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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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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등록 2023-12-15 13:51 수정 2023-12-20 03:34

2023년은 아마 특별하게 기억할 것 같습니다. 다른 옷을 입은 것처럼 서걱거리는 날의 연속이어서입니다. 무언가를 확정 짓는 것을 싫어하는데, 매일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냥 싫거나 좋은 것을 논리적으로 포장해야 했습니다. 언제나 속아 넘어가는 편인데, 누군가를 설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밤과 낮의 얼굴을 달리하며 살았습니다. 올해의 마지막에는 저의 2023년 밤의 선생을 소개합니다.

왓챠 제공

왓챠 제공

① <포커 페이스>의 찰리 이미 아는 사람은 포스터의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기대했겠지만 저는 나중에야 그의 진가를 알아보았습니다. 너태샤 리온이 연기하는 찰리는 어지러운 컨테이너에서 일어나 대충 차려입고 카지노로 출근합니다. 쉰 목소리로 끊임없이 떠드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그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습니다. 카지노 재벌 2세가 비밀리에 불러들여 그에게 나쁜 계획을 공유하면서 그의 재능을 이용합니다. 역시 라이언 존슨의 참여작인 <나이브스 아웃>에서 추리작가의 거대 유산을 물려받는 가정부 마르타가 거짓말에 재채기하는 것처럼, 찰리는 거짓말을 본능적으로 알아챕니다. 그래서 찰리는 포커판에서 언제나 승리할 수 있었죠. 1화의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그는 클래식카를 끌고 도망 다니는 처지가 됩니다. 그리고 곳곳에서 사건을 만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범인을 쉽게 알아채지만,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모르기에 그 사이를 논리로 채워야 하는 ‘고통’이 그에게 숙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이 너무 유쾌합니다. 그가 범행의 맥락을 찾기 위해 나뭇가지 맛을 보고 다니는 모습이 며칠째 저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웃겨서. 너태샤 리온의 전작들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러시아 인형처럼> 몇 에피소드도 연출할 만큼 다재다능하다니!

② <스트로베리 나이트>의 히메카와 레이코 오티티(OTT) 시대가 되면서 새것과 헌것이 섞입니다. 올해의 작품이 아니지만 저에게 올해 가장 신선한 인물은 <스트로베리 나이트>(2010~2012) 시리즈의 히메카와 레이코. 어린 시절 범죄 피해자가 됐는데, 자신에게 헌신한 여경을 보고 재판에서 증언하는 용기를 내고 경찰이 됩니다. ‘감’에 맞춰 움직이기에 누구보다도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지만, 경찰이라는 게 마음대로 하라는 조직이 아니죠. 드라마를 움직이는 것은 절망감과 자기희생입니다. 그런 아귀는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맞춰지고 히메카와는 그때마다 절망합니다. 배우를 검색하다가 또 하나의 비극을 만났습니다. 시리즈의 주인공인 다케우치 유코가 2020년 자살하면서, 원작자인 혼다 데쓰야가 책을 계속 내지만, 그가 주인공인 시리즈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뒤늦게 찾아오는 비극이라니!

③ <아무히비 니트북> 1·2 우메모토 미키코 위의 드라마들은 모두 뜨개질하면서 봤습니다. 우메모토 미키코는 일본의 전형적인 ‘원 사이즈’를 벗어난 도안, 화려한 색감과 베리에이션(갑자기 보그△△체!)을 중심으로 급성장한 작가입니다. 그의 뜨개질 가게가 있는 곳은 겨울에도 따뜻한 후쿠오카, 가을에 찾아가본 가게에서 점원은 “이 계절에 후쿠오카 사람 누구도 뜨개질을 안 해요” 합니다. ‘홀로 뜨개질’이라 발견과 완성의 기쁨을 혼자 삼키던 저에게 2023년은 뜨개질 네트워크를 발견한 해였습니다. 뜨개질은 누구에게나 외로운 행위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낮과 밤, 모두 2024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구둘래 편집장 anyone@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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