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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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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명이라도 곁을 지키고 있다는 확신

방청석에 존재하는 시민, 그 자체로 피해자 연대이자 사법 감시가 되는 재판 방청 연대 활동
등록 2024-03-01 07:23 수정 2024-03-05 23:59
2020년 11월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과 관련자들의 선거 공판을 방청하려는 시민들이 방청권 배부를 기다리는 모습. 류우종 기자

2020년 11월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과 관련자들의 선거 공판을 방청하려는 시민들이 방청권 배부를 기다리는 모습. 류우종 기자


2022년 여름 끝자락, 나는 무조건 부산으로 갔다.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1심이 부산지법에서 열린다는 기사를 보고서다. 피해자가 직접 재판을 방청하고 있다는 얘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피해자임에도 (형사재판의) ‘당사자’가 아니라며 기일 통지마저 받지 못한 채 방청석에 홀로 앉았던, 보복의 두려움에 불안해하면서도 재판 내용을 하나하나 기록했던 내 과거가 떠올랐다. 그에게는 나 같은 고립감이 없기를 바랐다. 그날, 낯선 이가 건네는 인사에 긴장하던 김진주씨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하다. 그게 김진주씨 사건에 대한 ‘방청 연대’의 시작이었다. 진주씨는 이제 다른 피해자들의 재판을 방청하며 연대를 이어가고 있다.

그에게는 나 같은 고립감 없기를

“선고일이 갑자기 바뀌어서 못 오시는 줄 알았어요.” 진주씨를 통해 알게 된 ‘바리깡 교제폭력 사건’ 피해자 가족은 피고인 김아무개의 기습 공탁으로 선고일이 갑자기 변경되면서 내가 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단다. ‘바리깡 교제폭력 사건’ 피해자 가족도 2024년 1월18일 인천지법에서 열린 설아무개의 스토킹 보복살인 사건 1심 선고 때 유족의 곁을 의연하게 지켰다. 2주 뒤인 1월30일 이제는 피해 당사자로서 법정에서 선고를 기다릴 텐데 그들을 외롭게 둘 수 없었다. 떨리는, 차갑게 식은 그들의 손을 맞잡는 것 자체로도, 방청석에 앉아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피해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수사·재판이 전문가 영역이라는 인식이 강해서인지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느냐는 말도 자주 듣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방청 연대를 말한다. 법정에 가서 지켜보라고 권한다.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피해자는 힘을 얻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이라도 감시하면 재판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존재 그 자체로 피해자 연대이자 사법 감시가 되는 것, 그게 방청이다.

마녀 D가 만든 시민 대상 재판 모니터링 교육 자료의 일부. 인정신문부터 선고에 이르기까지 절차별로 세분화한 체크리스트도 만들어 배포하는데, 이를 이용하면 재판 절차에 대한 이해도를 올릴 수 있고, 비판 대상·지점도 보다 명확해진다. 마녀 D 제공

마녀 D가 만든 시민 대상 재판 모니터링 교육 자료의 일부. 인정신문부터 선고에 이르기까지 절차별로 세분화한 체크리스트도 만들어 배포하는데, 이를 이용하면 재판 절차에 대한 이해도를 올릴 수 있고, 비판 대상·지점도 보다 명확해진다. 마녀 D 제공


시민단체 중심의 재판 모니터링 운동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시민감시단, 민우회의 동행·첫사람 등이다. 단체 중심의 재판 모니터링이 시민의 호응으로 확장한 것은 2016년 이후다. 2015~2016년 여성 대상 폭력 피해 고발 운동의 영향으로 사법시스템을 이용한 피해자들의 싸움이 이어졌고, 피해자 연대에 대한 열망도 커졌다. 그 흐름을 이어가며 시민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내가 고안해낸 것이 방청 연대였다. 재판 방청에 연대라는 의미가 더해지면 시민들이 법원 문턱을 더는 높지 않다고 느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연대자로서 책임 의식을 갖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 시도는 성공했다. 서울 중심의, 기관 주도였던 방청 연대는 2020년 ‘엔(N)번방’ 등 디지털 성착취·성폭력 사건 재판에서 더 확장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오프라인 시위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피해자 연대를 위해 고심하던 시민들이 방청 연대를 위해 팀을 조직하고 전국 법원을 찾았다.

‘우수법관’인데 성폭력 피해자 인권 침해?

법원은 자체적으로 법관별 재판 모니터링을 실시하지만, 이는 실효성이 낮다는 평가가 있다(언행·태도 중심 평가가 대부분이라는 지적). 변호사 단체들이 진행하는 법관 평가도 있지만, 이런 평가 결과는 ‘우수법관’ 정도만 공개된다. 하위법관은 시민들이 알기 어려우며, 법조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시민 입장에서 평가하는 법관의 모습과 괴리가 존재할 수 있다. 예컨대 대구변호사회가 우수법관으로 선정했던 이상오 판사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 가족에게 한 부적절한 발언과 합의 강요 등으로 인권을 침해했다는 판단을 받기도 했다.(제1487호 “정말 질 나쁜 애는 아닐 거다”… 성폭행범 연민한 재판관 참조)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에서 2004년부터 진행 중인 ‘성폭력 수사·재판 과정에서의 인권 보장을 위한 시민감시단’ 활동은 수사에서 재판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피해자의 인권을 보장(디딤돌)하거나 침해(걸림돌)하는 다양한 사례를 발굴한다는 측면에서 보다 나아간 형태지만, 이 역시 기관 연계 사례가 중심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모든 피해자가 성폭력 상담기관 등 외부 기관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방청 연대라는 이름을 만든 뒤 시민 대상 재판 모니터링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은 시민사회 역량을 키울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재판 방청의 또 다른 목적은 사법감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판 방청이 피해자 연대의 한 활동임을 이해하더라도, 복잡한 절차와 알아듣기 어려운 전문 용어가 오가는 법정을 시민들은 여전히 낯설어했다. 그러다보니 방청 연대 뒤 평가도 판사, 검사, 피고인 쪽 변호인의 언행 중심으로 한정되곤 했다. 재판 절차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인상비평에 머무르는 방청 연대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법조인들의 비아냥에 정면으로 맞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2018년부터 전국을 돌며 시민을 대상으로 수사와 재판 절차를 알리는 교육을 시작했다.

시민 대상 재판 모니터링 교육 알림 포스터. 김진주씨(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피해자)가 만들었다. 마녀 D 제공

시민 대상 재판 모니터링 교육 알림 포스터. 김진주씨(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피해자)가 만들었다. 마녀 D 제공


교육은 4시간부터 최대 하루 12시간까지 진행했다. 물론 그 정도 교육으로 일반 시민이 전문 영역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당연히 하지 않는다. 그러나 ‘형사재판에서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니다’라는 말에 대한 이해부터 법정 자리 배치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재판 절차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평가 대상별(판사, 검사, 피고인 쪽 변호인, 피해자 변호사 등)로 지적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등은 충분히 교육 가능하다. 선고 뒤에는 판결문을 시민 눈높이에 맞춰 분석·비판한다. 재판 결과만 비난하는 게 아니라 절차 전반에 대한 평가능력을 기르는 작업인 것이다. 알고 보면 다르고, 알고 비판하면 달라진다.

누군가 지켜보면 앉는 자세부터 달라진다

“연대자 D의 말은 사실이다. 나도 그랬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으면 앉는 자세나 목소리 크기부터 달라진다. 관심과 감시, 연대가 중요한 이유다.”(박주영 판사, <법정의 얼굴들>) 2020년 하반기 울산지법에서 열린 ‘조건사냥’ 재판을 통해 처음 봤던 박주영 판사가 방청 연대와 관련해 남긴 소회다. 온·오프라인이 결합된 성착취 사건을 법원이 어떤 시각으로 볼지 우려되어 무작정 향했던 울산지법에서 시민사회의 노력이 판결에 반영되는 걸 직접 경험한 그날의 환희는 내가 반성폭력 운동을 이어나가는 또 하나의 힘이 되고 있다. 그런 노력을 함께하고, 그런 변화를 같이 끌어내기 위해 당신을 법원에 초대한다. 당신의 존재만으로 피해자는 힘을 얻는다. 길을 안내할 당신의 그림자가 법원에 있다. 함께 법원을 광장으로 만들자. ‘방청 연대’를 하자.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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