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반대세’의 비밀? 국정원이 알려줄게


2009년 원세훈 원장 취임 직후 국정원 국내 정치 개입 본격화
직원 이희천씨 저술·강연 통해 ‘정부 비판=반대한민국’ 매도 앞장
등록 2013-06-20 01:40 수정 2020-05-02 19:27

“좌성향 세력은 반정부·반체제·반미 촛불시위를 주도하는 등 보수 우익 정권에 타격을 주어 국민들의 민심 이반을 유도한 후 반보수 대연합을 통해 좌익 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도 촛불시위를 통해 좌익·좌경 세력의 실체를 이해하고 이들의 위험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세력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87쪽)
국정원의 ‘국내 정치 관여’는 광범위했다. 지난해 대선 직전에 드러난 ‘인터넷 댓글 사건’은 국정원 정치 개입의 작은 단면일 뿐이다. 국정원이 이명박 정부 초기에도 단행본 출판물 형태로 ‘대국민 여론전’에 뛰어든 사실이 의 취재 결과 확인됐다. 국정원 직원은 단체 이름 뒤에 숨어 활동했고, 국정원은 직원의 활동을 허가하며 사실상 지원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지시·강조 말씀’ 및 국정원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박원순 서울시장 제압 문건’과 함께 ‘대남심리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국정원 안보특강에 초청받은 누리꾼들이 지난 5월24일 오전 서울역 광장 파출소 앞에 정차한 국정원 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최근 국정원이 극우 인터넷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 회원들을 포함한 누리꾼을 대상으로 안보특강을 열어온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일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국정원 안보특강에 초청받은 누리꾼들이 지난 5월24일 오전 서울역 광장 파출소 앞에 정차한 국정원 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최근 국정원이 극우 인터넷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 회원들을 포함한 누리꾼을 대상으로 안보특강을 열어온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일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대한민국 세력 vs 반대한민국 세력

2009년 4월23일 도서출판 인영사는 336쪽짜리 책 한 권을 펴냈다. 제목은 (이하 오른쪽 책 사진)이다. 책은 국내 사상 지도를 기존의 보수-진보에서 ‘대세(대한민국 세력)-반대세(반대한민국 세력)’ 개념으로 다시 짠다는 취지로 쓰였다. 책은 보수-진보 구분이 좌익세력의 전술이라고 주장한다. 좌익이 자신을 진보라고 명명해 국민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주는 대신 보수세력을 퇴보·반동으로 몰아가려는 의도란 설명이다. 책은 일제시기 사회주의운동에서부터 1980년대 이후 좌익세력의 전략·전술 및 북한의 대남전략 역사까지 다뤘다.

책의 지은이는 ‘현대사상연구회’로 돼 있다. 연구회는 책날개에서 “현대 주요 이데올로기들을 비교 연구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사상 갈등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자 및 전문가들의 단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다. 이 단체의 회장은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다. 양 교수는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8년 8월호에 발표한 기고글(‘이 땅의 우익은 죽었는가’)로 ‘우익 총궐기’를 주창했던 극우 논객이다. 당시 내무부는 양 교수의 글을 전국 공무원들에게 배포해 정치·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양 교수는 “좌익의 도전은 날로 거세지는데 우익은 널브러져 흐느적거리는 현 상황이 계속되면 이 나라에는 궁극적으로 공산정권이 들어설 것”이라며 “그러한 비극을 막으려면 우익이 좌익을 제압하고 제거해야 한다”고 썼다. “사회 각 분야의 우익은 총궐기하여 이론가는 이론으로, 조직가는 조직으로, 재력가는 재력으로, 완력가는 완력으로 좌익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도 했다. 양 교수는 연구원 노조와 학생들로부터 교수직 사퇴를 요구받았다.

25년 전 양 교수의 주장은 에서 표현만 바꿔 재등장한다. “좌경세력을 얼마나 많이 순화시켜 대한민국 세력으로, 나아가 우익세력으로 만들 수 있느냐가 대한민국 체제의 안정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좌-우 두 날개의 균형과 진보-보수의 상호 견제로 유지되는 민주주의보다 우익으로의 사상 단일화를 통한 체제 안정을 강조하는 논리다.

현대사상연구회 부회장은 이희천씨다. 집필에 주요 저자로 참여했다. 그는 2011년 북한인권학생연대와 연구회가 공동주최한 안보서평 공모전 시상식 및 특강 등에서 책의 저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2011년 7월호).

그는 외부 ‘종북강연’도 활발하게 다녔다. 지난해 10월 민주당 안규백 의원의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이 부회장의 강연 횟수는 단연 눈에 띈다. 그해 상반기 육군이 개최한 종북강연에서 그는 전체 155회 중 48회를 강연했다. 초청 강사 중 최다 횟수다. 김성욱 한국자유연합 대표가 30회였고, 이유민 현대사상연구회 부회장이 13회였다. 두 명의 연구회 부회장 강연 횟수만 63회(전체의 41%)다. 육군의 종북강연은 지난해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폭증했다.

“촛불시위 지켜본 뒤 책 쓰게 됐다”

이희천씨의 또 다른 직함은 ‘국가정보대학원’ 교수다. 국가정보대학원은 국정원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기관이다.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다. 10여 년간 학위과정을 운영하지 않아 제정(1997년 12월24일) 14년 만에 설치법이 폐지됐다(박지원 민주당 의원의 대표발의로 2011년 11월22일 처리). 다만 직원 재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은 계속 수행 중이다. 모든 신임 요원은 이 학교에 입교해 정해진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국가정보대학원 교수의 신분은 국정원 직원이다. 정부에 비판적인 특정 세력을 지목해 반대한민국 세력으로 규정한 이론서 제작과 종북강연을 통한 ‘정치·사회적 낙인찍기’에 국정원 직원이 깊숙이 개입했다는 뜻이다.

이희천 교수는 과의 전화 통화에서 “혼자 쓴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이 썼다”고 밝혔다. 그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국정원 직원으로서 국내 정치 개입 논란을 일으킬 활동을 해왔다는 점에 대해 “답하기 곤란하다. 다음에 통화하자”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는 “한겨레도 대한민국 내의 언론사다. 대한민국의 국익을 고려해서 기사를 써달라”며 “생각을 정리해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기사 마감 시점까지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은 촛불시위 비판으로 도입부를 열고 있다. 이 교수도 통화에서 “촛불시위를 지켜보면서 책을 쓰게 됐다”고 했다. 국정원 직원이 개입된 책이란 점에서 의미심장한 시작이다. 원세훈 전 원장은 2009년 2월 부임했다. 전국을 달궜던 촛불시위의 열기가 완전히 식지 않은 때였다. 촛불은 임기 초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결정적 상처였다. 이 전 대통령은 촛불시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전임 김성호 원장을 교체했다. 책은 원 전 원장이 부임한 지 두 달 만에 나왔다. 연구회가 책 출간을 고민하게 만든 계기 자체가 “2개월간 나라를 혼동 속에 몰아넣고 홀연히 사라진 촛불”이다. 연구회는 촛불시위를 “고속도로상에서 60중 추돌사고를 유발한 후 종적도 없이 사라진 아침 안개”로 비유하며 “다시 일어날 미래의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 안개의 본질을 파헤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책은 촛불시위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숨기지 않는다. “정부와 일반 국민들은 2008년 미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를 통해 좌성향 세력들이 사회 곳곳에 상당한 세력으로 존재함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며 “북한의 선전·선동은 국내에 있는 좌성향 세력들의 활동을 통해 촛불시위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며 북한과의 연계성까지 거론했다. 촛불시위의 ‘변용 가능성’도 예견했다. “촛불시위는 평화축제의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는데다 야간 시간대를 이용함으로써 대중들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고 신원 노출을 막을 수 있는 등 이점이 있어 당분간 반정부·반미 시위에 많이 이용될 것이다. 그러나 촛불의 유용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횃불·야광봉 등 대체물이 얼마든지 이용될 수 있다.”

지난해 6월12일 경기도 양주군 65사단 안 천보관에서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안보초청 강연이 열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

지난해 6월12일 경기도 양주군 65사단 안 천보관에서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안보초청 강연이 열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

국정원 “군부대 강연은 정상 업무”

책은 ‘종북’과 ‘친북’의 용어도 구별했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며 북한에 맹종적인 좌익(반대세)세력에게는 종북 개념이 적합하다”며 “좌익들에게 친북이라는 용어를 붙이는 것은 이들의 북한 맹종 활동에 대한 실체를 드러나지 않게 해주고 대중들로 하여금 좌익 활동에 대한 경계심을 이완시키는 문제를 낳는다”고 말한다. 국정원 전직 직원들에 따르면, 원 전 원장 취임 뒤부터 내부에선 ‘종북좌파’란 용어가 일반화됐다. 김성호 원장 때는 ‘친북좌파’란 말이 등장했고, 참여정부 시절 국정원은 ‘진보’란 표현을 썼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두고는 “반정부 투쟁은 민주주의와 정의 실현을 위해 정당한 것이라는 명분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국정원 대변인실 관계자는 “책은 (이 교수가) 현대사상연구회와 공동집필한 것으로, 진보-보수 개념의 문제점을 정리하기 위해 저술됐다”고 밝혔다. 그는 “(국정원 직원은) 신분 제약 때문에 (외부 활동의 경우) 내부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이 교수의) 저술 참여는 정상적인 허가를 거쳐 이뤄졌다”고 말했다. 이 국정원의 지원 혹은 묵인 아래 쓰였다고 사실상 인정한 셈이다. 그는 국민을 ‘피아’로 이분화하는 책 집필에 참여하는 것을 국정원이 허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엔 “말하기 곤란하다”고 답했다.

국정원은 이 교수의 안보강연도 ‘문제없다’는 입장이다. 국정원 관계자는 “군대 강연은 기관의 요청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국정원 업무와 무관한 일반적 내용의 강연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저쪽(군)에서 오라고 해서 갔다고 한다. 그쪽(국가정보대학원) 업무가 안보교육을 주 업무로 하니까 군대에 가서 강연하는 것은 정상적 업무”라며 영리활동도 아니라고 말했다. 국가정보대학원 교수는 ‘국정원 직원 교육을 담당하는 국정원 직원’이다. 외부 학회나 단체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반 대학의 교수와는 다르다. 국가정보원직원법 제18조 1항은 “국정원 직원이 직무 외에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업무에 종사하거나 원장의 허가 없이 다른 업무를 겸할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전방위적으로 펼친 대국민 여론전

국정원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정치적 중립을 엄격히 요구받는 국정원 직원이 책과 종북강연을 통해 이명박 정부 ‘대남심리전’의 선두에 섰다는 이야기이자 국정원이 방조 혹은 조장했다는 의미”라며 “한 나라의 정보기관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심리정보국을 통한 국정원의 ‘젊은 층 우군화 전략’이나 극우 인터넷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회원이 포함된 누리꾼들 대상의 안보특강과도 태생이 맞닿아 있는 것이다.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과 대국민 여론전은 전방위적이다. 무늬만 다를 뿐이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