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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청구서’ 받아든 바이든, 조율 능력 시험대

공동의 적 사라진 ‘반트럼프’ 선거 연합, 진보 의제·인사 바이든 당선자에게 제안 봇물
등록 2020-11-21 14:33 수정 2020-11-23 01:14
2020년 1월20일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앞줄 왼쪽부터) 조 바이든 전 부통령, 에이미 클로버샤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마틴 루서 킹 기념일을 맞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에서 서로 팔짱을 끼고 흑인 사회 지도자들과 함께 행진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2020년 1월20일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앞줄 왼쪽부터) 조 바이든 전 부통령, 에이미 클로버샤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마틴 루서 킹 기념일을 맞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에서 서로 팔짱을 끼고 흑인 사회 지도자들과 함께 행진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2020년 미국 대선을 한 달 앞둔 10월8일, 미국의 진보적 시민사회단체와 민주당 내 개혁적 소장파 의원들로 구성된 ‘블랙라이브스매터’(BLM·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가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 후보가 당선할 경우 정부에서 시행할 개혁 어젠다를 제시했다. “미국이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소수 특권층이 아닌 다수 대중을 위해 작동하는 미국을 위한 로드맵”이다.

사회민주주의 소수정당인 노동가족당(WFP)이 ‘민중헌장’(The People’s Charter)으로 명명한 이 정책 제안은 ①부당한 피학대자 돌봄 ②에너지 돌봄 ③모두를 위한 좋은 일자리 ④서로 돌봄 ⑤미래 돌봄 등 다섯 분야로 짜였다. 세부 제안에는 △체계적 인종주의 끝내기 △경찰과 군대에 집중된 자원의 학교·주택·고용 분야 전환 △보편적 건강보험 △실업급여 확대 △경기회복까지 임대료와 채무 상환 유예 △공적자금 구제금융 기업들의 사원주주제 △화석연료의 그린에너지 전환 등이 포함됐다.

인종주의 종식, 보편적 건강보험 실시…

11월3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공화당)과 조 바이든 후보가 맞붙은 대선은 바이든의 여유로운 승리로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권력의 무게중심도 급속히 바이든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민주당과 시민사회에선 벌써 바이든 정부의 정책 방향을 놓고 급진파와 온건파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트럼프가 선거 결과에 불복해 법정 소송전을 벌이면서 3주째 선거 결과 공식 확인이 늦어지는 것과 대조된다.

최근 미국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앞서 소개한) 정강 정책은 미국 진보 진영이 새 정부의 정책 프로그램을 두고 민주당 내 중도파와 논쟁할 준비를 하며 제시한 ‘차별화 전략’”이라고 소개했다.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가 미국 사회의 핵심 쟁점에 대해 진보적 정책을 펼치도록 압력을 넣겠다는 것이다. 노동가족당의 고위 당직자 모리스 미첼은 “국민이 선거에 적극 참여하려면 표를 던질 만한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민중헌장이 바로 그것을 제공했다”며 “이번 대선이 이런 어젠다에 대한 국민투표였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선거 이후’에 대한 조건을 달았다”고 설명했다.

미국 진보세력의 바이든 정부 선점 전략은 정책 가이드라인만이 아니다. 11월14일 미국 언론들은 “40개 넘는 진보단체들이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 정권인수팀에 차기 정부의 주요 직책 후보자 400여 명의 명단을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풀뿌리 시민정치모임 진보적변화운동위원회(PCCC)의 스테퍼니 테일러 대표는 방송에 “이 명단은 바이든 대통령이 상원에서 (다수파인) 공화당의 방해에도 어떻게 과감한 의제를 완수할 수 있을지 보여주는 로드맵”이라며 “그 방법은 적재적소에 적합한 인물을 등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테일러는 “우리는 바이든 대통령의 행정부에서 기업 로비스트는 필요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고 덧붙였다. 이들이 미국 의회에서 대표 진보 정치인인 엘리자베스 워런(71·민주당) 상원의원과 버니 샌더스(79·무소속) 상원의원 공개 지지를 표명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워런은 미국 하버드대학 로스쿨 교수를 지낸 법학자로, 소비자경제 전문가다. 또 샌더스는 ‘민주적 사회주의자’임을 공언하는 급진좌파 정치인이다.

2019년 7월 미국 민주당에서 ‘급진적 진보주의 의원’으로 분류되는 (왼쪽부터) 아이아나 프레슬리, 일한 오마, 러시다 털리브,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연방 하원의원이 워싱턴에 있는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들의 혈통 배경을 트집 잡아 “원래 나라로 돌아가라”고 망언한 것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2019년 7월 미국 민주당에서 ‘급진적 진보주의 의원’으로 분류되는 (왼쪽부터) 아이아나 프레슬리, 일한 오마, 러시다 털리브,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연방 하원의원이 워싱턴에 있는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들의 혈통 배경을 트집 잡아 “원래 나라로 돌아가라”고 망언한 것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스쿼드도, 샌더스도 ‘진보 정책’ 압력 동참

바이든 차기 정부에 대한 ‘압력 프로그램’에는 민주당 안에서 진보적 소장파로 분류되는 하원의원 10명 안팎도 참여한다. 그중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이는 흔히 ‘스쿼드’(Squad·분대, 전담반)라고 묶이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31), 일한 오마(38), 아이아나 프레슬리(46), 러시다 털리브(44)다.

이들은 2018년 연방의회 중간선거 때 하원의원(임기 2년)으로 워싱턴 정가에 첫발을 내디뎠고, 이번 선거에서 모두 재선에 성공했다. 눈에 띄는 공통점은 △여성 △비유럽계 백인 △이민자 가정 출신 △30~40대 젊은 세대 △풀뿌리 정치운동부터 시작한 진보 성향이란 것이다. 젠더 및 성소수자, 인종, 이민, 불평등, 보편적 의료보장 같은 민감한 사회 현안에 대한 정책과 법안에서 한목소리로 급진적 시각을 대변해왔다. 오카시오코르테스 의원이 인스타그램에 이 4명이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면서 농담처럼 ‘스쿼드’라고 썼던 게 별칭으로 굳어졌다. 이들의 개인적 배경을 보면 ‘소수자성’이 더욱 뚜렷하다. ‘AOC’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 여성 연방 하원의원이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지지하는 사회주의자다. 대학 시절에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동생인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인턴으로, 대학 졸업 뒤엔 바텐더로 일한 경력이 있다. 일한 오마는 소말리아 난민 출신으로, 12살 때 부모와 함께 미국에 안착했다. 러시다 털리브는 팔레스타인계 이주자 2세로, 미시간 주의회 하원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오마와 털리브는 미국 연방의회 사상 최초의 이슬람 여성 의원이기도 하다. 또 프레슬리는 매사추세츠주 출신 하원의원 중 첫 흑인 여성이다.

2019년 3월 <폴리티코>는 민주당 내 개혁파 초선의원 그룹을 소개한 기사에서 “스쿼드가 가장 많이 알려졌다”며 “이들은 한 의원이 우파의 공격을 받으면 서로 보호해주고, 이들이 공동으로 낸 정책 성명은 의회의 일부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낸 성명보다 더 많이 언론에 보도된다”고 전했다. 연방의회의 기성 정치인 대다수가 엘리트 코스를 밟은 부유층 출신인데다 주고받기식 타협에 익숙한 정치 문법에 익숙한 것과 구별된다. 스쿼드 멤버가 재계나 기득권층의 로비나 압박에 흔들리지 않고 급진적 목소리를 내는 배경이기도 하다.

스쿼드의 정치 이념, 특히 경제·복지·노동 분야 정책은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거의 겹친다. 샌더스는 미국 상원에서 유일한 사회주의자이자, 2명뿐인 무소속 정치인이다. 버몬트주 벌링턴 시장을 거쳐, 1991년부터 지금까지 29년 동안 연방의회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에 내리 11선을 기록했다. 2016년과 2020년 대선 때 민주당 후보 경선 초기에 ‘샌더스 열풍’을 일으켰으나, 주류 정치권의 두꺼운 장벽과 싸늘한 외면을 끝내 넘어서지 못했다.

민주당 온건파, 급진적 주장엔 선 그어

샌더스는 11월11일 기고에서 “비난 게임이 폭발하고 있다. 코퍼러티즘(친기업) 민주당원들이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 그린뉴딜 등 이른바 ‘급진좌파 정책’을 민주당의 상·하원 선거 패배 원인으로 공격한다”며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최근 들어 샌더스는 바이든 정부에서 자신의 정치 신념을 실현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11월11일 방송 인터뷰에서 샌더스는 “내게 노동자 가족을 위해 싸우는 직이 허용된다면, 나는 그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것이 상원의원이든 바이든 행정부 입각이든 누가 알겠느냐.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보자”며 더 이상의 말은 아꼈다.

진보세력의 개혁 어젠다가 바이든 정부에서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물론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가 지지하는 정책도 일부 있다. △코로나19 무료 검사 △최상위 부유층 증세 △최저임금 인상 △경제·보건 위기 상황에서 주택 임대료 미납자들의 강제 퇴거와 압류 금지 등이다. 그러나 정부가 보증하는 단일 보험사를 통한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 ‘메디케어 포 올’(Medicare for All)이나 경찰 예산 감축 같은 방안에는 부정적이다.

바이든은 36년간 상원의원(1973~2009)을 거쳐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8년간 부통령(2009~2017, 상원의장 겸임)을 했다. 워싱턴의 현실정치 문법에 누구보다 밝고, 급격한 변화보다 안정적 개혁을 선호한다. 오바마 전 대통령도 2020년 4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바이든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오바마는 11월15일 방송 인터뷰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바이든 정부를 돕겠지만, 백악관에서 일할 계획은 없다”며 “미셸(부인)이 ‘뭐라는 거야?’라며 나를 떠날 것이기 때문”이라는 농담을 던졌다.

민주당의 대다수 온건중도파 의원들도 시민사회와 원내의 급진적 주장에는 선을 긋고 있다. 민주당 안팎에선 당내 갈등과 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바이든이 선거인단 과반(270명) 확보로 승리를 결정지은 11월8일, <뉴욕타임스>는 “대선을 앞두고 6개월간 온건파와 진보파의 단합을 유지한 민주당이 바이든의 승리 이후 이념적 핵심을 정리하는 어려운 과제를 맞고 있다”고 짚었다. 당내 온건파는 진보파가 보편의료 보장, 경찰 예산 삭감 등 대중에게 인기 없는 정책을 밀어붙이는 걸 비난한다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최대 승부처이던 펜실베이니아주에서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한 코너 램(36) 하원의원은 “그들(당내 좌파)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알고 존경한다”면서도 “그들이 실행 불가능하고 극도로 인기 없는 정책을 옹호하는 건 사실”이라고 꼬집었다.

혹독한 겨울이 바이든 앞에

이혜정 중앙대 교수(국제정치)도 최근 <창비> 주간 논평에서 “(2020년 대선에서) 미국인의 선택은 절묘한, 양측이 모두 반쯤은 절망하고 반쯤은 희망을 가질 만한 극단적인 분열과 교착이었고 이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며 “혹독한 겨울이 바이든을 기다리고 있다”고 내다봤다. 진보-보수, 민주-공화, 소수자-기득권층 분열만 심각한 게 아니다. “공통의 적이 사라진 ‘반트럼프’ 선거 연합은 서로 불화하며 바이든 정부에 승리의 지분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이혜정 교수)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는 평소 자신을 “실용주의적인 합의 조율자”라고 말해왔다. 대선 승리 이후 줄곧 “분열된 미국의 통합과 치유”를 다짐했다. 지금 바이든 앞에는 국정 운영에 앞서 자신의 당선을 적극 밀어준 지지 세력 안에서 분출하는 다양한 주장부터 조율해야 하는 시험대가 놓여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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