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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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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은 총에 맞아 죽은 엄마의 젖을 빨았다

제주 북촌리 대학살 때 ‘죽은 엄마 젖 빠는 아기’ 누나 한옥자씨

할머니는 양푼밥에 수저 꽂고 “엄마가 너희들 보러 왔다” 말해
등록 2019-04-04 00:24 수정 2020-05-02 19:29
제주읍 북촌리에 살던 한옥자씨는 군인들 총에 엄마를 잃었다. 한씨의 네 살배기 남동생은 엄마가 죽은 줄도 모르고 쓰러진 엄마의 젖을 빨았다. 당시 이야기를 하며 눈물 흘리는 한씨.

제주읍 북촌리에 살던 한옥자씨는 군인들 총에 엄마를 잃었다. 한씨의 네 살배기 남동생은 엄마가 죽은 줄도 모르고 쓰러진 엄마의 젖을 빨았다. 당시 이야기를 하며 눈물 흘리는 한씨.

바람과 함께 내리는 눈이 얼굴을 때렸다. 올레 안길을 나서자 두려움에 질린 주민들이 서로서로 손잡고 학교 운동장으로 가고 있었다. 눈발 속에 초가가 타다 남은 냄새와 연기가 사방을 뒤덮고, 집집마다 벌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1949년 1월17일 낮, 총에 대검을 꽂은 군인들이 제주읍 북촌리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위협하고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내몰았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닥친 날이었다. 이 마을 동카름(동쪽 동네)에 살던 한옥자(79)씨는 할머니와 당시 40살이던 어머니(김상필), 13살 오빠, 11살 언니(82), 7살 여동생, 4살 남동생과 함께 집에 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군인들의 위협에 황급히 길을 나섰다. 어머니는 젖먹이 남동생을 업고, 할머니는 손녀들 손을 잡고 길을 재촉했다. 올레 안길을 나서자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 학교 운동장으로 가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걸었다. 거동을 제대로 못하는 주민들은 현장에서 총살됐다. 학교에 다다른 주민들이 뒤를 돌아보자 마을은 벌건 불길에 잡혀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눈은 벌겋게 타오르는 불길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이미 학교 운동장은 겁에 질린 마을 주민들로 가득 찼다.

거품처럼 사라진 ‘단꿈’

한씨의 일본식 이름은 ‘다마코’. 아버지(한봉찬)는 일본에서 자녀들을 낳고 함께 생활하다 해방 직전 고향 북촌으로 돌아왔다. 남동생만 고향에서 낳았다. 아버지는 제주4·3이 일어나기 몇 해 전 일본을 오가며 비단과 광목 등을 사고파는 상업활동을 하다 고향 마을 인근 조천 해안에서 이웃 주민 2명과 함께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더는 돌아올 수 없었다. 쇠막(외양간)으로 쓰는 밖거리(바깥채)와 안거리(안채)로 된 집에서 할머니와 남은 식구들이 단란하게 살았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이야기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초등학교 1학년 한씨는 학교생활이 즐거웠다. 오빠는 6학년이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쪼들리지도 않았다. 남들이 고무신이나 짚신을 신을 때 귀여운 띠가 달린 까만색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어머니는 딸을 학교 보내려고 “학교 가자, 학교 가자” 하는 노래를 자녀들에게 들려줬다. 1학년 운동회가 있던 날, 운동장에서 오빠의 “옥자야, 뛰라 뛰라” 하는 응원에 기분이 좋아 힘을 다해 뛰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식량과 물자가 귀하던 그때, 제주에서는 온 식구가 둘러앉아 ‘낭푼밥’(양푼이나 나무로 만든 그릇에 담은 밥)을 먹었지만, 한씨의 집은 일본에서 가져온 빨간색 밥그릇에 어머니가 각자 밥을 떠놓았다고 한다. 한씨는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때는 학교에서 배운 거 집에 와서 복습하고, 학교 가려고 하면 마음이 설레서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곤 했어요. 그러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끝났어요. 4·3 사건만 아니었으면 어머니가 학교도 보내주고 남만큼은 살지 않았을까요.”

1949년 1월17일, 핏빛 물든 학교 운동장

모든 것이 끝났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들이 여럿 배출되고, 자존심이 강했던 마을은 군인들이 뿜어낸 총구 앞에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초토화였다. 북촌초등학교 인근 너븐숭이에서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부대원 2명이 희생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군인들은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다.

이날 낮, 한씨 가족들이 운동장에 들어가자 이미 운동장은 공포에 떠는 주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위협하며 군경 가족 등을 이리 나누고 저리 나누고 있었다. 주민들은 살기 위해 우르르 몰려다녔다. 손잡고 갔던 가족들은 운동장에서 흩어졌다. 어머니는 젖먹이 남동생을 업은 채, 나머지 식구들은 할머니와 같이 있다가, 다시 군인들이 가르는 바람에 오빠는 여동생과 옥자는 언니와 함께,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뿔뿔이 흩어졌다.

‘탕탕탕’ 총소리가 들렸다. “일로도 팡팡, 절로도 팡팡. 게난 다 엎드린거라. 경행 사격 중지허니까 고개 들렁보난 ‘아이고, 우리 어머니 어디신고’ 행 이디강 봐도 엇고, 저디강 봐도 엇고, 아맹 찾앙봐도 어신 거라.”(이쪽으로 팡팡, 저쪽으로도 팡팡. 그러니 모두 엎드렸어. 그러다 사격을 중지해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고, 우리 어머니 어디 있을까’ 해서 여기 가서 봐도 없고, 저기 가서 봐도 없고,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거야.)

네 살배기 남동생을 업고 있던 어머니는 운동장 한복판에서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았다. 누군가 한옥자에게 말했다. “아이고, 느네 어멍 죽었져.”(아이고, 네 엄마 죽었어.) “느네 오래빈 어멍 우이 돌아졍 젖 먹엄져.”(네 남동생이 엄마 위에 매달려 젖을 먹고 있어.)

어린 한옥자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할머니, 어머니를 부르며 애타게 찾았다. 할머니가 소리쳤다. “아이고, 샛 년아, 큰년아, 나 이디 있져. 느네 어멍은 죽어부렀져. 어멍 죽어부렀져게. 어떵 허코. 어떵 살코.”(아이고, 둘째 애야, 큰애야, 나 여기 있어. 네 엄마는 죽었어. 엄마가 죽어버렸어. 어떻게 할까. 어떻게 살까.) 어머니의 죽음은 어린 한옥자의 마음도 후벼 팠다. 한씨는 “그 어린 마음에도 너무 마음이 아파서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했다”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군인들의 학살극이 멈추자 엎드렸던 주민들이 일어나 자기 가족을 애타게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눈이 내리는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한옥자의 네 살배기 남동생 경림은 꼼지락거리며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었다.

한씨 가족의 비극을 그린 강요배 화백의 <젖먹이>. 강요배 화백 제공

한씨 가족의 비극을 그린 강요배 화백의 <젖먹이>. 강요배 화백 제공

“가슴이 조금 아픈 게 아니라 많이 아파”

북촌리 너븐숭이 4·3기념관에는 죽은 엄마 위에 매달려 젖을 빠는 아기의 그림이 걸려 있다. 북촌리 대학살의 비극을 보여주는 강요배 화백의 그림 다. 엄마의 윗저고리를 젖히고 젖을 빠는 아이가 남동생이다. 이날의 이 장면은 당시 학교 운동장에 모였던 모든 주민의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모습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당시 9살이던 이재후 전 북촌리4·3유족회장은 “군경 가족 오라고 하니까 그쪽으로 가면 살려줄까봐 운동장 서쪽으로 가다가 총을 맞았다. 홑적삼에 가슴이 드러나니 아기가 기어가 빨았다”고 말했다. 13살이던 이아무개(85)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 어멍네는 폭도로 오른 사람이 어신디도 애기 돌앙 저섬시난 쏘아부런. 경허난 어멍은 죽엉 걸러지고, 아덜은 어멍 누워 시난 죽은 줄도 모르고 가슴 헤쌍 젖도 먹은 거라.”(그 어머니네는 폭도로 산에 오른 사람이 없는데도 아기 데리고 서성이다가 총에 맞았어. 그러니 어머니는 죽어서 쓰러지고, 아들은 어머니가 누워 있어서 죽은 줄도 모르고 가슴을 헤쳐 젖을 먹은 거야.)

기자와 얘기하던 한옥자씨가 큰 소리로 울음을 쏟아냈다. 한씨는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가 죽어버려서 어떻게 살지 막막했다”고 말했다. 그는 너븐숭이 4·3기념관에 걸린 그림을 보면 그때의 일이 떠올라 페인트로 지우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와 젖먹이 동생 그림을 그려서 걸어놓으니까 너무 가슴이 아파요. 조금 아픈 게 아니라 많이 아파요. 어떤 사람은 그 그림이 역사로 남아 있을 거라고 하지만, 페인트라도 들고 가서 지워버려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개·보수할 때는 그림을 바꿔야 합니다.”

이날 마을에 있던 남녀노소 300여 명이 한날한시에 희생됐다. 제주4·3 당시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의 희생을 가져온 북촌리 학살은 학교를 중심으로 동·서쪽 들과 밭에서 자행됐다. 이날 오후 5시께 지휘관이 탄 지프가 인근 서쪽 함덕리에서 오면서 ‘중지’ 명령과 함께 학살극이 멈췄다. 이날 학살을 주도한 2연대 3대대는 서북청년 위주로 편성돼 ‘서북대대’로 불렸다.

언니는 운동장 앞에만 가면 넘어졌다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매캐한 냄새와 연기가 마을을 뒤덮었고, 곡식과 가축이 타는 냄새로 목이 메었다. 대부분의 초가가 불에 탔지만, 몇몇 집은 타지 않았다. 가족과 친척들의 주검을 임시 수습한 동네 주민들은 그곳으로 몰려들어 밤을 새웠다. 온 가족이 몰살된 사람, 부모 형제나 친척을 잃어버린 사람, 모두가 통곡했다. 이튿날 날이 밝자 동네 삼촌들이 불에 타 죽은 돼지를 갖고 와 삶았다. 먹을 것도 없고, 배는 고픈 동네 삼촌들은 울면서 먹었다.

이날도 눈이 내렸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3~4㎞ 떨어진 인근 함덕리로 소개됐다. 할머니는 남동생을 업고 손녀들 손을 잡은 채 이웃 주민들과 함께 함덕으로 걸어갔다. 한씨는 “입을 게 있나, 먹을 게 있나. 정말 피나게 고생했다”고 했다. 좁고 허름한 남의 방 한 칸을 빌려 여섯 식구가 함께 살았다. 다음날부터 할머니는 남동생을 업고 밥을 구하러 다녔다. 밥을 구하고 온 할머니는 손자 손녀들이 둘러앉은 밥상 위 양푼에 밥을 담았다. 그러고는 양푼밥 한가운데 수저를 하나 꽂아놓았다. 한씨가 물었다. “할머니, 어떠난 수저는 가운디 꼽암수과?”(할머니, 왜 수저를 가운데 꽂았어요?) 할머니가 대답했다. “이거 어머니 수저여. 너네 눈에는 안 보여도 너네 어멍이 이디 왕 있져. 너네덜 보래 왔져. 너네 밥 다 먹을 때꺼정 이 수저랑 건드리지 마랑 고만이 이시라이.”(이거 어머니 수저야. 너희 눈에는 안 보여도 너희 어머니가 이곳에 와 있어. 너희들 보러 왔어. 너희 밥 다 먹을 때까지 이 수저는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한옥자씨는 그곳에서 1년을 살고 한 살 밑 여동생과 함께 인근 김녕리의 사촌고모 댁으로 가 7~8년을 살았다. 김녕에 살면서도 할머니와 형제들 생각에 동생을 껴안고 눈물로 지냈다. 한씨는 “애착이 얼마나 심했는지 할머니 생각하고, 형제, 어린 남동생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 밥이 목에 걸렸다”고 말했다.

함덕에 남은 가족의 고생도 컸다. 할머니는 새벽에 북촌리로 보리밭으로 김매러 가면 언니는 함덕에서 밥을 지어 날랐다. 언니는 어머니가 숨진 학교 운동장 앞에만 가면 눈물이 나 엎어져 밥을 쏟곤 했다. 땅바닥에 엎어진 밥을 다시 담고 가 할머니와 함께 흙을 골라내며 밥을 먹었다. 그해 봄이 되자 함덕으로 소개됐던 주민들이 북촌리로 돌아왔다. 깡그리 불탄 집터에 움막이라도 짓지 않으면 안 됐다. 할머니와 오빠, 언니는 마을에서 5~6㎞ 떨어진 중산간 선흘곶까지 산길을 걸어가 나무를 베어 왔다. 나무 등짐을 지고 오다 넘어지거나 엎어지는 일은 늘 있었다. 오빠와 언니의 어깨는 피부가 벗겨지길 여러 차례 했다.

가족 7명 중 남은 건 언니와 한씨

12살 무렵, 한씨는 북촌으로 어머니 제사를 지내러 왔다. 고향에 오면 고모 댁으로 돌아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생해도 할머니와 형제자매와 함께 살고 싶어 눈물을 쏟아냈다. 할머니는 그런 손녀에게 “여기 살면 안 된다. 거기 가야 행복하고 옷도 잘 입고, 밥도 잘 먹는다”고 억지로 다시 보냈다. 한번 고향 집에 왔다 가면 열흘 동안은 눈물로 잠을 못 자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한씨는 25살에 결혼했다. 할머니는 그 뒤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젖을 먹던 남동생도 15년 전에 숨졌다. 여섯 식구 가운데 이제 남은 가족은 언니와 한씨뿐이다. “4·3을 만나서 아픔을 당한 말을 다 곧젠 허민 눈물 쏟아졍 살지 못헙니다. 뱉지도 못허고 말주변도 어시난 아픈 말을 다 못헙니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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