전남 여수 특성화고 3학년 홍정운군 현장실습 사망 사건2018~2019 교육부의 현장실습 규제 완화 이후 예고된 비극
등록 2021-10-16 02:04 수정 2021-10-19 05:54
전남 여수시 웅천동 요트 선착장에 홍정운군을 추모하기 위해 놓인 국화. 여수/장예지 한겨레 기자

전남 여수시 웅천동 요트 선착장에 홍정운군을 추모하기 위해 놓인 국화. 여수/장예지 한겨레 기자

“물을 무서워했다”는 18살 고교생이 바다에 나가 요트 바닥에 붙은 따개비를 따다 목숨을 잃었다. 전남 여수의 특성화고등학교 3학년 홍정운군은 기업체에 현장실습을 나갔다가 2021년 10월6일 참변을 당했다. 홍군의 실습 교육을 맡은 업체의 대표는 ‘기업현장교사’라는 직함을 달고도 10대에게 약속과 법의 울타리를 벗어난 노동을 지시했다. 국가는 검증되지 않은 업체가 청소년들을 값싼 노동자로 부릴 기회를 열어줬고, 홍군의 학교는 쉽게 업체를 골라 그를 현장에 보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고된 비극이었다.

업체 기준 낮추고 현장점검 줄이고

그날 홍군은 ‘요트 바닥에 붙은 조개, 따개비를 긁어내라’는 실습업체 쪽의 지시를 받고 공기통과 오리발, 12㎏ 무게의 납 벨트까지 차고 홀로 물속에 들어갔다. 스킨스쿠버나 잠수기능사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만 18살 미만인 청소년에게 잠수를 비롯한 위험작업을 시키는 건 근로기준법 위반이지만 홍군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2020년 10월 시행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에 따르면 잠수기능사 자격증이 없는 홍군을 잠수 작업에 투입하는 것도 불법이지만 그 역시 홍군으로선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요트업체를 운영하는 이마저 이런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은 적다. 애초에 현장실습생인 홍군을 ‘교육’해야 할 학교와 실습 업체가 만든 실습계획서에 적시된 홍군의 업무는 ‘보트 기관 관리, 항해장비 운용’ 등이다. 요트에 붙은 따개비를 제거하는 일은 포함돼 있지도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허술할 수 있었을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모든 학생이 안전한 환경에서 양질의 현장실습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4년 전인 2017년 11월 제주의 한 생수공장에서 홍군처럼 현장실습 중이던 이민호(19)군이 사고로 숨졌을 때 교육부는 약속했다. 사고 당시 현장실습생 혼자 일했던 것이나 하루 10시간 넘는 초과노동을 한 것까지 두 사건은 닮았다. 학생을 ‘노동자’로 보고 서둘러 취업시키는 데만 급급했던 실습 체계에 참사 원인이 있는 것으로 지목됐다. “학생을 노동력 제공 수단으로 활용하는 ‘조기취업 형태의 현장실습’을 2018년부터 전면 폐지하고, 현장실습 프로그램에 따라 실습지도와 안전관리 등을 하는 ‘학습중심 현장실습’만 허용하겠다.” 김상곤 당시 교육부 장관의 약속이다. 학생이자 노동자였던 실습생의 신분이 학생으로 정리됐으니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게 됐고, 6개월의 실습기간을 1개월 안팎(최대 3개월)으로 줄였다.

그러나 정부의 선언은 금세 휴지 조각이 됐다. 교육부는 2018년 조기취업형 현장실습의 길을 다시 열고 이듬해 현장실습 참여업체 선정 기준을 크게 완화했다. 기업의 규모, 신용등급 등 선정 기준을 낮췄고 현장점검은 네 차례에서 두 차례로 줄였다. 그나마 노무사의 현장점검과 교육청의 승인이 필수적인 ‘선도기업’과 달리 학교 쪽이 재량에 따라 관리·감독하는 기업(‘참여기업’)들에서의 실습도 ‘독려’했다. 부담을 느낀 기업들의 참여가 줄어 학생들의 조기취업 기회가 축소된다는 이유였다. 현장에선 서류심사만으로도 ‘프리패스’ 하는 기업들이 생겼다. 김경엽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직업교육위원장은 “교육부가 일선 학교에 현장실습 업체에 대한 규제를 전반적으로 완화한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보낸 시점”이라고 말했다.

실상 노동자인데 근로기준법 적용 안 돼

홍군이 다닌 업체도 ‘참여기업’이다. 참여기업은 학교 자체 심의만으로 선정할 수 있는데다, 기업 규모 제한이 없다. 홍군의 학교에선 9월16일 교사 6명만 참석한 회의에서 해당 요트업체의 현장실습 적격 여부를 심의해 이를 통과시켰다. 2019년 교육부가 규제를 완화했을 때, 전국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협의회는 “한마디로 사고 날까 부담스러운 기업에까지 조기취업을 시키자는 것”이라며 “학생의 안전 보장이 아니라 기업의 규제 완화, 교육이 아니라 저임금 노동력 확보에만 매달리는 현장실습 제도 아래서 사고는 언제든 다시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당시 나왔던 우려가 홍군 사고로 현실이 된 것이다.

부실한 기준은 부실한 관리·감독으로 이어진다. 2020년 교육 당국의 현장실습 지도점검 횟수는 5만 건에 이르지만 적발된 것은 부당대우 9건, 유해위험업무 4건 등 26건에 그쳤다. 실습생들이 놓인 ‘교육’과 ‘노동’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 현재는 실습 현장의 전문가를 ‘기업현장교사’로 지정해 수당을 줘가며 실습생 교육과 안전관리를 전담하도록 하고 있다. 관련 지침엔 “위험요소가 많은 직무인 경우에는 절대 현장실습생이 독자적으로 실습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홍군이 실습한 요트업체에선 대표가 기업현장교사로 지정돼 있었다. 홍군의 친구는 10월13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홍군이 혼자 작업하는 동안 뭍에 있던 사장은 그마저도 (지켜)보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직업계고 현장실습 제도의 목적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노동자도 학생도 아닌 실습생의 지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문식 전북노동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장실습 제도를 이용해 고졸 취업률을 높이는 정책은 취업의 질을 악화하는 ‘제로섬게임’이다. 현장실습생은 임금 성격의 실습수당을 받으며 사실상 임금노동자로 일하지만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교육부 지침에도 “현장실습생은 근로자가 아니므로 주휴수당이나 연장근로수당이 발생하지 않고, 근로기준법에 따르지 않으므로 1시간 연장 근무하더라도 이에 대해 150% 가산 수당이 아닌 100% 수당만 지급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근본 대책 없으면 폐지해야”

교육부는 전남교육청과 현장실습 사망사고 공동조사단을 꾸리겠다고 10월12일 밝혔다. 이번엔 실습생이 죽지 않는 현장을 만들 대책이 나오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학생들이 죽지 않을 근본 대책이 없다면 현장실습을 지속하지 말라. 수십 년간 파행적으로 운영해온 현장실습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현장실습 폐지뿐이다.” 홍군이 숨진 뒤 꾸려진 ‘현장실습폐지·직업계고 교육정상화 추진위원회’의 목소리다.

이유진 <한겨레> 사회정책팀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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