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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응답 없는 입법부

법원, 제주4·3 재심 무죄·여순사건 재심 결정

국회는 ‘4·3 특별법’ 개정안 등 과거사법 ‘뒷짐’
등록 2019-04-04 00:15 수정 2020-05-02 19:29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타지로 끌려가 옥살이를 했던 제주4·3 생존 수형인 18명이 70년 만에 사실상 무죄를 인정받았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타지로 끌려가 옥살이를 했던 제주4·3 생존 수형인 18명이 70년 만에 사실상 무죄를 인정받았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사법부만도 못한 입법부.

올해 들어 법원이 제주4·3과 이에 따라 일어난 여순사건 당시의 불법적인 군사재판에 각각 공소기각(무죄) 판결과 재심 청구 결정을 내리는 등 전향적인 판단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반면 국회는 ‘4·3 특별법’ 개정안과 ‘여순사건 특별법’ 처리에 수년째 팔짱만 끼고 있어 ‘과거 청산에 미온적인 국회’라는 지탄까지 받고 있다. 제주4·3 71주년을 맞아 시대적 변화에 뒤처진 정치권을 향한 유족과 지역사회의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대법 “불법 체포·감금 사실 인정”

지난 1월 제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제갈창)는 1948~49년 제주4·3 당시 내란죄 등으로 군법회의(군사재판)에 넘겨져 징역 1~20년씩 형을 살았던 양근방(86)씨 등 수형인 18명이 낸 재심 재판에 사실상 무죄인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이들의 범죄사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도 않은 채 재판에 회부한 만큼 공소제기 자체가 무효라고 본 것이다. 당시 양씨 등은 유죄 판결을 받은 뒤 고향 제주를 떠나 전국의 형무소에 분산 수감됐다.

재판부가 제주4·3 당시 군법회의의 공소제기 절차를 무효로 판단한 이유는, 공소사실이 불특정된데다 군법회의 회부 절차가 준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수형인 명부, 군집행지휘서 등 관련 문서에는 죄명과 적용 법조항만 기재돼 있을 뿐 당시 어떠한 공소사실로 군법회의를 받게 됐는지 확인할 공소장이나 판결문이 없다. 피고인들은 일관되게 자신들이 어떠한 범죄 사실로 재판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고 진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재판부는 당시 군법회의가 단기간에 2530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등 제대로 된 수사나 재판은 애초부터 없었거나 불가능했다고 적시했다.

제주지법의 의미 있는 판결은 대법원의 전향적인 결정으로 이어졌다. 지난 3월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 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여순사건 때 반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내란 및 국권문란죄)로 군경에 체포·연행된 뒤 총살된 장아무개(당시 28살)·신아무개(31살)·이아무개(21살)씨 유족이 낸 재심 청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대법원은 “법원이 발부한 구속영장 없이 군경에 의해 불법으로 체포·감금된 사실이 인정된다”며 경찰의 불법행위를 근거로 재심 개시를 결정한 원심 판단이 옳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당시 군경에 의한 민간인 체포·감금이 일정한 심사나 조사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피고인들의 연행 과정을 목격한 사람들의 진술도 이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19일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 2천여 명이 제주4·3을 진압하라는 출동 명령을 거부하며 시작됐다. 이튿날 반군은 순천 지역을 점령했지만, 진압군은 10월 말 여수·순천 지역을 탈환했다. 이때 장씨 등은 직장 동료나 마을 주민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연행된 뒤 근처 야산에서 사형 판결이 집행돼 총살됐다. 무차별 진압과 이른바 부역자 색출로 전남 동부권은 피로 물들었다. 제주4·3은 여순사건의 한 원인이었다.

행안위 법안소위서 딱 한 번 논의돼

제주4·3 피해자들의 재심 결정과 무죄판결을 이끌어낸 임재성(38·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는 대법원 판단을 “4·3 재심의 경우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법정 진술이 가능한 이점이 있었다”며 “이에 비해 여순사건 피해자들은 모두 사망해 당시 피해를 증언할 수 없었음에도 대법원이 증거를 폭넓게 인정해 재심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판결 내용과 피고인 이름이 기재된 판결집행명령서와 당시 언론 보도 등을 바탕으로 사형이 집행된 사실을 대법원이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법부가 제주4·3과 여순사건 같은 대표적 국가폭력 사건에 진일보한 판결을 내놓는 사이, 입법부는 ‘4·3 특별법’ 개정안 처리와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줄곧 뭉개고 있다. 박진우 제주4·3범국민위원회 집행위원장은 “끔찍하다”는 표현을 써가며 과거 청산에 손 놓은 국회의 무책임을 질타했다. “지난 1년 동안 각당 원내대표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위원들, 여야 정책위원회 의장, 국회의장까지 다 만났지만 전혀 진전이 없었다. 지난해 한 번 논의되고 묻혀버렸다. 이대로 가다간 연말 정기국회를 넘기고 내년 총선 체제가 되면 개정안이 자동 폐기될지 모른다.”

2017년 12월19일 오영훈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대표 발의한 4·3 특별법 개정안에는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 군사재판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판결 일괄 무효화, 제주4·3위원회의 권한 강화와 추가 진상 조사, 제주4·3트라우마센터 설치와 공동체 회복 프로그램 시행, 제주4·3 명예훼손 규제 등의 내용이 담겼다. 법안 제출 뒤 두 차례에 걸쳐 국회 행안위에 안건이 상정됐지만, 지난해 9월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다룬 후 지금껏 진척이 없다. 더불어민주당은 의지가 약하고 자유한국당은 말과 달리 관심조차 없는 탓이다.

여순사건 특별법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김영록 전남도지사는 3월22일 낸 입장문에서 “16대 국회 때부터 수차례 발의됐던 여순사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 관련 법안이 지금까지도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며 “국회는 여야를 떠나 하루빨리 특별법 제정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난 3월13일, 보다 못한 유족들과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지난해 3월에 이어 또다시 국회를 찾아 여야 원내대표들에게 개정안 처리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4·3 특별법 개정이 원내대표 출마 당시 공약 사항이었다. 부담감을 갖고 있다. 소위 결과를 보면서 최우선적으로 다루겠다”고 했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4·3 특별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챙기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방장관·경찰청장 사과해야

국회의 법률안 처리를 위해서는 정치권의 노력과 함께 행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임 변호사는 “4·3 특별법 개정안의 군사재판 판결 일괄 무효화 조항에 대해 행정안전부 관료들이 ‘전례가 없다’며 반대 의사를 피력하고 있다”며 “이는 피해자들이 지금과 같이 개별적이고 수공업적인 재심 청구로 피해구제를 받으라는 얘기”라고 꼬집었다. 또 “유신 긴급조치에 근거한 재판이면 다 무효인 것처럼 4·3 군사재판도 특별법 개정으로 일괄 무효로 하는 게 맞다. 국가가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권리구제를 모두 떠넘기는 건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사법부의 전향적인 판단이 나온 만큼, 올 71주년 제주4·3 추념식에는 국방부와 경찰청 등 가해 기관들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진우 집행위원장은 “제주4·3 당시 군법회의를 불법적으로 운영한 국방부와 피해자를 불법 체포 구금한 경찰 수장의 공식적 사과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며 “행정부 수반인 노무현·문재인 두 대통령이 세 번이나 사과했는데도 군경의 기관장이 유관단체 눈치를 보느라 침묵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오승훈 전국1팀장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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