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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로 위장한 부부…독립운동, 세 번의 사지를 넘다

동덕여고보 수재 박진홍과 그를 존경한 조선문학자 김태준, 서울에서 중국 연안까지의 여정
등록 2023-06-16 13:45 수정 2023-06-19 05:52
1938년 4월8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사상범 박진홍. 국사편찬위원회

1938년 4월8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사상범 박진홍. 국사편찬위원회

1944년 11월27일, 일본이 패전하기 9개월 전이었다. 서울을 떠나 중국 연안까지 가려면 사지(死地)를 세 번 넘어야 했다. 첫째, 조선과 만주국의 국경을 넘어야 했다. 둘째, 만주국과 중화민국 사이의 국경인 산해관을 통과해야 했다. 셋째, 일본군과 팔로군이 총부리를 맞댄 중국 하북·산서성 접경의 교전 지역을 넘어가야 했다.

오래 응시하던 일본군이 던진 질문

첫 번째 관문을 어떻게 건널까. 박진홍과 김태준, 두 사람은 압록강 철교를 걸어서 건너기로 결심했다. 남편은 국방복 차림에 국방모를 썼다. 품에는 대학에서 발행한 신의주 방면 출장명령서와 의사 명함을 지녔다. 색안경을 끼고 큰 가죽가방을 들었다. 가방 속에는 청진기, 주사침, 약간의 약병, 의학서류를 넣었다. 압록강변에 다다르니 갈매기는 쌍쌍이 날아다니고, ‘어야데야’ 뱃노래도 들려오더란다. 그러나 부부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주변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애써 평온한 듯 가장했지만 긴장감이 몸을 옥죄는 탓이었다.

철교 양편에는 일본 경찰과 세관 직원이 지켜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감시했다. 부부 차례가 됐다. 가죽가방 외에 아무런 짐도 들지 않았으므로 조사는 간단했다. 어디 가냐고 묻는다. 남편은 “나는 대학 의사 김Y인데, 이번에 신의주까지 출장 왔다가 오늘 저녁 안동 건너가서 저녁 먹고 건너오려고 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했다. 능숙한 일본어였다. 국경 너머는 만주국 땅이지만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압록강 양쪽이 둘 다 일본의 지배권역이었으므로, 출장 나온 서울의 대학 의사 부부가 저녁 한 끼를 먹기 위해 압록강 너머 안동시를 다녀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졌다. 관리들은 더 묻지 않았다. 이리하여 첫 번째 관문을 별 탈 없이 통과했다.

흥성경찰서에서 발급받은 여행증 양식. 브로커 변S의 명의로 돼 있다. 국경에서 110㎞ 떨어진 흥성부터 24㎞ 지점의 전소까지 여행할 수 있는 증명서이지만, 이를 이용해 산해관까지 곧장 나아갈 수 있었다. 임경석 제공

흥성경찰서에서 발급받은 여행증 양식. 브로커 변S의 명의로 돼 있다. 국경에서 110㎞ 떨어진 흥성부터 24㎞ 지점의 전소까지 여행할 수 있는 증명서이지만, 이를 이용해 산해관까지 곧장 나아갈 수 있었다. 임경석 제공

두 번째 관문은 산해관이었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관문으로서, 전통적으로 중국 관내와 동북 변경 지역을 가르는 경계선이었다. 중국 내지를 가리키는 ‘관내’라는 말이 곧 산해관 안쪽이라는 의미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줄곧 일본군이 점령했지만, 이따금 중국공산당 소속의 항일군대 팔로군이 출몰하는 까닭에 경비가 삼엄했다.

일반 여행객이 열차를 이용해 접근할 수 있는 범위는 산해관에서 동북방 180㎞ 지점인 금주까지였다. 부부는 금주역에서 하차했다. 거기서부터는 여행금지 구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주 거주민이라면 국경 방향으로 70㎞ 떨어진 흥성까지는 왕래할 수 있었다. 여행증이나 출장증명서 같은 서류가 없더라도 말이다. 부부는 마차를 빌려 타고서 시가지를 천천히 일주했다. 지리와 건물 위치를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흥성역에 도착했을 때 일본군 두 명이 승객의 차표를 일일이 점검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부부를 오래 응시했다.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일본군은 “금주 어디에 사는가” “금주경찰서가 어디에 있는가” 따위의 질문을 던졌다. 남편은 술술 대답했다. 마음속에 준비해둔 질문이었다. 약간의 문답이 더 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산해관에서 24㎞ 떨어진 전소(前所)라는 이름의 작은 시가지였다. 그곳까지 가려면 여행증이 있어야 했다. 부부는 브로커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 큰 모험이었다. 왜냐하면 브로커 변S는 “과거에 일본 경찰의 고등 정탐 노릇까지 하던 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남도 일본군 헌병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를 이용해서 감옥에 들어간 힘없는 중국인 농민들에게 석방 운동을 한다고 사기와 횡령을 일삼는 자였다. 만주의 악성 조선인 이주민의 대표적 전형이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김태준·박진홍 부부는 그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2천원을 빌려주기로 합의했다.

압록강 철교를 건널 때 김태준이 착용한 복장. 여기에 큰 가죽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임경석 제공

압록강 철교를 건널 때 김태준이 착용한 복장. 여기에 큰 가죽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임경석 제공

일본 경찰 정탐 노릇을 하던 브로커

10여 일이 지났다. 불길한 소문이 돌았다. 흥성에 있는 조선 사람들이 이 이상한 부부를 약장사로 변장한 혁명가로 본다는 풍설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긴장과 초조와 불안감에 휩싸였다. 결국 담판을 지었다. 여행증을 내기 어렵거든 당장 현금 2천원을 내놓으라고 폭탄 선언을 했다. “이 철면피!”라고 욕설도 했다.

효과가 있었다. 변S는 그 이튿날 돈 300원과 여행증 한 장을 가져다줬다. 또 박진홍을 데리고 경찰서로 찾아갔다. 지면이 있는 사무원들에게 애걸하기 위해서였다. 전소에 있는 일만식당이라는 곳에 몸 팔려가는 가련한 여성이니, 여행증을 떼달라고 청했다. 마침 일본인 여성 사무원이 동정의 뜻을 표했다. 딱한 사정을 들으면서 훑어보더니, 좀체 응치 않는 중국인 사무원에게 허가해주자고 권했다.

결국 1700원에 두 장의 여행증을 매수한 셈이었다. 여행증에는 “공용으로 전소까지 여행함을 인증함”이라는 글귀가 흥성경찰서장 명의로 찍혀 있었다. 붉은 서장 직인과 함께.

전소역은 국경이 가깝기 때문에 경계가 심했다. 일본 헌병 파견대가 항시 경비하고 조선 사람이라면 무조건 징용 대상자로 징발한다는 사정을 변S에게서 들었다. 검문 자체를 피해야 한다는 것, 전소 성내에 들어가서는 문안 길가 네 번째 집 조선 사람 정씨네를 찾으라는 것 등을 일러줬다.

부부는 자정쯤 전소역에 도착하게끔 열차표를 끊었다. 내릴 승객이 거의 다 내렸을 때 두 사람은 역무원들의 휴대용 램프 불빛을 피해가면서 정거장 건물 반대편으로 내렸다. 구내를 빠져나가려면 가파른 내리막길을 거쳐야 했다. 두 사람이 “미끄럼을 지치니 삽시간에 10m 밑에 떨어졌다”고 한다. ‘보기 좋은 활극의 주인공’이 됐노라고 뒷날 김태준은 썼다.

전소성 안으로 들어가 심야에 정씨네 집 창문을 두드렸다. 집주인이 나왔으나 태도가 냉랭했다. 문을 막아서고는 들어오란 말조차 없었다. 찾아온 이유와 경로를 말했는데도 그랬다. 심지어 길 건너편 경찰 파출소에 투숙객을 신고해야 할 의무가 있노라고 겁줬다. 한겨울 밤중이라 추위가 심하고 활극의 흥분이 미처 가라앉기 전이라 온몸이 땀에 젖었다. 박진홍이 나섰다. 정씨를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가 돈 500원, 시계 1개, 남성용 양복 한 벌, 여성용 잠옷 한 벌, 수제 가죽주머니 1개, 기타 여행용품 일체, 돈으로 따져서 2천여원에 해당하는 물품을 건넸다. 그제야 두 사람은 하룻밤 숙박을 허락받았다.

잠을 깨니 모든 준비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소성에서 동라성까지 60리길(24㎞)을 나귀를 타고서 이동할 참이었다. 동라성은 만주국 국경 끝에 있는 소도시로서 산해관과 마주 보는 곳에 있었다. 나귀길 60리는 지루했다고 한다. 오른편으로 만리장성을 바라보면서 걷는 경험하기 어려운 여정인데도 산해관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뿐이었다.

도중에 두 차례 경찰 파출소에서 검문받았다. 그때마다 여행증 덕을 봤다. 어떤 사람이고 용무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다. 전소성의 일만식당 주인을 만나려는데 그가 동라성으로 갔다고 하니, 잠시 그곳까지 가서 그를 좀 만나보고 오겠다고 둘러댔다. 유창한 일본어가 도움이 됐다.

1944년 당시 만주국과 중화민국의 국경선이던 산해관의 오늘날 모습. 임경석 제공

1944년 당시 만주국과 중화민국의 국경선이던 산해관의 오늘날 모습. 임경석 제공

갑작스럽게 시작된 몸 검사

동라성에 도착했다. 어떻게 산해관을 넘을까. 동라성과 산해관은 이웃해 있어 하나의 생활권에 속했다. 매일 정오에 산해관 사람들이 국경 문을 나와 동라성에 와서 배급을 타가지고 돌아갔다. 이 행렬에만 참가하면 용이하게 국경을 돌파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랬다. 동라성에 도착한 부부는 새 나귀를 갈아타고 배급 행렬에 끼어들었다. 보따리 하나도 없는 차림이었으므로, 산해관을 지키는 군경은 나귀 세우란 말도 건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무사히 산해관을 통과했다.

대도시 천진과 북경을 거쳤다. 천진에서는 지인을 만나 푹 쉴 수 있었다. 이제 마지막 여정이다. 북경을 거쳐 중국공산당 관할구역을 찾아가야 했다. 세 번째 관문이었다. 가장 고난도의 여정이었다.

두 사람은 북경에서 서남쪽으로 180㎞ 떨어진 망도현을 여정의 기점으로 삼았다. 그곳까지는 기차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른 새벽에 망도역에 도착했다. 공기는 차고 사면은 캄캄했다. 승객들이 내리니, 일본 헌병이 지시했다. “지금 하차한 사람들 모두 정렬해 서라”고 한다. 그러더니 한 사람 한 사람 몸 검사를 시작했다.

부부는 예상치 않은 상황 전개에 놀랐다. 슬그머니 행렬의 뒤로 빠져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큰길을 찾았다. 망도성 문의 거대한 윤곽이 어둠 속에서나마 멀리 떠올랐다. 그 길을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그런데 역에서 검사받은 승객들이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부부는 길에서 좀 떨어진 오목한 곳에 엎드려서 숨죽인 채 숨어 있었다. 미리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망도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지혜롭지 않았다. 성안에는 삼엄한 일본군의 검문이 기다릴 터였다. 성을 우회하려 했다. 추위에 몸을 떨면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먼동이 터온다. 과연 우회로로 점찍어둔 소로가 보였다.

망도성을 우회한 뒤 다음 목적지로 삼은 곳은 당현성이었다. 망도에서 서쪽으로 20㎞ 떨어진 곳에 자리한 소도시였다. 걸어서 이동하기로 했다.

아뿔싸. 얼마 못 가서 길가에 거대한 토치카(사격 진지)가 있음을 발견했다. 흙주머니와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쌓은 토치카 곁에 파수병이 서서 행색이 수상한 부부를 노려보고 있었다. 부부는 대담하고도 자연스럽게 활보했다. 천진에 거주하는 상인으로서 당현의 값싼 양가죽을 매집하기 위해 왔노라고 답했다. 행리 속에 넣어둔 북경·천진 방면 일본군대 장교 명함 30여 장이 도움됐다.

첫 토치카는 무사히 넘겼지만 놀랍게도 당현에 이르기까지 토치카는 13개가 더 있었다. 교전 지역이라는 실감이 났다. 토치카 한 개를 지나갈 적마다 간이 마르고 창자가 녹았다. 그뿐인가. 박진홍의 발이 부르텄다. 출옥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몸이라 쉼 없는 강행군을 견뎌내기 힘들었다.

토치카 하나 넘겼는데 앞에는 13개가

목적지 당현성은 예상보다 훨씬 작은 도시였다. 문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일본군 헌병대가 주둔해 있고 파수병이 노리고 있었다. 부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정중한 태도로 여관과 식당의 소재를 물었다. 일본군 헌병은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줬다.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부부는 결국 최종 목적지인 이가장 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당현성 서남쪽으로 3㎞ 떨어진 100가구 남짓 있는 마을이었다. 그곳은 팔로군과 은밀히 접선할 수 있도록 주선해줄 중국인 최낙아(崔洛雅) 노인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과연 기대한 바와 같았다. 부부는 거기서 2~3㎞ 떨어진, ‘팔로군 전방공작대 사무처’가 있는 작은 마을로 안내받았다. ‘타도 일본제국주의’ ‘숙청 밀정·특무분자’라고 쓴 커다란 벽보가 붙어 있었다. 일본 군경 앞에서 큰 기침도 못하고 살던 처지에서 보니,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여기서부터는 팔로군 땅이었다. 서울을 떠난 지 한 달 만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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