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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춘언니’ 방식대로 싸운 4644일

‘여성적 언어’로 콜트·콜텍 투쟁 기록한 이수정 감독 인터뷰
등록 2022-04-03 15:52 수정 2022-04-04 16:31
이수정 감독.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이수정 감독.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내게는 상처 입히지 못하는 것, 결코 파묻어버릴 수 없는 것, 바위라도 뚫고 나오는 것이 있으니, 나의 의지가 그것이다. 이 의지는 말없이 변함없이 세월을 뚫고 뚜벅뚜벅 걸어간다. 나의 의지, 나의 오랜 의지는 나의 발로써 걸어간다. 나의 의지는 굳세며 상처 입지 않는다.”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구절을 ‘재춘언니’ 임재춘씨가 소리 내 읽는다.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구절이란 듯이. 영화 <재춘언니>의 한 장면이다. ‘니체 읽기’라니, 해고노동자의 복직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흔히 떠올릴 장면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 영화에서 다룬 콜트·콜텍 해고자들의 투쟁 기간에 노동자들은 문화·예술계와 많은 연대 활동을 했다. 50대(다큐 촬영 당시)의 해고노동자 재춘씨는 문학, 음악, 연극 등에 도전했다.

2022년 3월31일 개봉한 영화 <재춘언니>는 기타 회사인 콜트·콜텍 노동자의 복직투쟁기를 다룬 다큐다. 제목이 보여주듯 영화는 한 인물, 콜트·콜텍 대전 공장에서 기타를 만드는 기능공으로 일했던 재춘씨를 따라간다. 이 영화는 제46회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회특별상,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비프 메세나상을 받았다. 3월29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재춘언니>의 이수정 감독을 만났다.

양승태 대법원장과 박근혜 정부의 거래 중 하나

콜트·콜텍은 유명한 기타 브랜드다. 2007년 회사는 경영상 이유를 들어 직원들을 무더기로 해고하고 국내 공장을 폐쇄해버렸다. 국내 공장에서 만들던 기타는 인도네시아 공장으로 넘어갔다. 해고노동자들은 이런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콜트·콜텍은 세계 기타 시장 점유율이 30%에 이를 정도로 성공한 회사였기 때문이다.

해고노동자들은 법원에 억울함을 호소했고 2009년 정리해고 무효소송 항소심에서 서울고법은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긴박한 경영상의 위기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정리해고를 무효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이 판결은 2012년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파기환송심과 대법원 상고 기각 과정에서 법원은 “미래에 다가올 경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정리해고는 유효하다”는 법 논리를 내세웠다.

이수정 감독이 재춘씨를 만나 다큐를 찍기로 한 것은 대법원 판결이 있던 2012년이다. “당시엔 이렇게 오래 촬영하게 될지 몰랐다. 법원에 항소와 상고가 이어지다가 2014년 결국 졌다. 그렇게 끝날 줄 알았는데 결과와 상관없이 이들은 밴드를 만들어 해고의 부당함을 계속 알렸다. 나도 계속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8년 이 사건이 양승태 대법원장과 박근혜 정부의 재판 거래 중 하나였음이 밝혀졌다.” 2019년 4월, 4644일, 13년 만에 길 위의 투쟁은 끝났다.

<재춘언니>는 ‘여성적 언어’로 재춘의 투쟁과 연대를 기록했다. 남성인 재춘을 ‘재춘언니’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재춘은 요리를 잘해 농성장에서 음식을 만들어 주위 사람들을 챙겼고 격의가 없고 수다를 떨 수 있는 편한 존재였다. 그래서 활동가들이 그를 ‘언니’라고 불렀다. 제목을 이렇게 정한 것도 남성적인 권위를 던져버리고 함께 밥을 먹고 고통 속에서도 즐거움을 나누는 ‘여성적 연대’를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재춘언니>의 한 장면. 시네마 달 제공

<재춘언니>의 한 장면. 시네마 달 제공

유예된 시간에 다시 색깔이 칠해질 때

영화는 격한 투쟁보단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꺼렸던 재춘씨가 다양한 연대를 통해 문화예술 쪽에 도전하는 모습을 그린다. “기타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이었기에 많은 예술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재춘을 비롯한 노동자들이 밴드를 만들었는데 처음엔 가사도 다 틀리고 그랬다. 이런 문화예술 연대도 투쟁의 방식이다. 물론 피켓시위, 단식, 고공농성, 점거 다 했지만 시민들에겐 이런 방식이 훨씬 더 효과적이란 것을 알게 됐다. <재춘언니>에서도 ‘투쟁’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를 묘사하고 싶지 않았다.”

두 딸의 밥을 걱정하는 장면이나 집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딸들과의 갈등 장면을 보면 재춘씨에게서 ‘투사’나 ‘운동가’ 같은 이미지를 찾긴 어렵다. 평범한 우리 아버지의 모습으로 보인다. “우리 모두 어떤 형태로든 다 노동자다. 이 영화는 그 수많은 노동자 중에 성실하게 일했지만 사회에서 쫓겨난 한 아버지의 이야기다. 투쟁 다큐지만 소란스럽고 내밀한 이야길 담으려고 노력한 감정 보고서이기도 하다. 노동자만의 이야기가 아닌 보편적인 이야기로 읽히길 바랐다.”

재춘씨의 시간을 흑백으로 기록한 것도 인상적이다. 그러다 명예 복직 이후 공사장에서 일하는 재춘씨의 근황을 담은 장면은 컬러로 바뀐다. 이수정 감독은 무엇을 의도한 걸까. “천막, 농성장 피켓 등 온갖 정보가 많이 들어간 컬러 화면에서는 관객이 시선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에 흑백을 선택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흐르지만 재춘의 13년은 흑백의 시간, 유예된 시간이란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러다 컬러로 전환한 것은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의미다.”

이수정 감독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꾸준히 귀를 기울여왔다. <깔깔깔 희망버스>(2012)에서는 희망버스에 탄 사람들을 그렸고 <나쁜 나라>(2015)에서는 세월호 이후 1년여간 유족들의 삶을 기록했다. “자본주의가 첨예한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본과 노동의 관계는 무엇인지 고민해왔다. 사회 주류가 아닌 자기 몫이 없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예술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의지는 세월을 뚫고

13년 만에 길 위에서 집으로 돌아온 재춘씨는 현재 경비노동자로 일한다. 3개월 단위로 계약이 갱신되는지라 언제 해고될지 모를 운명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상처 입히지 못하는 것, 결코 파묻어버릴 수 없는 것, 바위라도 뚫고 나오는 것’이니 그는 ‘변함없이 세월을 뚫고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글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사진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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