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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5년, 신기루와의 싸움

등록 2006-09-12 15:00 수정 2020-05-02 19:24

잊을 만하면 ‘큰 테러가 벌어질 것’이라는 경고 울리는 ‘공포’의 일상화 …‘우리 편이 아니면 그들 편’이라는 위험한 ‘부시 독트린’이 지구촌을 배회한다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2001년 9월11일 오전 8시45분까지 우리는 탈냉전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로부터 겨우 52분 뒤인 이날 오전 9시37분 세 번째 납치된 여객기가 미 국방부 건물을 향해 돌진한 순간 ‘포스트 9·11’ 시대가 시작됐다. 모두들 세상의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테러와의 전쟁 기간, 테러는 4배 이상 늘어

외교안보 전문지 격월간 는 최근 펴낸 9·10월호 표지기사를 이렇게 시작했다. 5년 전 그날 세계는 분명 달라진 듯 보였다.

지구촌 곳곳에서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화염과 짙은 연기에 휩싸인 채 허망하게 무너져내리는 장면을 목도한 이들은 바야흐로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고 느꼈다. 지구촌 현대사는 9·11 동시테러 이전의 세계와 그 이후로 나눌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역사적 전환점이라는 점은 자명해 보였다. 뭔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 뒤따를 것을 예상하는 건 당연했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지금 달라진 것은 뭘까?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테러와의 전쟁’이 5년째 불을 뿜고 있음에도, 지구촌은 오히려 날이 갈수록 위험해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미 랜드연구소의 킴 크래그인 연구원과 앤드루 큐리엘 연구원의 분석 결과를 보면, 1998~2001년 1376건의 테러 공격(사망자 609명)이 벌어졌던 중동 지역에선 2002~2005년 5517건(사망자 1만615명)으로 테러 공격이 4배 이상 늘었다. 또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지역에서도 1998~2001년 552건(사망자 1554명)에서 2002~2005년 2791건(사망자 3639명)으로 테러 공격이 늘었으며, 동남아시아와 남미 등지에서도 대테러 전쟁이 시작된 이후 테러 공격이 오히려 늘어났다.

‘공포’의 일상화는 9·11 동시테러가 가져온 또 다른 변화다. 9·11 동시테러 뒤 신설된 국토안보부(DOHS)는 창립선언문에서 “오늘날 테러리스트들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사실상 어떤 무기라도 동원해 공격을 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5년 동안 알카에다의 또 다른 공격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대량살상무기를 동원해 9·11 테러보다 훨씬 규모가 큰 테러 공격이 곧 벌어질 것”이라며 임박한 파국을 경고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2004년 5월엔 존 애쉬크로프트 당시 법무장관이 “몇 달 안에 알카에다가 미국 본토를 공격할 것이고, 이를 위한 준비의 90%를 이미 마친 것으로 안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그해 11월로 예정된 미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테러 공격이 벌어질 것이란 게다. 하지만 이른바 ‘10월 위기설’은 현실화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시사주간지 는 당시 “(2004년 11월) 미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알카에다가 미 본토를 공격할 것이란 주장은 대테러 전담 요원들에겐 사실상 신념으로 굳어져 있다”고 꼬집었다.

2004년 5월 ‘10월 위기설’ 해프닝

세계 곳곳에서 테러 공격이 급증하고 있음에도 미국에서 ‘불안한 평화’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존 뮬러 오하이오주립대 교수(정치학)는 외교·안보 전문지 최신호(9·10월호)에서 이렇게 썼다.

“테러범들이 정말 그렇게 쉽게 공격을 퍼부을 수 있고, 미 정부의 주장대로 능력 또한 탁월하다면 어째서 9·11 이후 단 한 차례도 미국을 겨냥한 직접 공격을 시도하지 않은 걸까? 인파로 북적이는 쇼핑센터를 공격하거나, 터널을 무너뜨리거나, 음식물에 독극물을 타거나, 전력망을 차단하거나, 열차를 탈선시키거나, 송유관을 폭파하거나, 교통대란을 야기하거나, 수많은 보안 전문가들이 너무도 쉽게 테러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는 끝없는 테러 취약 대상을 겨냥한 공격을 퍼붓지 않은 걸까? 한 가지 합리적인 추론은 미국 내부엔 테러범이 존재하지 않으며, 나라 밖에서도 미국으로 잠입해 테러 공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집단은 극소수라는 점일 것이다.”

임박한 테러 위협을 경고해온 대다수 전문가들은 미국이 테러 공격을 받지 않은 이유는 9·11 테러 이후 만들어진 각종 보호장치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9·11 테러에 앞선 5년 동안에도 미 본토가 한 차례도 테러 공격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테러범들이 미국으로 잠입하기가 이전보다 어려워졌을 수는 있겠지만, 하루 1천~4천 명의 불법 입국자가 양산되는 점을 감안할 때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매년 멕시코 국경지대를 통과해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다 붙잡히는 이슬람 국가 출신자들이 수백 명에 이른다. 이보다 많은 수가 밀입국에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자명하다. 테러 공격을 수행하는 데는 그리 많은 수의 사람이 필요치 않다. 뮬러 교수는 “대다수 안보 전문가들의 주장대로 알카에다가 미 본토에 대한 추가 공격을 결심했고 이를 실행에 옮길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벌써 오래전에 그렇게 했어야 옳다”며 “이제껏 공격이 재발하지 않은 것은 알려진 것과 달리 알카에다가 미 본토 추가 공격을 위해 혈안이 돼 있지 않거나, 적어도 이를 실행에 옮길 만한 능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방증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9·11 테러 이후 미 정보당국은 법원의 영장 없이 ‘테러 혐의자’에 대한 도청과 구금을 일삼았고, 수많은 기업에 ‘테러 방지’를 이유로 고객 관련 기밀사항을 공개하도록 압박했다. 9·11 테러 이후 최근까지 미 정부는 8만여 명의 아랍·무슬림 이민자들에게 지문 날인과 등록을 강요했고, 8천여 명을 연방수사국(FBI)이 소환해 조사했다. 또 5천여 명의 외국인이 테러 혐의로 구금됐다. 하지만 이들의 절대 다수는 아무런 혐의가 없어 풀려났다. 기소된 뒤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도 극소수 있지만, 이들 대부분의 죄명은 ‘테러 모의’가 아니라 이민법 위반이었다. 그러니 ‘제2의 9·11 테러’가 현실화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데서 찾아져야 한다.

3차대전은 냉전, 4차대전은 테러범과의 싸움?

“9·11 테러는 알카에다에 엄청난 성공이 아니라 재난이었다. 오사마 빈라덴과 아이만 알자와히리 등 이른바 다국적 지하디스트들은 철저히 고립됐고,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배척됐다. 세계를 무대로 테러 공격을 일삼던 극단주의자들은 점진적인 사회·정치적 변화를 위해 정부의 탄압을 뚫고 각기 자국 내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온건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을 잃었다.”

이슬람 극단주의 연구자인 파와즈 게르게스 미 사라로렌스대 교수(중동학)는 9월7일 미 외교협회(CFR) 홈페이지에 쓴 기고문에서 “알카에다가 미국인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지만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며 “알려진 것과 달리 이들의 영향력은 훨씬 미약하며, 무장 이슬람단체에서 주류 이슬람주의자들, 좌파와 민족주의자들까지 이슬람권의 제반 정치세력들은 알카에다에 등을 돌렸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심지어 빈라덴의 조직 내부에서조차 파열음이 들리고 있다”며 “이런 내부 갈등이야말로 알카에다가 미국을 겨냥한 ‘성전’을 벌일 능력을 약화시킨 결정적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부시 행정부의 ‘확신’에 찬 행보엔 변화가 없어 보인다. 5년여에 걸친 시행착오와 막대한 인명 피해, 천문학적으로 쌓여만 가는 전쟁 비용도 ‘테러 없는 안전한 세상’을 위해 기꺼이 감내해야 할 ‘기회비용’으로 여기는 모양새다. 아랍권 친미 독재정권은 ‘테러와의 전쟁’ 시대에도 여전히 든든한 동맹국이고, 절대 다수 무슬림들이 등을 돌린 극소수 게릴라를 향한 전쟁의 필요성에 대한 ‘신념’도 요지부동이다. 게르게스 교수는 “미국이 이슬람권의 정치·이념적 내부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테러와의 전쟁을 확대해 혼란의 원인을 더욱 강화하는 게 알카에다의 손에 놀아나는 것이란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자기식의 ‘성전’에 몰입해 있는 부시 대통령의 의지를 꺾기엔 역부족이다.

그러니 9·11 동시테러가 촉발한 지난 5년 동안의 대테러 전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탈냉전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은 분명하지만, 뒤이어 열린 ‘새로운’ 시대는 너무도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우리 편이 아니라면, 당신은 그들 편’이라는 냉전의 위험한 단순논리가 ‘부시 독트린’으로 이름을 바꿔 ‘포스트 9·11’ 시대의 지구촌을 배회하고 있다.

냉전 시절 반공의 열혈전사였던 현재위험위원회(CPD)가 지난 2004년 7월 화려하게 부활해 이른바 ‘국제 이슬람 테러리즘’과 맞선 ‘장기전’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냉전이 끝난 뒤 사실상 활동을 접었던 이 단체를 재정비해 현재 공동회장을 맡고 있는 제임스 울시 전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급진 이슬람주의자와 파시스트 테러범과 맞서 싸우는 건 제4차 세계대전”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제3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승리로 끝난’ 냉전이다. ‘악의 제국’이 ‘이슬람 파시스트’로 바뀌었을 뿐이다.

9·11 테러는 알카에다의 ‘재난’

‘테러’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극도의 두려움이나 이를 느끼게 만드는 원인, 또는 사람들을 위협하기 위해 극도의 두려움을 활용하는 것”이다. 테러는 전술이지, 실체가 있는 적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 자체로 전쟁의 목표물이 될 수 없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실체도 없는 가상의 적과 지구촌 곳곳에서 허망한 싸움을 이어가는 한, 수천의 인명이 스러져간 2001년 9월11일은 역사의 반동을 상징하는 날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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