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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관계 로드맵 파행예감!

등록 2006-09-13 15:00 수정 2020-05-02 19:24

민주노총이 사활 거는 복수노조 허용, 한국노총과 경총은 ‘유예’합의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도 온도차… 노동부는 제3의 카드 내놔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로드맵)은 2003년 참여정부 들어 “21세기 새로운 노사관계의 틀을 짜겠다”는 의욕에서 시작됐다. 몇 해 동안 진통을 거듭하던 로드맵 논의가 입법 예고를 앞두고 막판에 혼미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한국노총과 경영자총협회는 지난 9월2일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허용’이라는 두 핵심 쟁점을 2011년까지 5년간 유예하는 방안에 전격 합의했다. 그러나 노총-경총 합의안을 둘러싼 논란이 촉발되면서 정부가 5년 유예 합의안을 거부하고 대신 ‘2∼3년 유예’ 수정안을 정부안으로 만들어 9월 중에 입법 예고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2007년 문제’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조항은 1997년에 만들어진 뒤 법 부칙을 통해 두 번이나 ‘5년간 시행 유예’됐다. 이번에 연말까지 법안이 다시 개정되지 않을 경우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2007년 1월1일부터 곧바로 시행된다.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로 대표되는 이른바 ‘2007년 문제’는 한국 노사관계를 뒤흔들 핵폭탄이나 마찬가지다. 로드맵은 복수노조 허용 등 외에도 △필수 공익사업장에 대한 직권중재 제도 폐지 △필수 공익 사업장 쟁의행위 때 대체근로 허용 △필수 공익 사업장의 범위를 혈액·항공·폐수처리 분야까지 확대 △경영상 해고·기업변동(합병 등)시 고용승계 등 개별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과제를 무려 34가지나 담고 있다.

민주노총은 “복수노조와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서로 맞바꾼 건 원칙을 거스른 한국노총-경총 야합”이라고 비판하면서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의 노사자율 결정’을 요구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그동안 로드맵 논의에서 △산별교섭 제도적 보장 △복수노조 교섭 창구 단일화의 노사 자율 결정 △필수 공익사업장과 직권중재의 명실상부한 폐기 △공무원 노동3권 보장 △특수고용노동자 노동권 보호 등 8대 과제를 요구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산별노조 시대를 앞두고 ‘산별교섭 보장’을 전략적인 핵심 요구로 내걸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월급 주는 것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노사가 함께 노사발전재단 같은 것을 만들어 여기에 기업이 출연하고 출연금의 이자수익 등으로 전임자 임금을 우회적으로 받아낼 수도 있고, 조합원 임금 인상을 요구할 때 전임자 임금 몫을 얹어서 요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노조 등 민주노총 금속노조 대공장들이 올해 산별 체제로 전격 전환한 것도 ‘2007년 문제’를 돌파하기 위한 선제적 대응의 성격이 짙다.

반면 한국노총 쪽은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조항을 중심으로 로드맵을 바라보는 전략을 취했다. 한국노총은 조직의 산별 체제 전환이 상대적으로 더딘데다 중소 규모 노조가 80% 이상이라서 내년부터 전임자 임금지급이 금지되면 당장 조직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임금의 1%인 조합비를 총파업 투쟁에 다 퍼풋고 있는 게 현실인데, 중소 노조의 경우 조합원 임금에서 더 많은 조합비를 거둬 전임자 임금을 충당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로드맵을 둘러싼 노사 간 논쟁의 한복판에 있는 것이 ‘복수노조 허용 여부’다. 올해 금속노조 등이 산별 체제로 급속히 전환하면서 ‘2007년 문제’는 그렇지 않아도 복수노조 허용을 우려해온 삼성·포스코·LG·SK 등 무노조 혹은 협조적 노조를 둔 대기업들에 큰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산별 체제에서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개별 조합원들이 따로 산별 노조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원래 복수노조와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모두 법안에서 아예 들어내는(삭제하는) 쪽으로 경총과 이야기가 진행됐다. 삼성·LG 등이 복수노조에 대비한 시나리오를 충분히 준비한 줄 알았는데 막상 로드맵 일정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실제로는 대응 준비가 제대로 안 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유예론이 제기됐고, 민주노총은 빠졌지만 한국노총과 경총 간에 두 쟁점을 빼버리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말했다.

이 와중에 민주노총은 산별교섭 보장을 중심으로 경총과 합의를 시도했고, 노동부는 임금을 지급받을 노조 전임자 수를 사업장 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방안을 카드로 내놓았다. 노·사·정 모두 접근하는 전략은 달랐지만 어느 쪽이든 로드맵을 타결지을 관건은 ‘복수노조 허용 여부’에 달려 있었다. 다들 상대방에 대고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우리 쪽이고, 그쪽은 칼날을 쥐고 있는 격”이라면서 자신들의 안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한다.

복수노조는 미조직 노동자들의 ‘인권’문제

그러나 복수노조 허용은 엄격히 말해 기존 노동조합에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 등 미조직 노동자들의 문제이자 권리라고 할 수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오래전부터 노동자 단결권 보장을 위해 복수노조를 허용하라고 권고해왔다. 단결권은 자신이 원하는 노동조합에 가입할 권리뿐 아니라 기존 노동조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새로운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복수노조 허용은 기본적 ‘인권’에 해당하는 것이다. 반면 노조 전임자 임금은 노사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다. 민주노총은 “두 쟁점을 맞바꾸거나 5년 유예니 3년 유예니 절충안을 운운하는 건 로드맵을 정치적 흥정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한국노총 소속 택시와 버스를 비롯한 여러 사업장에서, 1987년 직후 민주노조추진위원회가 앞다퉈 만들어졌듯 민주노총 계열의 ‘복수노조추진위원회’(가칭)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복수노조 허용이 다시 유예된다면 반발도 크고 큰 혼란이 뒤따를 게 뻔하다. 물론 기존 민주노총 대공장 노조들이 복수노조 허용을 내심 달가워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유예를 잘됐다고 생각하는 조합원과 노조 간부도 많이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노동‘운동’을 하는 민주노총 지도부로서는 원칙과 현장 분위기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부로서는 최대한 타협을 이끌어내 로드맵을 올해 안에 관철하는 것이 지상 명제다. 3년 넘게 끌어온 로드맵이 내년으로 다시 연기된다면 노동부 장관으로서도 큰 부담을 지게 된다. 34개나 되는 중대한 노사관계 주제들을 한꺼번에 던져놓고 일괄 타결을 시도하는 로드맵 논의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막판으로 치닫고 있는 로드맵 논의는, 현재로서는 민주노총을 배제한 채 한국노총·경총·정부 합의라는 형태를 띠고 정부안이 제출될 공산이 커지고 있다. 당연히 민주노총의 로드맵 분쇄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될 것이고, ‘21세기 노사관계의 새 틀’은커녕 파행과 대립만 초래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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