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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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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길은 ‘희망’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온 고교생·신부님·소설가 등 세월호 도보 순례길

함께 걷고 식사 준비하고 길 안내하며 이어간 그들의 발자국
등록 2014-08-22 08:15 수정 2020-05-02 19:27

18살 선오에겐 아버지가 두 분이다.
낳아준 아버지는 ‘아빠’, 새로 만난 아버지는 ‘아버지’로 구분된다. 아버지를 만난 건, 지난 7월17일 길 위에서였다.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4반 고 김웅기군 아버지 김학일(52)씨가 바로 선오 아버지다.
이날 학일씨는 단원고 2학년8반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56)·누나 이아름(25)씨와 함께 전북 땅으로 들어섰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길을 나선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전북 전주에 사는 선오는 학교에 가는 대신 ‘걸으러 가자’는 부모님을 선뜻 따라나섰다. 즐거웠던 마음은 곧 슬픔으로 가득 찼다. “단원고 학생들이 저희랑 동갑이잖아요. 저희도 신분증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도 못 받아보고….” 아버지는 아들과 동갑인 선오가 눈에 들어왔다. “승현이와 웅기 몫까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공부에 관심이 없던 아이가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연달아 나흘을 함께 걸은 두 사람은 아버지와 딸이 되기로 했다.

“나비가 된 친구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지난 8월9일 아침, 세월호 유가족 도보순례단이 전주로 향하는 일반국도 한쪽에 둘러앉아 전북 정읍시민이 이날 새벽 정성스럽게 준비한 닭죽을 먹고 있다(왼쪽). 지난 8월10일 오전, 전북 전주시 전동성당 앞에서 고교 2학년에 재학 중인 김선오(오른쪽 두 번째)·김지홍·박수연·우수민·양혜지·정다은 학생 6명이 직접 만든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세월호 유가족 도보순례단을 맞이하고 있다. 박현정 기자

지난 8월9일 아침, 세월호 유가족 도보순례단이 전주로 향하는 일반국도 한쪽에 둘러앉아 전북 정읍시민이 이날 새벽 정성스럽게 준비한 닭죽을 먹고 있다(왼쪽). 지난 8월10일 오전, 전북 전주시 전동성당 앞에서 고교 2학년에 재학 중인 김선오(오른쪽 두 번째)·김지홍·박수연·우수민·양혜지·정다은 학생 6명이 직접 만든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세월호 유가족 도보순례단을 맞이하고 있다. 박현정 기자

선오는 길 위에서 아버지뿐만 아니라 새 친구들을 얻었다. 전주 성심여고 2학년인 수연이는 뉴스를 통해, 아버지들과 걷고 있는 선오를 알게 됐다. 둘은 같은 학교 다른 반에 재학 중이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관심을 놓을 수 없었던 수연이는 다른 반 친구들에게 선오란 아이를 수소문했다. 뉴스에는 선오 이름이 동생 현오로 잘못 나간 터였다. 우여곡절 끝에 선오와 연이 닿았다. 여기에 학교 친구 수민이와 혜지 그리고 정읍여고 2학년 다은이, 전북여고 2학년 지홍이가 한데 뭉쳤다. 여섯 학생들은 지난 8월10일 오전, 전주 전동성당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들을 맞았다. “나비가 되어버린 친구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세월호 특별법 여야 합의 전면 철회. 저희도 기억하고 있어요. 아빠 힘내세요!”

딸아이를 선뜻 아버지에게 내준 선오 아빠는 전북작가회의 소속 소설가 김병용 작가다. 그는 도보 순례를 이렇게 표현했다. “산길이나 언덕길을 걷는 게 아니라 자동차가 다니라고 만든 길을 걷는 거잖아요. 아스팔트 길은 사람에게 굉장히 안 좋거든요. 이렇게 걷는 것 자체가 ‘저항의 표시’ 아닐까 싶어요.”

‘우리가 포기하지만 않으면…’

전북작가회의 작가들은 아버지들이 전북 지역을 걷는 기간에 돌아가며 운전을 했다. 유가족들이 마음 편히 걸으려면 무거운 짐을 보관해줄 차량이 필요했다. 이러한 차량 운전자는 지역이 바뀔 때마다 달라졌다. 전북·전남·광주·충남·대전 등 각 지역의 시민들과 단체, 성당은 차량뿐 아니라 세끼 식사와 간식거리, 잠자리 마련에 정성을 보탰다. 전북 익산에서 떡집을 운영하는 사장님은 가게를 운영하느라 아버지들과 함께 걸을 짬이 나지 않았다. 대신 새벽잠을 줄였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노란색’ 떡을 쪄 충남 논산과 전북 전주로 날랐다.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시민들이 아이스크림·과일·얼음물 등 각종 먹을거리를 도보순례단에 내주었다. 이렇게 모아진 먹을거리는 다시 시민들과 나누었다. 아버지들을 따라 걷는 사람이 늘어나자, 교통 통제가 필요해졌다. 시민들과 신부님들이 ‘경광봉’을 쥐고 도로 위를 바지런히 뛰어다녔다.


“아버님들이 5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15년이 걸리든 진실은 밝혀낼 수 있다고 한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계속 걸어가는 게 곧 희망이 되지 않을까. 그 길을 만들어준 아버님과 아름이에게 고마워요.”
-‘광주 시민상주모임’ 권오산씨


안산 단원고를 처음 나설 때, 일행은 아버지들과 아름씨 그리고 취재진뿐이었다. 도보 순례 소식이 알려지자 그 뒤를 따르는 시민이 하나둘 늘어났다. 경북 포항에서 온 박정(45·예명), 윤연화(40) 자매는 전남 진도부터 목적지인 대전까지 18일 동안 아버지들과 함께 걸었다. 처음엔 주말에만 동행할 예정이었다. “평일엔 사람이 없을 것 같으니 함께 걷자.” 언니의 제안을 동생도 흔쾌히 따랐다. 연화씨는 걷기 위해 휴가를 냈다. 잠자리 문제도 난관이었다. 또 다른 자매가 숙박업소 물색과 예약을 맡아주었다. 포항 자매에게 18일간의 도보 순례는 어떤 의미였을까. “아버님들이 굉장히 존경스러웠어요. 힘든 그 길을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잖아요. 그런 아버님들을 도와주시는 분, 함께 걸어주시는 분, 마음으로 격려해주시는 분들을 보면서 ‘아, 역시 움직이니까 되는구나’ 이런 걸 배웠어요. ‘포기하지만 않으면, 이 나라 바로 설 수 있겠다’ 싶은 희망도요.”

포항 자매에게 ‘가장 오래 도보 순례를 한 시민’ 자리를 양보한 권오산(45)씨 역시 18일을 걸었다. 그는 광주·전남 지역에서 도보순례단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세월호 3년상을 치르는 광주 시민상주모임’ 일원이다. 광주 시민상주모임엔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해 유족들과 함께하자는 데 뜻을 같이한 시민 230여 명이 알음알음 모여들었다. 특별히 지도부가 없는 모임이다. 회원들은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소통한다. 오산씨는 전남 목포에서 아버지들을 만나, 대전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애초 계획은 휴가 일정이 겹친 전남 지역만 함께 걷는 것이었다. 그에게도 길은 ‘희망’이었다. “아버님들이 5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15년이 걸리든 진실은 밝혀낼 수 있다고 한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계속 걸어가는 게 곧 희망이 되지 않을까. 그 길을 만들어준 아버님과 아름이에게 고마워요.” 광주 시민상주모임과 비슷한 시민 간 네트워크를 전북 정읍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지난 7월 정읍 시민 20여 명은 ‘세월호 진상 규명과 안전한 정읍을 위한 시민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은 정읍 지역에 들어선 아버지들에게 비를 피할 휴식처와 따뜻한 식사를 준비해주었다. 현재 시민 50여 명이 ‘밴드’를 기반으로 소통하면서,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1인시위와 출근길 선전전 등을 이어나가고 있다.

진상 규명 1인시위·출근길 선전전 이어가며

8월14일, 38일간 눈물과 웃음으로 이어져온 세월호 유가족 도보 순례길이 마무리됐다. 이날 오후 포항 자매는 오랫동안 비워둔 집으로 돌아갔다. 8월15일 오산씨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있는 서울 광화문으로 향했다. 선오는 8월18일 개학을 맞이한다. 도보 순례가 끝나서 아쉽지 않으냐는 물음에 연화씨가 답한다. “세월호 진상 규명 집회에도 참여할 거고 우리는 계속할 거니까, 마지막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각자에게 주어진 길, 그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 유가족 순례단에 도움주신 분들
문규현 신부님·이상길님·김형권님·현정수 신부님·마산 신부님·공세리성당·모종동성당·원성동성당·전의성당·고은어버이집·사랑의씨튼수녀회·대교동성당·익산떡집·어린이도서연구회 대전·광주·목포·전주·군산지회·나바위성당·김옥례님·국민TV 전북지역 조합원들·전북작가회의·세월호광주시민상주모임·평화방송·줄포성당·고창성당·영광성당·손불성당·청계성당·연동성당·우수영성당·남악성당·나주성당·방림동성당·장성성당·정인선님과 딸 수린이·고창농민회·민생평화연대·박현숙님·목포아이쿱생협·한살림광주·영광종합병원 여성회·한울남도아이쿱생협·전국금속노동조합 광주전남지부 현대삼호중공업지회·김영미님·원도심레츠·마을카페 공유·진도체육관·전국금속노동조합 기아자동차지부 광주지회·진도 소포리 이장님·나주농민회·권오산님·광주우리문화연구회 소리노리·전국금속노동조합 광주전남지부 캐리어지회·세월호 진상규명과 안전한 정읍을 위한 시민모임·남원아이쿱생협·솔티도예공방·신선도횟집·정읍장애인종합복지관·남평성당·원평성당·신창초등학교·익산 약사님·군산노무현재단 회원님들·시기동성당·여산성당·전동성당·삼례성당·대교동성당·한살림부여·한살림대전·계룡성당·한밭아이쿱생협·대전아이쿱생협·82쿡 회원님들·세월호 참사 대전대책회의·전준형님·천주교 대전교구·광주대교구·전주교구 신부님들과 정의평화위원회·천주교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님·38일간 아버지들과 함께 걷고 응원을 보내주었던 모든 시민분들(무순)
*혹시라도 착오로 빠뜨린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로 연락주세요.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서지원 인턴기자 iddg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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